‘요가=결합’이라는 오해
조용한 수련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공간.
바닥 위로 요가 매트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은은한 조명 아래 향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동일한 동작을 취하는 사람들.
호흡을 맞추고, 같은 리듬으로 움직이며,
하나가 되어가는 듯한 느낌 속에서
그 여정의 끝에서 만나게 될 무언가를 상상한다.
평온함, 깨달음, 혹은 진정한 자아.
마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듯이.
이런 이미지들은 아름답고, 평화롭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경직감이 숨어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무감,
정해진 형태로 수련해야 한다는 압박감,
무엇보다 ‘올바른’ 요가를 해야만
비로소 내가 ‘안정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까지.
이 모든 것이 요가를 하나의 완성해야 할 과제로 만들어버린다.
요가 강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 하나가 요가의 어원이다.
“요가(Yoga)는 산스크리트어 어근 ‘yuj’에서 나온 말로,
‘결합하다’, ‘연결하다’, ‘합일하다’를 의미한다.”
-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요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 영혼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뜻,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해주는 수련이라는 의미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결합’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방향성은,
때때로 요가에 대한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yuj’의 이미지는 말에게 멍에를 씌워 마차에 연결하고
그 본능적인 힘을 어떤 목적지를 향해 이끌어가는 장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음이라는 야생마를 길들여, 더 큰 목적에 집중하게 만든다.’는 은유가 생겨나기도 했다.
앞서 '결합'과 관련해 보자면
멍에 또한 말을 마차에 '고정'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말의 힘을 마차로 '전달'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말은 여전히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마차를 끌어간다.
한 번 결합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반다(Bandha)라는 개념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반다는 흔히 ‘에너지 잠금장치’, 또는 ‘근육을 조이는 것’으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섬세한 조절 능력에 관한 것이다.
물리적으로 특정 근육군을 꼭 조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호스에서 물이 새지 않도록 적당한 압력을 유지하듯 필요한 만큼만 에너지를 조절해 흐름이 분산되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이다.
멍에가 말을 꽉 죄어서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게 하듯이,
반다 역시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순환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요가는 어떨까?
실제 요가 수련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묶임'이 아니라 '풀림'이다.
아침마다 뻣뻣했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오고,
하루 종일 얕았던 호흡이 깊어지며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차츰 고요해진다.
처음엔 다른 사람의 동작과 비교하며 조급해했지만,
점차 내 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어떤 날은 평소보다 유연하고,
어떤 날은 몸이 굳어있어도
그 모든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한 요가는 우리를 무언가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해방시킨다.
사회적 기대로부터,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요가의 진정한 모습은 바로 거기에 있다.
결합이 아닌 해방.
완성이 아닌 과정.
고정이 아닌 흐름.
이것이 바로 요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심의 메시지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자연스러움을 되찾기 위해 요가를 한다.
<흐르는 것들, 머무르는 마음>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
흐르는 일상 속에서
머무는 마음을 찾아가는 요가 에세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