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버리고 남은 것들
일기를 쓸 때마다 반복되는 패턴이 있었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하는 것.
하지만 그 내일을 지나 또 다른 오늘을 맞이할 때면
다시 반성하고 또 결심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원점 회귀.
일기를 쓰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였다.
‘열정이 넘치는 모습, 보기 좋아요.’
주변의 말들이 오히려 족쇄처럼 느껴졌다.
‘열정만 많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종종 열정페이나 희망고문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사라도 해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다른 사람의 글을 한 글자씩 따라 쓰면서
나를 잠시 멀리 두고 싶었다.
좋은 문장들을 따라 쓰다 보니,
다시 무언가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재주라고는 부족한 내가
살아가면서 굳이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을까?’
만약 지금 당장 죽는다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낙서처럼 적어낸 일기들,
보잘 것 없는 노트, 필사공책,
형광펜으로 가득 지운 스케줄러,
마이너스 통장, 대출 이력들,
아마 뭐 그런 거겠지.
‘아예 헛된 희망을 품지 말자.’
나는 예전 일기들과 스케줄러를 버렸다.
지난 날의 작은 흔적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하찮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던 중, 배철현 교수님의 글을 읽었다.
삶은 자신만의 임무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그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진정한 열정이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라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되지 않는 걸 억지로 되게 하려는 태도,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밀어붙이는 집착,
좌절하면 모든 것을 끊어내 버리는 습관.
그것들이야말로 내 안의 괴물이었음을.
그 괴물 같은 내 모습을 떠올리며
카프카의 ‘변신’ 속 벌레가 떠올랐다.
벌레가 가진 무력감, 소외감이
곧 카프카 자신이었을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도 카프카는
의지만으로는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결국엔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무덤덤한 덩어리처럼 행동하라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절망적인 문장이 나를 위로했다.
내 무력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모든 원고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던 카프카의 일기가,
어떤 이의 우정 덕분에 지금 나에게 닿아 있었다.
카프카의 에세이를 필사하며 깨달았다.
울었던 것도, 버렸던 것도, 끝없이 결심하고 좌절했던 것도.
그것도 전부 나였으며, 그저 내 이야기의 일부일 뿐였음을.
타인의 문장을 한 글자씩 옮겨 쓰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마음을 돌보다 보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잊고 싶은 것을
지우려 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요가 매트 위에 앉아 숨을 고르던 어느 날,
더 분명히 알았다.
열정은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강약의 조화를 맞추고,
밀고 당기는 힘의 균형을 기르듯,
일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수련하듯 살아가는 태도면
그 자체가 열정이다.
필사로 익힌 다른 작가들의 리듬이 손끝에 남아있고,
요가로 기른 고요함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면,
그것야말로 조용히 타오르는,
나만의 불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