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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Sep 11. 2016

<사피엔스>-인류의 전환

인간의 지적 설계에 의한 현 인류의 종언을 예언하다

마지막 작가의 질문이 뇌리에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변화가 가속화되다 못해 이제는 마치 길거리를 걷는 순간에 다가와서 스치는 바람인 것처럼 매 순간 체감되고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이르러, 변화를 다루고 있는 책을 읽다가 맨 마지막 장쯤에 이르러 그 내용이 쓰인 시기가 1~2년 전이라는 상황만 확인해도, 수십 년 전에는 알았어야 했을 내용을 이제야 알았다는 낭패감이 생길 정도가 된다.


유대인 작가인 유발 하라리가 이 책을 집필하던 시기는 2014년도이다. 그리고 내가 막 '인공지능'의 위협에 대해서 점점 더 체감되는 실제적인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2015년도부터였다. 물론, 인터넷 문명의 기하급수적인 변화는 1990년대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매시간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의 현 인류를 종말 시키고 새로운 인류로 넘어가게 만들 과학적인 혁명의 파도인 인공지능의 창궐은 실상 2014년까지도 하나의 만화나 영화 스토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본 순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전 세계적인 흥분과 모종의 절망감 비슷한 감정을 낳은 시기에 인공지능이 이제 세상을 뒤집어 놓을 준비를 차곡차곡 마쳐가고 있다는 실질적인 긴장감은 최고조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마치 저 먼 국가 또는 북한에 있다고 하는 핵무기의 존재감이나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제 하는 존재로서 삶의 일부가 되어 내 안팎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업계획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이제 인공지능의 침투나 활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데이터의 수집은 이뤄지지 않으며, 일상의 영위와 양육, 친구들과의 관계, 교육, 책 읽기와 쓰기, 사색 등 모든 것들의 배경으로 인공지능의 역할이 은연중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사피엔스는 이러한 영향력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인공지능 창궐의 역사적 배경과 인류가 이를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도서이며, 주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적어도 책의 제목이나마 들어보거나 보지 못한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큰 폭으로 위축된 도서 시장에서도 "사피엔스"는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누리고 있다.  구매층은 압도적으로 3~50대가 많다.



인류의 역사는 여러 관점에서 각기 다른 해석을 낳는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의 관점은 이제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현재까지 지구를 지배해온 인류가 이제 바야흐로 다른 종류의 존재로 바뀌어가고 기존의 사피엔스라는 존재로 불리던 인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어떻게 새로운 인류로 물갈이를 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질문을 하나의 관점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기준으로 다시 역사를 추적해 나가는 방식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변화에 마비되어 버린양 맹렬하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역사를 보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분명히 지구에는 5종류의 호모가 붙은 유인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사피엔스뿐이다. 이 과정에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집단 협업을 할 수 있는 언어 체계를 개발하고 사용한 사피엔스가 그와 같은 인지 혁명을 겪지 못한 타 인종들을 절멸시킨 내용이 나온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보아도 그렇고 그렇게 타 인종들을 몰살시킨 잔인함에서도 드러나듯이 사피엔스는 지구에서 나타난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공포스러운 집단이다. 각 개별 존재의 물리적인 힘이야 네안데르탈인보다도 약하고 육식동물이나 매머드 같은 대형동물들보다 보잘것 없었지만, 인류에게는 그 어느 생명체도 가지지 못한 인지 능력 상의 압도적인 우월성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일종의 진화론 상의 상식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작가의 독특한 해석은 농업혁명의 시기에 이르러서부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각을 제시하게 된다. 실제로 신 구석기인들에 비해서 농업혁명에 이르고 난 시기 이후의 인류의 영양 상태나 질병 예방 등의 삶의 질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공부했던 내용과는 다르다. 여기에서 나온 역설은 "밀이 인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라는 문장이다. 정작 인류 대부분의 생활은 이 과정에서 더 나빠진 반면에, 농업을 위해서 만든 집단 거주 지역에서 인구는 늘어났지만, 그 같은 상황이 개별적 인류에게는 그 이전의 시대보다 더 많고 빈번한 고통을 낳았다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 인류의 장대한 협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동원된 '도구'가 "종교"나 "사회 이념 또는 체제"라는 시각도 일부 종교인들이나 절대주의적인 철학의 신념을 가진 이들의 의견에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은 자본주의 체제로 전반적으로 통합되고 확장되어 가면서 "소비"를 하나의 종교처럼 숭앙하게 되고, 과학혁명의 배후에서 맹렬하게 작동했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의 시기를 거쳐 고도첨단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해왔다.


이러한 역사적인 내용을 해석하는 작가의 관점은 서구 우월주의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서구 열강의 영토확장과 과학혁명을 통한 문명의 발달사를 하나의 우연적인 상황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지리에 살고 있었던 인류가 서구 열강들이 살던 지역의 인류보다 저열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수많은 유대인과 아시아인들에 대한 학살을 당연시한 나치나 일본 군국주의의 창궐과 같은 비극을 낳은 과학의 탈을 쓴 압도적인 편견에 휩싸인 무지와 폭력을 분명히 비난하고 있다.


다만, 후반부에 와서는 현생 인류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명확한 근거가 희박하다는 본인의 주장을 펴는 과정에서 다소 인류의 역사에서 일부 이루어져 온 "진보"라는 환상에 대해서 맹렬하게 질타하면서 기존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상식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과학의 끊임없는 발달이 인류를 이전의 인류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냐면, 결국 각 개인의 행복은 외적인 조건의 변화보다는 다름 아닌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해서 좌우되는 것이지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편의, 더 많은 기술에 의해서 더 커지거나 그 지속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지론이다. 여기에서 유전적 로또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미 이 같은 호르몬의 배열이 좀 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잘 타고난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다 행복하고,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나온다.


그러나 부연하는 내용에서는 다시금 "행복"이라는 것은 또한 생물학적인 개념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개인이 가진 생각이 결국 그 행복의 고저를 결정한다는 정론적인 내용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등장한다. 치우친 듯한 글을 쓰면서도 결국에는 다시금 어느 정도 균형이 있는 사고로 돌아오는 망설임이 글에서 느껴지는 이유다.



글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변화를 보다 충격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쓰인 여러 글들에서 나타났듯이 이미 과학적인 발달이 최고조에 달한 듯한, 세 가지 새로운 인류가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나타난다. 의학 및 유전 공학 기술이 발전 접목되면서 일련의 능력들이 선택적으로 강화되면서 변형되는 인류와 기계와 결합된 사이보그, 그리고 인공지능이라고 불리는 비유기질 곧 컴퓨터 등의 사물에 담긴 인간의 의식 등에서 만들어진 인류 세 가지의 분류로 나뉜 내용에서,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는 사실 SF화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것은 그가 그러한 기술과 의학, 인공지능의 학문이나 산업 자체의 종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계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관련된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내가 웹상에서 확인했던 바 2050년쯤에는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류가 영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라든가, 실제 뇌와 컴퓨터의 연결 등을 통해서 생물체의 의식으로 기계를 작동시키는 시도들이 성공한 일례들, 바야흐로 인간의 사고 작용과 지식뿐만 아니라 의식의 작용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까지 컴퓨터 상으로 구현하려고 하는 움직임 등, 유럽 연합이 막대한 연구 자금을 투입하고 미국과 일본, 중국 등의 선진국까지 막대한 자원을 퍼부어 연구하고 있는 인공지능에 관련된 과학과 산업의 동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예측에 어느 정도 이상의 신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이제 보통의 인간이 천재가 될 수 있는 약이나 기재가 등장한다면, 현재까지 상류층들이 주장해온 것처럼 그들은 돈으로 상류층이 아닌 사람들은 꿈조차 꿀 수 없는 능력을 지니게 될 수 있고, 영생조차도 돈으로 살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유한한 생명만을 갖게 되는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박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반면에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부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배우자나 친구, 가족이 죽었을 때 몇 배나 더 큰 비애와 고통을 갖고 영원히 불행하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시몬 드 보봐르가 쓴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에서 나온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아가는 몸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과 함께 불노불사의 약을 먹은 쥐 한 마리만 빼놓고 모두가 죽을 세계를 영원히 살아가는 끔찍한 결말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다가오고 있는, "길가메시 프로젝트(신화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던 인물의 이름을 사용)'가 작동되고 있는 세계에서 이제 이 이야기는 뜬구름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제 전혀 다른 인류로 변화해야 하거나 다른 인류 앞에서 사라지게 될 우리는 과연 "무엇을 원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어려운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리고 섬뜩한 느낌이 내 등을 타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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