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소년이 내게로 왔다
오래전 글을 다시 읽다보니
점차적으로 내가 예상했던
순서대로 나는 세상과 닮아가고
있었다. 나자신으로 남기보다는
역시나 누군가와 닮기를 간절히
원하고, 누군가가 사는 것을 사고
있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보는 영화를
찾아보고 그 불특정 다수가
좋아하리라 기대하는 글을
쓰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보니 알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글도 읽지 않고 읽은척,
잘 아는척 하는 꼰대가
되어 있음을.
싫어하는 사람을 너무
열심히 욕하다보니
머리 속에 남은게 욕뿐이라
그대로 닮은채로 살아가게
되었나 싶다.
그러다 집어든 책이
“소년이 온다”였다.
거의 악마적인 꼰대들이
죽인 광주의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실감나는 정도를
지나쳐서, 영혼이란게 있다면
그 안으로 스며들어 온양,
세포 하나하나에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지니도록 만드는,
짧지만 위력 있고 단호한
메시지를 던져 제압당하도록
만들었다.
한강이라는 소설가의 네임
밸류에 눌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 글은 명확히 잘 써졌다기 보단
참혹함과 비참함 속에서 어떻게
말해야 마음이 냉정하게 굳어진
사람조차 진실을 알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거였다.
아직도 광주에서 덜컥 관청에
모여 총을 맞은 사람이 모두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 믿고 싶은
그 어떤 꼰대라도 이 글을 읽고선
진실을 눈 감아 버릴 순 없다.
단지 거짓인줄 알고도 안 그런양
살아갈 수는 있다고 해도.
“고통 없이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이 소설을 읽게 된 이유는
거래처의 나이답지 않은
차림새를 즐겨 하는, 머리가
하얗게 샌 이사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란 질문이 나와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책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는
기적적인 일이므로 신나게
하루키와 헤세, 밀란 쿤데라가
어쩌고 이야기하다가 나온 그 분이
감명깊게 읽었다는 책이 이것이었다.
“고통 없이는 진실을 알 수 없다”가
그의 신념인데, 그것을 관통하는
소설이었던 모양이다. 이야기 중에
세 번, 그 문장은 반복되었다.
물론 하루키는 민주항쟁을 이야기한
작가는 아니지만 부패한 정부와
공공 시스템이 사이비 종교와
만나서 만들어낸 옴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르포를 썼다.
나중에 이 분께 이 책을 선물하기로
했다. 가벼운 작가라 폄하를 하셨기에.
나역시 여기에서 진실을
봤었다고 생각했지만
한강씨는 하루키가 가진
치밀함과는 달리 소설 속에서
그가 인터뷰했을 사람들의
영혼을 살려내고 진정한
리얼리티를 살아나게
만들었다.
이런 것이 깊이란 느낌이
오랜만에 다가왔다. 마치
소설 속에서 고집스럽게
관청에 남아 죽음을 선택했던
소년처럼 내 안의 소년이
나에게로 온 것이다.
정의도 신념도 이타주의도
비웃는 이 현실 속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