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도에 쓴 글을 다시 다듬어 써보다. 왜 글을 쓰는가?
오래, 한 달 반여가 지나가도록 글을 띄우지 않았던 브런치에 돌아와서 드물게나마 제 글에 반응을 보여주신 분들이 있어서 많이 기뻤습니다. 읽어주시고, 그래도 답글을 주시는 분들 한 분 한 분이 제게는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지, 저만큼 잘 알 수는 없을 겁니다. 다들 과묵하시고, 저도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런지, 대화를 나눌만한 기회가 없다 보니 그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을 드릴 새도 없었네요.
진지하게 학문을 탐구하거나 혀를 내두를 만큼 특정의 분야를 아주 깊이 들어가서, 그만큼 유용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반응이 있다는 것은 저와 같이 취미와 직업을 오가면서 띄엄띄엄 글을 올리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는 중입니다. 저에게는 어쩌면, 이곳에 글을 올리는 한순간 한순간이 기적에 가까운 내용이고, 또한 이 글에 대한 반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로 신선한 충격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그렇습니다.
곰곰이 브런치에 올려왔던 글들을 보니, 지난 시간들에 비해서 요즘은 가끔 브런치를 열어보기에도 여유가 없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연휴 중에도 공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는 하루하루를 3월 중순부터 내내 보내고 있네요.
그러다가 정말로, 풍부한 내부의 가열 찬 열정이 없더라도 무언가, 혹시라도 누군가가 필요로 할만한 글을 하나쯤 지금은 올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썼던 글을 하나 찾아 잘 다듬어서 올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더군요. 그것은 오늘 제가 여기서 쓰고 싶어 하는 말들을 담은 18년 전의 글을 다시 찾게 만들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정확하게도 마치 글과 말을 잃고 사는 동안 숨어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온 제 마음속의 주거지를 틀고 있던 장성한 동물이라도 된마냥 "오늘 새롭게 쓴 글처럼,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저에게는 하나의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부제: 2000년도 파견 근무지에서 직장 초년생의 글......
애정이 없다면 한 대상이나 사람에 대한 분석이나 이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제가 보아주기를 또는 이해하기를 바라는 부분만을 보지 않고 나름의 상상을 펴거나 곡해한 이야기마저 띄워주어도 사실은 행복합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자기 글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큼 글 쓰는 이에게 더한 끔찍한 상황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거 뭔가 이상한데?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집중력은 기울여서 글을 읽는 것이, 무신경하게 읽고 나서, "잘 쓰셨네"라고 의례적인 인사 치례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약간 삐딱하니, 글의 어느 부분인가를 짚어서 한 말씀 주시는 분들의 관심에도 사실은 가슴이 설렙니다.
제가 오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글쓰기와 관련된 우화입니다. 까마귀가 덕지덕지 여러 새들의 깃털 조각을 모아 붙여, 강가에 서서 새들의 관심을 끌어보겠다고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을 때의 "까마귀"라는 존재는 (새들이) 자기 자신을 "깃털로 뒤덮인 상태의 모습"으로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봤었던 이런 우화 속의 까마귀가 이곳에 글을 띄우고 있는 저와 비슷한 존재는 아닐까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까마귀의 가식 또는 허위라고 불리는 행동을 이해한다면 또한 그의 내부의 진실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 까마귀가 다른 새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었다면 깃털을 주워 모아 붙인 순간 다른 새들이 잘 모르고 있는 점들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 여러 새들의 깃털을 모아 붙이면 색다르고도 화려한 모습이 만들어질 수 있다.
2. 원래 새라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바라보게 되는 법이다.
3. 새는 사실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동물이다.
4. 그들이 보았을 때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특징은, 곧, 각각의 깃털은 시선을 끌어 모을 것이다.
"모방으로부터 창조가 나온다는 말"과도 같이 결국 우리가 때때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온전히 나오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실은 원래 있었던 것들로부터 대부분 나오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그러나 분명 현대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시들어 가고 있는) "자유의지의 환상과 지성과 꿈"은 결국 우리가 과거로부터 온 내용들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과장에 가까운 "자의식"을 낳고, 아무런 기반이 없다고 하더라도 남과는 뭔가가 태생부터 틀린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창조해내고, 정말로 남다르게 살고 있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 자신되기"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까마귀가 덕지덕지 몸에 붙인 깃털들과도 같은 저의 "글"에 대한 오랜 시간 동안의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저뿐만이 아닌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겪는 끊임없는 오해와 곡해, 그리고 몰이해,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고나, 이해의 노력을 기울이지 못하여, 또는 아무리 이해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애쓴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진실이나 본질을 벗어나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드는 경험과 지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나다운 글"이라는 것을 써내릴 수 있다는 기대를 그치지 않고 계속 쓰는 것. 그 자체가 다름 아닌, "나 자신되기"를 멈추지 않는 "나 자신"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국 아무리 어설프고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처절히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사고하고, 실제의 자기가 가진 의미를 이곳저곳에서 찾아 부여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설사 모자이크일 뿐일지라도,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따다 붙인 깃털을 단 까마귀는 그냥 까마귀와는 다른 까마귀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자이크 작업 속에서 개개인의 완성이나 확장,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이해도 조금씩, 그나마 나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고유의 존재로도 남을 수 있다면, 이른바 자기 실현이란 결과와도 맞닿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변화의 길 위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변화가 불가하고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 중에 차별성 없는 숫자 하나를 추가하는 사람이 되겠지요. 이를테면, 나이와 소득 수준, 학력, 취미, 성별......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름이 없는 인간이란 존재는 어쩌면 이리저리 분류된 수치화한 데이터의 일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만 같을 때가 있습니다.
까마귀가 그나마 존재하려고 깃털을 주워 모아 붙인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곰곰이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바람에 결국에는 모아 붙인 깃털들이 날아가 조롱을 당했던 그 까마귀가 오히려 "나 자신되기"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이야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2000년도에 회사에서 파견 근무를 나와 상월곡동의 모 회사에서 기업공개에 관련된 컨설팅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컨설턴트로서의 자질이 약간은 인정을 받아 저에겐 컨설턴트라는 직함도 붙었었고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근무하는 회사나 회사의 사람들보다 이곳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회사의 상황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했었지요.
계속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도 해보고, 자료도 찾아보고,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원래 제 자신이 다른 사람을 보는 방식으로 보기도 해보았습니다. 사용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 기업에 대해 가치 상승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의미부여, 변화, 문제 해결을 위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나름 치밀한 분석을 통해 어떻게 경영을 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했지만... 가장 중요한 "기업의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은 제 손가락 사이를 아주 쉽게 빠져나가더군요. 그것은 그 기업이 오랜 역사나 환경을 통해서 만들어낸 성공할 수 있는 방식을 짧은 기간 내에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긴 일이었습니다.
결국 분석의 과정이란 가장 중요한 것들은 정작 못 보는 우를 범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이오네스코의 희곡 "코뿔소"를 보면 이 분석의 과정에 대한 신랄한 이오네스코의 냉소를 볼 수 있습니다.) 털의 아름다움이나 형태, 다양함에만 분석의 포커스를 두다 보면 까마귀가 덮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나 추측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 우화 속 이야기를 떠난 현실에서도 자주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브런치 공간에서 제가 행하는 분석이나 이해의 작업은 저의 직업상의 일이 아니라 사적이고 내밀한 저자신의 꿈과 결부된 일들입니다. 때로 나는 꿈속에서 현실로 보내지고, 현실에서 꿈으로 보내집니다. 보내는 쪽은 때로 타인이나 단체이고 가끔은 바로 다름 아닌 저자신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고,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쉽사리 제 글을 읽는 분들에 대해서 판단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항상 제 능력을 다하여서 이야기를 해야만 그나마 동등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 상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받아들이려 애씁니다.
만약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 우리는 서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나마 고민할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예나 돈, 사랑, 권력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글을 쓴 그 순간 글 쓰는 이의 진정한 욕구는 그 글자체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글 쓰는 이의 의도는 안타깝게도 작품을 써가는 과정 중에 이미 빗나가게 되기 마련이지만, 쓰는 그 순간의 간절한 쓰는 이의 바람은 그 글이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글이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2000년에도 2017년에도 저란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만한 것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 더 나아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제가 쓰는 글이 온전히 저만의 글이 아니라는 것은 제대로 깨닫고 있다는 것과 그래도 주제는 하나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세우고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정도입니다. 맹목적인 글쓰기에서 이제는 그래도 목적을 가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한 가지 변화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맹목적인 성실이나 복종의 의미에서만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회사의 목적을 인식하고 이해하면서 나 자신이 가진 목적을 동기화하거나 절충안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성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이런 변화를 어느 순간 뒤돌아서 알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다름 아닌 꾸준히 쓰고 있는 글쓰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수많은 장점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설사 블로그에 남기는 글이 되건, 혼자만의 일기장이 되건, 컴퓨터나 모바일폰 등에 남긴 글이 되건. 잃을 것이 없는 훌륭한 시도가 글쓰기입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다른 기능이 떨어지거나 다른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글을 쓰는 능력이 떨어지는 비례나 반비례 관계는 없습니다. 말이나 글도 하나의 행동이고 결과이자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