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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ug 02. 2020

<지금 이 순간, 나답게 하는 것>

모든 것을 다 빼고 남은 하나, 그것이 나를 나답게 하고 있다.

"나"는 이 첨단의 기술 문명과 더 이상 매일매일 그 변화를 감잡을 수도 없이 변화하는 이 세계의 흐름 속에서 과연 무엇일까요? 좀 더 와 닿게 "나답다"라고 부르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질문은 이제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엄청나게 방대한 인간의 정보를 수집한 일련의 기관이나 우리의 스마트 폰, SNS 활동, 카드로 제품을 사고 지불한 정보, 포털 사이트 등에 남아 있는 검색 정보를 다 갖고 있는 수많은 대형 기업은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에 대해서 더 많은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페이스 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열면 튀어나오는 수많은 광고와 추천 친구 목록을 가끔 들여다보면, 이 정보 수집 및 해석, 분석 기술이 발달한 근 미래에는 그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저의 전기 같은 것은 한 권 분량의 서적으로 파일화 되어서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릴 통계화 하면서 분류해 내고 있다.(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아직은 정확하게 "나"를 저자신보다는 잘 읽어내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사실은 무엇을 사고 싶어 하고, 어떤 욕망을 갖고 있으며, 취향이 무엇이고, 어떤 지식수준을 지녔으며, 가정환경은 어떠하고, 삶의 궤적이 대략 어떻게 흘러왔으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지 이런저런 "나"란 사람에 대한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페이스북"이며, "구글"이고, "애플", "삼성" 등이란 생각이 정말로 실시간적으로 듭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저런 취향을 읽어 제 앞에 나타난 정보를 보고 나서 읽게 된 책과 지식, 사회생활에서 접한 내용으로  만들어진 지금의 "나"는 어쩌면, 진정한 본질을 떠난 상태로 마치 오래전 사라진 "마야 문명"이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한 곡의 서사시적인 노래를 만들어서 그 노래에서 나온 삶대로 하나하나의 문명의 구성원이 살아가도록 만든 역사 속의 내용처럼 수많은 타인이 이미 만들어 준 내용대로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각 개인의 인생을 철저히 통제한 문명이었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그렇게 생각하면서 곤혹스러워하며 글을 쓰려고 시도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저 먼 산에서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한번 멀거니 쳐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혹, 그런 저런 함정에 빠져 저도 모른 상태에서 만들어진 "나다움”을 떠난 진정한 “나다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란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하다 보니 어떻게 써야 할지 굉장히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기도 했고, 그대로 써 놓고 파일을 저장한 뒤에 그 글의 키워드로 실제로 세편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그중의 하나의 글은 마치 저만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럴듯하게 잘 써졌지만, 키워드 검색을 해보니 그와 유사한 글이 적지 않은 링크로 웹상에 퍼져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창작의 어려움 중에 하나인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작품"이 저의 눈앞에 쉽게 나타난 것입니다. '음, 이 글을 올렸다간 그야말로 글의 주제에 반대하는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겠네'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다듬어 올리기로 했습니다.


가면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또 한 편의 글은 저의 영화 감상문 형식을 빌어 감명 깊게 본 영화를 토대로 그 영화가 다룬 "나다움"이란 주제를 제가 쓰고자 하는 내용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속에서 그려진 "나 자신"이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다소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어떻게 다시 희망과 연결시킬까를 고민 중입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였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마지막의 글이 결국에는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가장 잘 맞는 글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 글을 더 써보고자 하니 그제야 저 먼 산에 올라가 있는 저를 유체 이탈한 저 자신이 "그래 그게 맞아"라고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것은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빼고 버린 뒤에 제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결국 "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왜 난 써야만 하는가?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그렇게 버리다 보니 저의 이름이 모든 것을 다 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저의 것이더군요. 우선 다른 나라에서야 쉽게 지어주는 이름이고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흔한 이름일 수는 있지만, Roman이라는 영문으로 지어진 저의 원래 이름인 "로만"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흔치 않은 이름이라, 제 정체성을 남과 다르게 만들어 온 가장 중요한 "나를 나답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이 이름의 첫 번째 뜻인 "(낭만적인) 소설" 때문에 저는 어렸을 때 소설가가 되기를 희망했었고, 습작 형식이었지만 서너 편의 소설을 써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어떤 것도 유명한 글이 되지는 못했지만,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언젠가 불현듯 태어나서 그때까지 바로 그 소설을 쓰려고 준비를 계속 해오기라도 했던 양 400자 원고지 32매, 12,800자 분량의 자전적 소설을 며칠 걸리지 않아 단숨에 써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30년 가까이 블로그 시대 이전에는 여러 노트에, 그 이후에는 블로그에 계속 글을 쓰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이름입니다.


불 태우듯이 쓴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이 책이나 영화를 본 뒤에 계속해서 글을 쓰게끔 만들고 있고, 그것은 제가 저의 글을 통해서 인기를 얻거나 돈을 벌거나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결과를 떠나서 "나다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인증해 준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작가"라고 부르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 하는 일은 아님에도 불구하고요.


그 이름의 두 번째 뜻인 "로마 사람"은 한 때 지중해 일대를 정복하며, 유럽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비록 대중적으로 각색되고 오류도 많은 서적이었지만 한 권 빠짐없이 "로마인 이야기"를 세세한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게 만든 것도 이름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뚜렷한 다른 이유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로마제국의 적지 않은 식민지 국가들은 지배를 문명/문화적 수혜로 받아 들였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인류의 길고도 긴 역사 속에서 위대한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여 아직까지도 전 세계에서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 "로마"라는 국가는 여러 의미에서 제가 우리나라에서 낳고 자라며 배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는 많은 면에서 다른 "나"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문화적인 다양성을 존중하며, 세계 시민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더 편안함을 느끼는 저를 순간순간 발견하고는 합니다. 물론, 폭력과 압제도 이 제국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들은 다른 국가 대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다른 문화에 관대했었죠.


지금에야 우리 사회도 다원화된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고 남다른 것을 관용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런 시대에 오기 전까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그저 이 사회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가끔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저 또한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교적 흔한 이름을 가졌다고 그 인생이 흔한 인생으로만 간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특별한 이름을 가졌다고 그 인생이 특별한 것으로만 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름 그 자체보다 이름에 부여하는 의미 그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할 터인데, 그 의미에 각자가 가진 자신만의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니까요.


이름을 빼놓고 이렇게 저렇게 다 버린 뒤에 또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떠오른 것의 모든 시작은 이름에 연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너무나 명확해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름"이다라는 결론을 적고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려니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려고 하네요.


그러나 "이름"이라고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수많은 의미를 두고 우리들 각각의 이름에 부여한, 멀리로는 조상의 의지와 저나 여러분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의도나 동의,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반응이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나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깨달음 비스름한 것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이유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생각과 행동의 시발점이 되고, 연장선이 되며, 확장된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해보니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숙명론 비슷한 화살이 날아와 박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 이름을 사랑하며, 이 이름에 걸맞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시도하는 하루하루가 저를 변화시키고 나아가게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모르파티”의 뜻처럼 그 운명을 깊이 사랑하는 중입니다. 마치 로마인처럼.


운명을 사랑하는 것은 운명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진 출처: unsplash.com 의 Free shared Photo)


코로나가 휩쓸고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며 우리의 미래를 불투명하고 앞이 안 보이도록 자꾸 흐릿하게 만드는 이 시기에 "나답게 하는 나의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명쾌하게 떠오르는 자신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혹, 제가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어딘가의 디지털화된 기록으로써 남아 있을 수 있는 제 이름과 연결된 글이 결국에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나다움"의 빼고 빼고 빼고서도 남아 있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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