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념이 없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히로인의 압도적인 액션
둔중하고 토속적인 느낌이 나는 타악기와 더불어 강렬하게 시작 해서 긴장감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음악이다. "배댓슈"부터 "원더우먼"의 등장과 긴박감 넘치는 액션씬이 조합될 때마다 마치 조건반사 작용을 만들어 내는 듯, 관객들에게 지금 나오는 장면이 재미있고, 박력 넘치는 액션이다라는 신호를 전달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오가는 출장길에 일명 "배댓슈", "배트맨 대 슈퍼맨"을 한번 더 보았다. 최근 두 번에 걸친 출장길에 오가는 항공편에서 본 영화들은 이외에도 "라라랜드"와 "스타워즈 로그원", "어세신 크리드",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다섯 나라의 전투" 였는데, 이미 마음속으로 DC의 "원더우먼"을 보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 내가 왜 "원더우먼"을 처절한 "배댓슈"의 실패 이후에도 보기로 한 것인지에 대한 합리화가 필요했는지, 나도 모르게 "배댓슈"를 이 영화들을 다 본 이후에도 고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생하게 떠오르는 영화도 이것이다.
"배댓슈"를 보면서 또렷이 이해할 수 있었던 감독의 의도는, 다음의 독립 영화로 만들어 내놓을 이 영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원더우먼"이 격렬한 액션씬에 돌입할 때마다 조건반사적으로 관객들이 떠올리게 될 음악에서 드러난다. "Is She With You?"이 제목은 "그녀는 네 편이니?", "그녀가 너와 같이 온 거지?" 등등으로 번역을 할 수 있어서 꽤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테마송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잘 만들어졌다. 우리가 심장 고동 소리에 가까운 파동을 타고 울려 퍼지는 타악기의 소리에 끌려든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바탕에 깔고 만든 양, 적절한 타이밍에 "원더우먼"의 등장에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낳고 있다. 뭔가 순수하게 강력한 액션을 기대하게끔 한다.
둔중하고 토속적인 느낌이 나는 타악기와 더불어 강렬하게 시작 해서 긴장감을 유지하며 흘러가는 음악이다. "배댓슈"부터 "원더우먼"의 등장과 긴박감 넘치는 액션씬이 조합될 때마다 마치 조건반사 작용을 만들어 내는 듯, 관객들에게 이 장면이 재미있고, 박력 넘치는 액션이다라는 신호를 전달한다.
스타워즈"나 이전의 "맨 인 스틸"이전의 "슈퍼맨"시리즈, "인디애나 존스"에서 한스 짐머와 같은 급의 작곡가들이 부리는 마법 인양, 주인공의 테마와 더불어 떠올리는 음악이 있기 마련인데, "원더우먼"에게도 드디어 이런 영화들처럼 익숙하게 배여 드는 테마곡이 생기게 된 것이다.
적어도 이 하나만으로도 "배댓슈"에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서 한껏 상승시킨 "원더우먼"의 존재감은 새롭게 개봉한 "원더우먼" 독립 작품에서도 성공적으로 이어질 것이라 다시 기대할 수 있었다. "배트맨"과 "슈퍼맨"의 다소 김 빠지는 대결을 넘어선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강력한 미지의 힘"을 가진 "원더우먼"의 모습은 한번 더 속는 셈 치고 영화를 볼만한 충분한 이유를 선사했고, 이 알 수 없는 느낌의 갈구가 생긴데에는 테마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알면서도 감응이 된 게 아닐까?
이 영화는 오히려 4~50대의 어린 시절, 외화 "원더우먼"을 방영 때마다 빠지지 않고 보았을 수많은 4~50대, 혹은 60대의 추억을 회상하는 영화다.
40대 중반에 이른 직장인이, 어쩌다가 생긴 휴일에는 육아에도 힘을 쏟아야 하는 상황에서, 개봉 영화를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꼭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다라는 판단이 설 때까지 이미 영화를 둘러싸고 나온 기사문과 줄거리 요약 내용, 블로거나 전문 평론가의 글들을 몇 편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검색만 해도 다들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영화 외적인 비판, 즉, 영화 속에서는 인류의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역할을 "갤 가돗"이라는 미스 이스라엘 출신의 여배우가 하게 되었음에도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팔레스타인 공습은 옹호하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보이콧해야 한다는 비난을 빼놓고는, "이전까지 나왔던 히어로 무비 중 최고, 다크나이트 라이즈 급의 영화, DC가 드디어 해냈다 등등" 최상 수준의 칭찬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와 연관 지어서 영화를 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우선 순위에 들어가 있지는 않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에 보지 않는 영화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갤 가돗"이 이스라엘 여군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군에 의한 선량한 팔레스타인들의 죽음마저도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은, 본인의 양심에는 꺼리낌이 없더라도 글로벌한 관점에서는 어색한 일이다. 특히나 "원더우먼"이 갖고 있는 이상과는 맞지도 않고, 보는 내내 어쩌면 불편하게 튀어나온 극장 의자 위의 못처럼 관객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는 흥행을 목적으로 찍은 영화다. 히어로 또는 히로인의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골라서 고수익을 누리기 위해서 찍은 것이다. 이 영화의 배우들에게 고결함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서 도덕적인 이미지를 가진 티켓을 사고 나서 다소 안도하거나 기쁨을 느끼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허구에 참여한 인물들이 모두 영화의 주제에 100% 들어맞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판타지를 판타지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자세는아닐까 싶다.
사실 배우들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영화를 엄밀하게 선택한다면, 우리는 과연 몇 편의 상업 영화를 우리 인생에서 볼 수 있을까? 이미 할리우드라는 곳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탐욕스러운 흥행공식에 기대어서 만들어진 작품임을 말한다. 오히려 보이콧을 해야 하는 영화는 그런 문제보다는 배역에 전혀 맞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한 탓에 재미없을 수밖에 없는 영화다. 만들어 내야 할 판타지와 먼 거리에 있는 배우를 캐스팅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상업 영화"를 표방했음에도 종교 영화나 예술 영화, 정치적 입장을 표방하는 영화처럼 순결해야 한다는 입장은 한 때는 나의 입장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킬만한 배우가 나온 것이 아닌 이상은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비난도 기사로 떠 있다. 75년도에 제작된 "원더우먼 TV 시리즈"에서 "린다 카터"는 다소 헐벗은 의상으로 짧지 않은 시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이 시리즈물을 전 세계적으로 흥행시키는 데 성공했었다. 2016년도에, 어쩌면 "원더우먼"영화의 흥행을 위한 PR작업의 일환이었겠지만, 세계 여성의 인권을 위한 명예 대사로 "원더우먼"을 UN에서 선정했다가, "여성을 성상품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지 무슨 여성 인권을 드높였나?"라면서 보이콧을 당하고, 대사 선정이 취소된 배우도 다름 아닌 "원더우먼"의 두 배우 "린다 카터"와 "갤 가돗"이었다.
이 역시도 좀 경우에 안 맞는 해프닝처럼 여겨졌다.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신체를 가꾸고 어필해서 좀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모습으로 매체에서 선사하는 것이 왜 여성의 인권을 저하시키고, "성상품화" 시키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1900년대 초 "원더우먼"이라는 캐릭터의 탄생 배경에는 오로지 남성으로만 대표되는 히어로 캐릭터로 점철된 슈퍼 히어로물에 여성으로서 모성애와 사랑을 가진 히로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은연중에 여성 인권을 향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의도를 어느 정도 실현시킨 캐릭터인 것이다.
수영복에 가까운 노출 의상을 입고는 있지만,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나온 "할리퀸"이라는 배역이 가진 퇴폐미 가득한 "성상품화"와는 다른 보다 사회적으로 고양된 의미를 가진 역사를 "원더우먼"은 갖고 있다. 그러나, 일단 "헐벗었다"="성상품화"라는 도식을 벗어난 사고가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원더우먼"이 가진 다른 의미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안다 해도 그저 저급한 의도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로 들릴 뿐인 것 같다.
"린다 카터"라는 배우가 원해서, 자신의 신체적인 매력을 어필하고 명성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이 지구 상에서 그저 "성상품화"라는 카테고리에 포함해서 폄하해야 할 만큼 잘못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론, "상품화"라는 카테고리에는 들어간다. 하지만, 이 지구 상에 주류 사회 시스템인 "자본주의"에서 자신을 "상품화"시키지 않고 주거와 숙식을 보장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원래 금수저로 태어나서 최소한 금리 생활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물론 취약계층이나 노약자, 유아, 신체부자유자 등은 예외로 하자.
한 장의 이력서 위에 사회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른 바가 없다는 증표로서 자신을 표현하고 팔아야지만 설사 UN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그 선정의 과정에서 정갈한 외모와 건전한 신체를 어필하는 것도 우리에게는 정상적인 "상품화"과정으로 인식된다.
오히려 "원더우먼"의 이미지를 여성의 권익을 향상하는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는, 여성의 이미지가 보호받아야 할 약자만이 아닌, 남성 이상의 강력한 캐릭터로 영화 속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일례를 잘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성상품화"라는 요소만을 드러내어서 노출을 했다는 이유로 한 여배우가 사회적으로 보다 존중받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상품화"로 대중이 인식하는 범위를 넓히고,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존중받을 수도 있을 여성 배우들의 입지를 좁히는 것이다. 일단, 화면에 노출이 나온 여배우들을 모두 "성상품화"로 묶으면, 도대체 누가 유리 천장을 뚫고 존중받을 수 있는 여배우가 되겠는가?
실베스타 스탤론과 케빈 코스트너, 성룡과 같은 배우들은 성인영화, 이른바 포르노물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다. 그럼에도 배우로서의 이들이 갖고 있는 위상은 그저 존중을 받는 것을 떠나서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아널드 슈바 제네거는 그 무엇보다도 근육을 강조한 노출로 범벅이 된 영화를 찍고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기도 했었다. 남성은 어떤 방식으로 노출을 해도 "성상품화"가 아니지만, 여성이 노출하면 "성상품화"의 낙인이 찍히는 이 현상은 오랜 시간 변화 없이 반복되고 있는 모순이다, "비논리적인" 카테고리화다.
여성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인정하며 말하지 못하고, 매력적인 것을 매력적이라 부르면 비웃음 받는 세상은 너무 음흉하다. 그런 세상은 배면에, 그 어떤 것이라도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성상품화"라고 낙인찍어야 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우월성을 한껏 느끼면서 지배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노출을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관점이 오히려 더 음흉스러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에는 이 영화를 보아도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비난을 받아야 했던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국내에서 애국심을 기반으로 IMF 때에 외화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외국 영화를 보지 말자는 거국적인 운동이 있었음에도 "타이타닉"은 "아바타" 이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최고 흥행 영화가 되었다. 이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영화가 웰메이드 영화가 되어 외국에 팔리는 지금, 어쩌면 우리 영화에 대한 "보이콧"을 사전에 방지해준 사람들 일 것이다. 특정의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이다. 조언을 주는 것은 유용할 수 있지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시오니스트인 배우"가 나오는 "성상품화"영화라는 굴레를 쓴 작품을 보기 위해, 내가 해야 했던 생각은 앞 서 말한 것처럼 나름 많았다. 물론, 40대 아저씨가 이런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마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오히려 4~50대의 어린 시절, 외화 "원더우먼"을 방영 때마다 빠지지 않고 보았을 수많은 4~50대, 혹은 60대의 추억을 회상하는 영화다. 이 부분은 누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있다.
냉철한 평론가의 시선으로 어디선가 소규모 관객들과 더불어서라든지, 혼자서 영화를 보고 있다면, 느낄 수 없는 이른바 "현장감"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극장에 들어서서 1인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50대의 아주머니 두 분이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두 분이 "원더우먼"이 겪는 위기나 박력 있는 액션씬에 대해서 보인 반응은 말 그대로 "원더우먼"에 감정이 이입된 상태가 아니면 나오지 않을 반응이었다.
"앗, 엇, 어째~~!, 그렇지!, 와아~ 등등". 이 두 분들의 반응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면서 "원더우먼"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제대로 흥분한 관객들은 다소 헐벗은 그녀를 침을 넘기면서 본 남성 관객들이 아니라 집에서 어쩌면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남편에게 억눌려 살고 있는 이러한 분들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이 일종의 해소감을 느끼면서 보고 있는데도, 이것을 "성상품화"라고만 해야할지 싶었다. 어쩌면 집에 들어가서도 이 영화에 대한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이 두 분은 영화 보기 전과는 다른 여성들이 되었을지도.....모르겠다.
"아마존"이라는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부족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스토리를 따라서 "제우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신화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말한다. 이 부분은 마블 코믹스의 "토르" 정도가 갖고 있을 장대한 신화적 세계관보다 더 무겁고, 더 현실로부터 먼 거리를 갖고 있다. 이 신화의 배면에 있는 것은 그저 남녀가 그대로 모여서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보다, 여성들만이 모여사는 이 사회가 더 부정적인 인간 사회로부터 거리가 멀고, 신들의 평화로운 질서를 잘 지키며, 부패하지 않고, 정의롭다는 전제다.
이 부족은 "제우스"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질서를 거부하고, 부패한 인간들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말 그대로의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싸워서 이긴 바가 있었다. 그들만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는 외부에 노출이 되지 않게끔 보호받고 있는 "테미스키라스" 섬에서, 언젠가 또다시 벌어질 "아레스"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훈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원더우먼"이 되는 "다이애나"는 이미 아주 어린 시절부터, 태어난 이유, 삶의 목적 그 자체에 맞게끔, 자신을 전쟁을 위한 무기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사고관은 매우 단순하다. 자신들이 있는 섬 바깥의 세계는 "아레스"가 있는 전쟁과 위협으로 가득한 세계이며, 자신들의 섬은 매우 평화롭고 아름답지만, 언젠가는 바깥의 위협과 만나게 될 곳이라는 상존하는 위기감 두 가지이다. "적"은 "아레스", "평화"는 "테미스키라스"섬.
200여 가지의 언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1차 대전의 독일군 진영에서 독가스에 대한 정보를 갖고서 이 섬에 불시착한 영국군 스파이와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는 설정은, 싸움뿐만 아니라 높은 학식을 쌓고 있는 엘리트 집단이 이들임을 또한 드러낸다. 이들이 다소 헐벗은 의상을 하고 훈련을 하는 이유는 또한 단순하다. 연 사시사철 따뜻한 섬에서 이것이 싸움을 하기 위한 연습을 하기에 무척 편안한 의상이기 때문이다.
도입 초기에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이 섬에서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지며, "원더우먼"은 그저 노출을 일삼으며, 무식하게 싸움밖에 할 줄 모르는 단순한 히로인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인간을 위해, 사악한 신인 "아레스"와 싸우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존재로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말 그대로의 신화를 관객들에게 그럴듯하게 전달한 것이다.
"맨 인 스틸"이라는 영화가 "배댓슈"보다는 적어도 좀 더 재미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인물의 행동 동기가 충분히 그려지고, 설득력 있게 형상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히어로나 히로인의 성격이 명확해지니, 관객들이 이해한 순수하게 이타적인 목적에 의해서 행동하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원더우먼"은 "맨 인 스틸"보다 더 세세하게 캐릭터의 성장과정을 보강했다.
"배댓슈"에 비해서 "원더우먼"의 행동이 보다 세련된 것은 없다. 다만, 투박하고도 여러 의미에서 순진하고 순박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의 행동이 더 호감을 사게 된 이유는 이렇게 장시간을 할애해서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사실 임직 하게 잘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 앞부분이 오히려 뒷부분보다 좋았다는 평도 많을 정도이다.
이 앞부분의 신화적인 내용에서 아직 "다이애나"는 그저 싸움을 익히길 좋아하는 태생이 싸움꾼인 여자다. 그러나 후반부로 나아가 영국군 스파이와 함께 "아레스"를 처치하기 위해 섬 밖으로 나온 그녀는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을 반복하며, 1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인류사의 전쟁 속에서 엉뚱해 보일 정도로 전쟁의 원흉일 것이 분명하다며, "아레스"를 처단하기 위해 찾아다닌다. 이 고지식한 태도가 유머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주었다.
영국군 스파이는 이 엉뚱한 목적을 비웃을 수만은 없다. 하나의 팀을 구성해서 "원더우먼"이 믿음대로 "아레스"를 찾고,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할, "방독면"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독가스"의 살포를 막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끝까지 잃지 않으며, 전장을 뚫고 들어간다.
이 내용까지는 영화는 신화와 역사물의 조화를 통해서 그럴듯한 현실의 판타지를 구성해내고 있다. 현실임직한 개연성도 흐르고, 인물들도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런 와중에 맨 처음 이야기했던 "테마송"이 나오는 장면에서 1. 이미 관객들로부터 호감을 살만큼 산 히로인이 2. 조건 반사적인 반응을 낳을 수 있는 강력한 "Is She With You"와 더불어 3. 기관총과 곡사포를 발사하는 독일군 진지를 향해, 방패와 칼(갓 킬러)을 들고 돌진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관객들의 몰입감이 증폭되어 환성 비슷한 감탄으로 터져 나오고 있음을 극장에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냉철한 평론가의 시선으로 어디선가 소규모 관객들과 더불어서라든지, 혼자서 영화를 보고 있다면, 느낄 수 없는 이른바 "현장감"이 피부에 와 닿았다. 이 씬의 전까지 관객들은 "원더우먼"의 무모함만을 보며, 그의 파워가 정말로 전쟁터에서 통할지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원더우먼" 캐릭터는 순진무구한 캐릭터로 그려져 왔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 적지 않은 관객들은 이 영화의 마력에 파묻히며, "원더우먼"의 팬이 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외의 많은 액션씬들은 각본에서 한 걸음 물러난 채, 액션씬에서 주로 역할을 한 "잭 스나이더"의 장기와도 같은 슬로모션으로 이루어진 박력 넘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약점인 "스토리"가 여성 감독인 "패티 젠킨스"에 의해서 확실하게 커버되고, 장점인 액션과 더불은 회화적 화면의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여기까지 설명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매력은 대부분 설명되었다. 어쩌면 나머지 부분들은 내가 아니라도 충분히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명은 여기까지로 줄인다.
잘 모르는 그 두 분들을 위해, 또한 지금 아이를 돌보고 있는 아내를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다.
이전에 썩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맨 인 스틸" 조차도 사실은 제대로 성공작이라고 불릴 수가 없었던, DC코믹스 프랜차이즈가 이번에는 매우 성공적인 작품을 만들며,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계속해서 영화들에 대한 나름의 감상문을 써오면서, 안쓰러움을 느끼고, 비난도 해왔던 입장에서, 마치 관객들의 목소리를 차분히 잘 듣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실행한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해서 깊은 만족감마저 느끼게 될 정도였다.
제작사는 분명히, 섣부르게 마블의 "어벤저스"물에 필적하는 "저스티스 리그"를 만들기 위해 조급한 선택을 하고 숙성되지 않은 문제점들을 그대로 안은 상태의 영화 몇 편을 출격시키고,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계속 들어왔다. 그럼에도, 이 "저스티스 리그"는 성공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을 갖고 있으며, 마블 유니버스의 세계관과는 차별화되면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내세울 수 있는 잠재력 높은 시리즈물이다.
이 한 번의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이어서 "저스티스 리그" 2편에서는 보다 강력한 매력을 살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직 "원더우먼"을 빼놓고는 강력한 "테마송"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없고, 개별적인 인물의 매력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독립 영화도 모자라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이제부터는 다른 양상으로 훨씬 재미있게 흘러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평론은 나의 직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이 자신들의 짧은 인생 속에서 조금은 더 즐겁게 영화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힌트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아레스"와 같은 자신의 평화를 망가뜨리는 세상의 쉽게 보이지 않는 적들과 더불어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고 있다. 히어로/히로인 물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자신만의 영웅적인 싸움을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스토리를 선사한다.
적은 압도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영역의 이미지가 추상적이나마 다가와 닿기 때문이다. 삶에 지치고, 업무나 인생의 목표가 흐릿해질 때, 이 세상에는 없는 그들의 상징적인 모습은 우리 마음속에 나름의 자아상을 구축하는데, 남녀노소를 떠나서 효과적일 수 있다. 비록 사춘기의 남근 기적인 팽창된 에고를 만족하는 수준에서 슈퍼 히어로 영화를 소비하는데 수준이 멈춰 있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의 이런 종류의 영화들의 수준은 그때와 같지 않다. 그 이유는 이미 원작이 되는 코믹스의 수준 자체부터 성찰이 가득찬 "그래픽 노블화"되어 있으며, 높은 문학성마저도 인정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옆자리에 앉았던 두 아주머니가 다시 떠오르려고 한다. 토요일 늦은 밤 10시, 가족들과의 저녁을 마치고, 지금쯤은 친구들과 술 한잔 하고 있을 남편이나, 이미 잠들은 가족들을 집에 남겨놓고, 영화관에서, 사회적으로 오랜 시간 찍어 눌린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들이 마치 "원더우먼"이라도 된 양, 거대한 적들과 함께 싸우는 박력을 체험하고, 감정을 이입하며 스트레스를 푼 채로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일상 속에서 그런 종류의 후련함을 느낄 기회는 일 년에 몇 번이나 있을까? 그리고 몇 편의 영화에서나 그런 경험이 이뤄지곤 했을까?
잘 모르는 그 두 분들을 위해, 또한 지금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나의 아내를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