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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y 15. 2017

<연인을 의심하는 영화들>-인랑, 차일드44, 얼라이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해야만 하는 비극을 다루나 결론은 다름

연인의 배신을 다룬 극화들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삼손과 델릴라 같은 성경의 스토리가 마치 원형인 것처럼 느껴지던 오랜 옛날부터 현재까지의 이 극화들은 좀 더 세련되어졌고, 때로는 의심당하는 쪽에 대한 광분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의심을 하는 쪽에 대한 안쓰러움을 갖게 하는 방향으로, 의심과 확신을 오가면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여 왔다.


최근 "차일드 44"와 "얼라이드"를 연거푸 보게 되면서, 그전에 보았던 유사한 구조를 가졌으나 조금씩 달랐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서 작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적어도 이런 영화들을 보았다고 해서, 인생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다. 이 극화들은 분명히 인생의 진실을 하나 제대로 드러내 준다. 우리가 제 아무리 깊게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이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삶의 어두운 면이라기 보다는 삶의 떼어내기 어려운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심하면서 헛된 기대를 저버리고 살자라는 메시지를 이 영화들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만큼 우리는 계속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함께 사랑하는 순간 내내 노력해야만 하고, 이 극단적인 불신의 상황까지는 아닌 현재의 일상에 대해서는 깊이 감사하자라는 메시지가 더 와닿을 수 있다.


1. 인랑은 이 비슷한 영화들 중에 가장 차갑다.

이 영화 두 개를 보기 전까지 이러한 사랑하는 연인의 배신에 대한 내용 중에 가장 차가운 느낌의 충격을 준 것은 "인랑"이었다.  인간성의 메마름의 극단까지 이르는 환타지 세계 속에서 끝까지 한치의 빈틈도 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세세한 설명이 없어도 관객들은 두 남녀 사이에 오가는 침묵의 언어 속에서 서로가 어떤 식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벽을 쌓고 있었는지를 상상하게 되고, 다시금 결말을 통해서 막막해진 감정을 갖게끔 전개된다. 이 영화 속 세계에서 의심하는 쪽은 의심하지 않는 쪽보다 더 강하다. 마치, 살아남기 위한 필수적인 삶에 대한 태도가 의심 이기라도 한 것처럼.


"인랑"을 보게 되면, "차일드 44"가 갖고 있는 황량함과 "얼라이드"가 갖고 있는 처연함의 감정은 한 꺼풀 써진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배신이 이 이상 담담하고도 차갑게 그려진 작품은 찾기 어렵다.


2. 베를린과 차일드 44는 같고도 다른 영화다.

영화 "베를린"의 내용 중에는 "주인공인 하정우가 맡은 북한의 영웅적인 첩보원"은 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에서 그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인물에 의해 "아내를 의심하고, 배신했음을 증명한 뒤에, 처단할 것을 강제당한다." 이보다 먼저 만들어진 "차일드 44"의 원작 소설의 내용에는 "주인공인 톰 하디가 맡은 소련의 영웅적인 첩보원"은 모스크바의 MGB내에서 그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인물에 의해 " 아내를 의심하고, 배신했음을 증명한 뒤에, 처단할 것을 강제당한다."


이 유사한 구조에다,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의심해야 하고, 의심을 할만한 정황이 펼쳐지는 구조는 "베를린"이 "차일드 44" 원작을 참조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을 다시금 풀어서 설명하다 보면, 분명히 2개는 그 장르부터 다른 영화다. 그렇다고 양해나 공지 없이 타 작품의 스토리를 일부 가져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인정하지 않고 베를린2 같은 속편을 만든다면, 이 원작의 영화도 나온 상황에서 베를린이라는 시리즈물의 입지는 한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해외 영화제에 초청될만한 자격같은 것은 잃을 것이다.


a. 베를린은 액션 영화인데 반해서 차일드 44는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다. 여기에 좀 더 답답한 면을 가미해서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라는 사회가 "낙원에는 살인이 없다"라는 명제 하에 44명까지의 소년들을 장기적출을 하면서 죽인 살인마를 공적인 수사를 통해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자기모순에 빠진 사회였음을 드러낸다.

b. 베를린은 남북한의 정치적인 대치 상황과 북한 권력의 부패를 어느 정도 그려내면서, 한국 내의 정보조직이 갖고 있는 모순도 보여주면서 이 틈바구니 안에서 개인들이 고전 분투하며 살아남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차일드 44는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만든, 사람들이 서로를 정치적인 반역자로 모함하면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상이 통제되는 사회의 무서움과 처절함을 더 도드라지게 그려주고 있다.


c. 베를린은 화끈한 액션을 통해서 북한 첩보원인 주인공이 아내를 죽게 만든 불의한 적들에 대해서 후련하게 복수하지만, 차일드 44는 정치적으로 추락한 소련 정보원 내 고위직원인 주인공이 아내를 배신자로 몰 수 없어 선택한 귀양의 길에서, 악전고투 끝에 사회에서 방치한 연쇄 살인범을 찾아 잡아낸 것 자체를 성공이자 복수로 간주한다. 물론, 톰 하디도 보다 리얼하고 강력한 액션을 보여주지만 액션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사회가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서 있어야만 한다는 메시지다.


d. 하정우의 아내는 극 중에서 죽는다. 그러나 톰 하디의 아내는 살아남아, 사랑했다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남편을 악전고투의 과정 속에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며, 목숨을 걸고 함께 한다.  


e. 영화의 완성도와 스토리의 진지함, 영화 속의 주인공의 인간적인 성숙, 사회적인 메시지의 측면에서 "차일드 44"는 "베를린"보다 뛰어난 영화다. 그러나 화끈한 액션과 재미의 측면에서는 "베를린"이 훨씬 낫다.


3. 얼라이드

언급된 영화들 중에서 사실 일면 밝은 빛으로 보이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운 해피엔딩을 관객들로 하여금 더 많이 기대하게 만든 것은 얼라이드였다. 브래드 피트와 마리옹 꼬띠아르가 공연을 하면 그만큼 더 뜨겁고 화끈하고, 매력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은 느낌에 관객들은 영화관을 향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는 중반까지는 나름 스케일이 있는 "나치"에 대한 멋진 캐나다 첩보원과 프랑스 첩보원 간의 속 시원한 액션과 로맨스, 불같은 사랑(사막의 폭풍이 몰아닥치는 차 안에서 나누는 강렬한 씬), 그리고 그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결혼으로 맺어진 두 남녀가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가정의 모습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런던에서 가정을 마련한 그들은 공습 속에서도 아이를 낳고, 해피엔딩의 피날레를 날리려는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상을 살아간다. 이들에게 찾아온 상급 정보 조직인 V의 높은 지위의 장교는 프랑스 첩보원이라고 한 마리옹 꼬띠아르의 배역의 실제 첩보원은 이미 처형당했다고 이야기한다.


"당신의 아내가 독일 나치를 위해서 당신으로부터 나온 정보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심야에 전화로 전송할 테니, 이를 받아 적고 아내가 이 정보를 독일에 흘리는지를 파악하겠다. 만약 반역자로 확인이 되면, 즉각적으로 아내를 처형해야만 살 수 있으며, 공범으로 확인된다면 브래드 피트의 배역 역시 처형하겠다."


브래드 피트는 남성성을 한껏 발휘하며, 이를 맹렬하게 거부하려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의 결백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위까지 보장할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 제안이 테스트 성격의 함정이 아닌지도 파악해야만 함을 깨닫는다. 모든 방법을 다해서 아내가 실제의 프랑스 정보원이 맞다고 증명하려 한다. 이 모든 것이 72시간 내에 이뤄져야만 하기에 밀도 높은 활동상이 펼쳐진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팜므파탈의 적격 배우라도 된 것처럼 인셉션과 배트맨 3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파멸시키는 배역을 또 한 번 맡았다. 결론은 이미 마리옹을 캐스팅하면서 스포일러 인양 상영 전부터 나와 있는 것이 이 영화인지도 모른다. 사랑만큼은 진실했고, 행복한 가정과 더불은 삶을 원했다는 것이 다른 양상일 뿐.


이 중에서 뛰어난 작품성과 논리적인 구조, 감정 표현이 절절하게 표현되고, 사실에 가까운 설정이 보다 완벽하게 구현되며, 말 그대로의 감동을 낳은 작품은 실상은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았으나 가장 비참하고도 불행한 삶이 묘사된 차일드 44였다.


이 영화에서는 의심과 배신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믿고 세상과 더불어 싸우며, 왜곡된 사회 구조 속에서 처단당하지 않는 연쇄 살인마를 처단하고, 부조리한 배신과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자들과 역부족임에도 싸우는, 사랑으로 똘똘 뭉치게 된 부부의 모습이 설득력 있게 나온다.


사실, 가장 내밀한 모든 것을 주고받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조차 의심이나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며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이 이 현실의 세상이란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고, 불의하다고 여기더라도 눈감고 귀 막고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고, 이른바 처세를 잘하는 모습인양 포장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실제의 현실에서 우리는 사랑만으로 살아가지 않고, 정의만을 추구하며 망가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극렬 투쟁하지는 않는다. 소수만이 그런 방식으로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온전한 믿음을 주고받고, 정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내는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조금씩이나마 관객들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소박한 마음으로 약간의 불편함을 감내하며 들었던 촛불은 적어도 이 나라를 변화시켰고, 갈 길은 멀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게했다. 이것은 꿈을 꾸었기에 생긴 기적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차일드 44라는 영화에서 좀 더 리얼리티를 가지고 드러난다 (베를린 또한 그런 방향을 갖고 있지만, 초인적인 주인공의 액션 능력은 현실성을 벗어났다). 전체적으로 어둡고도 답답한 분위기에서 인랑은 좀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결말을 내지만 차일드 44는 비슷한 분위기에서도 빛을 가져온다. 비슷한 류의 이 영화들 중에서 하나의 영화만 갖고 우주여행 같은 것을 하게 된다면, 나는 이 영화를 흔쾌히 들고나가고 싶다.


그런 우주여행을 다룬 영화에는 "패신저스"가 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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