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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r 15. 2017

<집으로>-복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

우리에게 집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

우리 주변에서 간혹 벌어지곤 하는 육아와 노인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쓸 수 없게 되는 부부의 이혼이나 다툼, 경제적인 실패 상황을 이 영화는 꼼꼼히 그려내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맡겨진 아이와 방치된 노인이 함께 서로를 도와 살아가는가를 중점적으로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는 이 갑작스레 시골에 버려지게 된 남자아이와 오랫동안 자식들로부터 방치되었던 그 두 사람의 관계에만 포커스를 집중한다.


어느 날 첩첩산중의 한 폐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머리가 허연 등이 굽은 할머니에게 그 할머니의 자식이 그 오랜 시간 잘 찾아오지도 않다가 덜컥 아이를 맡기러 찾아온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이전까지 살고 있던 도시에서 벗어나 전혀 자신의 취향과도 맞지 않는 시골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은 할머니와 같이 살아가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사실 경제적인 능력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채로 삶을 좀 더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성인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서로 만나게 된 뒤에 서로 간의 차이점이 너무도 많고, 할머니가 잘해주려고 하는 일들이 아이에게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일들이 되기도 하고, 아이의 투정이 할머니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스스럼없이 어느 순간 정이 들게 되고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서로에 대한 끈끈한 정이 서로가 다시 멀리에 있게 되어도 이어져 나름 행복한 느낌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사이가 되는 흐뭇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가슴이 애달파지는 두 사람의 이별 이후에 관객들은 이 서로 안 맞을 것 같은 아이와 노인의 관계가 서로에게 왜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런 고민은 없이 그저 영화관을 떠나게 만들지만, 이 알콩달콩한 드라마는 영문도 모르게 엄청난 히트를 일으켰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럼없이 내 안에서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단 할머니는 버림받고 방치되었다는 외로움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원래부터 자식들과의 관계가 멀어져 있는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자식의 자식인 손자가 집에 왔을 때도 이에 대해서 투정하거나 저항하기보다는 또한 삶의 일부로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마음은 아무리 혈연관계라고 설명이 된다고 해도 이미 이 시대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다. 노인들도 자신의 노고와 더불어 육아를 제대로 된 자식의 경제적인 지원 없이 행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시작했다. 차라리 따로 살기를 원하는 시대가 이미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이 시골의 순진한 아낙으로서의 할머니는 그것을 한없이 깊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이 귀여운 손주로부터 온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것이 경제적인 가치로 전환될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삶에 대해 보다 의욕을 갖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전환시켰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동에 대한 복지는 아동복지로 노인에 대한 복지는 노인복지로 구분해서 따로 생각하도록 사회 시스템에 의해서 구분하는 법을 배우고 그대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두 가지로 분류된 사람들에 대한 복지는 통합된 개념으로 생각을 해봐야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노인에게 무조건 육아의 의무를 넘겨야 한다는 단편적인 방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기요양서비스의 선진국인 일본의 경우를 보았을 때, 최근의 발전사는 노인 요양 시설을 지역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변화하는데 이르렀다. 특히, 노인들이 거주하는 치매 공동홈이나 주야간보호 시설의 경우 어린이들과 많이 접할 수 있는 지역의 주택가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굳어지고 있으며, 노인들의 경우 이 같은 공간에 있을 경우에 느끼는 심리적인 만족감이 그 어떤 지역보다도 상대적으로 높다라고 일본의 장기요양보험인 개호보험의 사업자들은 증언한다.


또한 아이들에 대해서 양육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져 일부 중장단기적으로 육아에 대한 지원이 필요한 부모가 있을 경우, 복지제도가 이와 같은 아이들을 경증의 장애 노인 복지시설 또는 실버타운과 같은 노인 복지 주거 주택 등에서 일부 육아 지원할 수 있는 형태의 새로운 복지 제도를 구상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노인은 이를 통해서 복지 시설에 대한 자신의 자기부담금을 일부 감면받으며, 아이를 맡긴 부부는 보다 최소화된 비용으로 경제적인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아이의 육아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구조. 이 경우 노인들에게는 다시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 삶의 연장에 대한 보다 강한 의지를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사실 좀 더 좁은 포커스에서 느낀 생각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서 해보자면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보다 공감이 가능한 서로 약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같이 도우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서로에게 보다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보다 나은 복지를 이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하지만 중요해 보이는 힌트를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사회복지학에서는 세분화하여 장애나 취약계층의 분류와 정의를 나누고는 있지만 각 분류에 속한 사람들 간의 통합된 복지 공간이나 영역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보다 나은 복지를 이곳에 만들 수 있는 구상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집처럼 자연스러운 곳으로.


그리고 그 집이라는 개념은 영화 속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가 현대 시대에 이르기 전에 가졌었던 오랜 유대와 깊은 사회적 지혜가 서로에게 대를 이어서 전달되고 있는 정이 넘치고 풍부한 그런 공간이다. 핵가족 시대에 이르러서 서로의 작은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이익을 보고 안전하고도 쾌적하게 살아갈 것인가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세대가 다른 이들끼리 어울리면서 서로 간의 차이점들을 혼융하며 그렇게 용광로처럼 활활 불타는 깊고도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는 공간.


어쩌면 대한민국의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은 이런 공간들을 잃어버린 대다수의 사람들이 마음 깊숙이 가졌던 삶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마음속에서 잃어버리고 떠도는 영혼이 되고 기댈 곳 없는 얄팍한 심리적인 깊이를 갖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얄팍한 영혼으로 살아가다가 만난 삶의 작은 고난에도 의식의 강고함을 잃고 비틀거리다 극단의 선택을 쉽게 내리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들이 생겨난다.


적어도 이 아이처럼 묵묵히 아이를 챙기는 노인 분이 한 분 집안에 계시고, 노인에게도 힘이 있다면 돌볼 아이가 집안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삶이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애착이 더 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인데. 이제는 우리의 집이라는 곳에는 TV와 성능 좋은 IOT 시스템과 좋은 가구, 디자인 좋은 빌트인 설비들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반대로는 경우 하루의 추위나 더위를 막을 수 있는 극단적으로 초라한 것들만이 남아 있다.


복지란 결국 이러한 현대 사회의 도구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공간에 우리가 독립적으로 거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불편이라는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지만 개개인의 삶이 그 자체로 중요하고 좋은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복지가 만들어져야만 한다. 집으로는 그러한 사회복지의 이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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