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노벨문학상
중요한 것은 이 장기적인 현상과 그의 글을 읽는 독자가 얻는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던 어느 순간엔가 갑자기 책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익숙한 현상이 다가왔다. 마법에라도 걸린 양, 그전까지는 펼칠 때마다 50페이지도 읽기가 어렵다가 순식간에 100페이지씩 또렷하게 몰입하여 읽게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 몰입이 그다음에 생업을 위해 장기적으로 집중하는데 도움을 주고, 다른 책을 읽는데 어떻게 하면 내가 몰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남기기도 한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또 무엇이 꼭 있어야만 할까? 연세가 70대에 이른 현업 작가의 글에 30~40대의 남녀들이 아직도 매료당하고 이끌린다. 이 세대와 공간을 넘어선 공감의 갱신이, 모바일 문명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기적과도 같이 벌써 30여 년째 이어지고 있다.
1980년도 말 20대 말 늦깎이로 등단한 소설가가 인쇄 문명이 저물고 모바일 문명이 지배하는 2017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글로벌 작가로서의 유명세와 더불어 매번 책을 펴 낼 때마다 최고 수준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예외적인 일이다.
애국애족을 담은 국가주의를 떠나서, 이른바 현존하는 스테디셀러의 일부를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의 소설 중의 몇 권은 글로벌 서고에서 고전의 반열에 들만한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난 수십 년간 유지하고 있다. 여타의 일본 국적의 작가 또는 글로벌화한 아시아나 중근동, 아프리카의 그 어떤 작가였던 간에, 유럽과 미주를 통틀어서도 지속되고 있는 이 현상은 놀랍다.
그저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노리는 글을 쓰는 작가였다면, 아마도 그의 위상은 지금과 같은 것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티븐 킹 등의 작가가 써 내린 숨 막히는 서스펜스물이나 수많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원작이 되었던 그래픽 노블 작가가 만든 작품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고 해도, 평론가나 수많은 독자가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네, 예술이라고 할 수 없네, 문학이 아니네' 하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에서 하지는 않는다.
남경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십만인지 사십만인지를 학살했다는 표현이 나왔다는 이유로 일본의 우익 정치인이 매국노 아니냐는 비난을 퍼부은 것도 이미 하루키의 존재감을 인정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 비난을 통해서 신간에 대한 글로벌적인 관심을 부채질하는 노이즈 마케팅을 해주고, 작가로서의 양심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비장한 하루키의 답변을 부각하여 서적 판매에 더 많은 도움을 줄 정도다.
하루키는 그를 추앙하고 선망하는 사람들과 폄하하고 비난하는 쪽 양쪽으로부터 그 영향력을 직간접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가다. 그저 그런 유행 작가 중에 하나였다면, 벌써 그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십수 년 전에 이미 사라졌을 거다.
요시모토 바나나나 시마다 마사히코, 무라카미 류 등 일본 문단을 떠나서 글로벌 영역에서 나름의 유명세를 구축했던 90년대의 일본 작가가 적잖이 있었다. 하루키의 작풍을 흉내 냈다는 혐의로 국내에서도 장정일이나 박일문, 이인화 등의 작가가 또한 적잖은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나름의 유명세를 누렸었다. 그러나 하루키는 계속 살아남았고 그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여타 작가의 존재감은 이제 희미하다. 고유의 존재로서 지속성을 가진다면 그와 유사한 스타일을 가진 이와는 명백하게 다른 길을 걸어가는 법이다.
국내외의 이른바 문학평론 전문가라던가, 문화예술적인 평가를 지향하는 글을 쓰는 작가, 또는 그들을 지향하는 문학 지망생이나 독자 중에 적지 않은 사람이 하루키를 폄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한 존재가치가 없는 작가라면, 이런 폄하를 작가로 활동한 수십 년 동안 받으면서도, 새로운 장편소설을 출판할 때마다 적지 않은 국가에 수백만 권에 가까운 서적 판매고를 올리지는 못한다.
이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이 장기적인 하루키 현상에 대해서 이해를 제대로 하는 것이고,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얻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루키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글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 되었든, 읽지도 않고 대충 결정하는 사람이 되었든 간에 각 개인에게 온전히 맡겨진 몫이다. 특정 집단이나 특정 국가의 판단으로 그의 존재 가치를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 하루키가 오랜 시간 수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고, 그의 독자가 느끼는 가치가 무엇인가 또는 그 독자가 어떤 가치를 가진 존재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을 해야 하는 것이 이른바 문학평론가나 서평 좀 써본 나름 준전문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몫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분의 그런 글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 성찰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특정 작가를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이른바 글 좀 깨나 읽은 사람이 쓰는 서평이라면, 이미 이것부터가 "하루키의 짧은 에세이"만큼도 가치 없는 서평이란 이야기는 아닐까? 나조차도 쓰기가 쉬웠기 때문에 그의 글을 폄하하는 글을 썼었고, 글 쓰느라고 들인 시간 대비해서 자기 만족감이 수월하게 높아지기라도 한 것인지 많이들 쓴다. 동네북이 하루키라도 된 것처럼.
여러 번 반복하다가 깨달았다. 이런 것도 중독이 된다는 사실을.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사서 읽는 것 같을 정도다. 계속 그렇게 욕을 하려면 사지 않고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을, 매번 같은 글을 쓰면서도 사본다. 그러다 맹렬하게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자신만의 가치가 생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는 여전히 세계의 일상적인 진실을 다루는 비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그가 벌거벗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해도 여전히 그가 옷다운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적지 않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부정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는 옷을 입고서 거리를 활보하는 작가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반증한다. 모두가 웃어넘길 수 없는 글을 그가 쓰고 있다. 이것은 0에 수렴하는 가치를 가진 작가는 적어도 아니라는 의미일 수 있다.
언론에 나타나는 것을 그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어쩌면 구멍 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들통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타 작가에 비교해서 SNS 등을 통한 독자와의 교류에 열심이다. 실언이다 싶을 정도로 어이없고 소박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하고 있다.
인류가 달에 가지 않았다는 의혹이나 지구가 실은 평평하다는 우격다짐, 창조과학회가 수십 년 전부터 제기하는 지구의 실제 역사는 수천 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신념이 나름 적지 않은 신봉자를 끌고 다니는 것과는 달리, 그의 책은 우리 눈 앞에서 서점에 깔려 있고, 인터넷 서점에서 클릭이 가능하며, 서평도 이루 샐 수 없이 많고, 관련된 통계는 이곳저곳에 넘실댄다.
하루키의 독자 중에 한 사람이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위원에게 이메일을 한통 전송한다던가, 전화를 건다면 그들의 반응은 냉담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2017년 10월 6일, 하루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을 많은 사람들이 점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여러모로 하루키가 좀 더 무거운 주제를 파고들기 위해, 자신의 전통적인 장기를 대부분 발휘하고, 그에 더해서 좀 더 입체적인 소설 속 인물에 대한 분석과 이에 더불은 예술관과 세계관, 인간관, 역사관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작품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보다 범 인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70에 이른 노년의 성찰을 전달코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책을 사고, 열심히 읽는 독자다. 그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대상은 노벨 문학상을 심사하는 사람과는 동떨어져 있다.
하루키의 독자 중에 한 사람이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위원에게 이메일을 한통 전송한다던가, 전화라도 건다면 그들의 반응은 냉담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그 위대한 심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 보기에 하루키의 독자가 적든 많든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한다.
그는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지니지 않은 채로 사는 사람이 주로 찾는 작가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를 세는 손가락 하나 접는다고 해서 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는 사람들이 그를 평가하는 사람 중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의 삶을, 취향이 일정한 독자는 그만의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 된다.
다만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유"라는 의식을 지니고자 하면서도, 엄청난 학문적인 금자탑을 쌓았거나 전문성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사람을 선망을 가지고는 대하되 그렇게 인정받는 위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사람.
'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소극적으로나마 의견을 개진하거나, 나름 치열하게 세상과 자신과의 상대적인 거리를 재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이 그의 독자의 대략적인 프로필이라면,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영향력은 나름 긍정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적어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과 연대감을 가질 수 있고, 천천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키워갈 수 있다.
그는 문학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서 성공한 케이스는 드물었다고 단언한다. 무엇보다도 문학, 더 좁게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성공 기준에 비추어서 목적이 너무도 명확한 작품이 그 기준을 성공적으로 넘어서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이 미래 통제사회의 빅브라더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목적으로 삼은 서적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다양한 상상력과 더불어 그려진 작품이 더 현대의 모습을 더 제대로 그려내고, 예상되는 인류의 장애물을 잘 묘사해 냈듯이.
오히려 인간의 삶이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모호함을 모호함 그대로 이해하면서, 쉽게 변화하지는 못하는 세상에 대한 색다른 관점과 시선을 버리지 않고, 그 관점과 시선이 저절로 확대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추구하는 전략을 지니고 쓰는 글이 생명력이 높은 작품으로 남게 된다. 그 같은 집필의 과정에서 더 높고 넓은 수준의 성취와 성공이 벌어지는 것이 그가 경험한 진실 같기도 하다.
같은 일본 작가로서 엄청난 서적 판매량을 글로벌 서가에서 보여준 바는 없지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오에 겐자부로"가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하루키 자신의 세계에 대해서만큼은 인정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일상의 모험"이라는 초기작 한 권밖에는 읽지 않았다. 더 읽어야 할 이유를 수월히 찾을 수 있을 하루키만큼의 흡입력은 없지만, 그 또한 일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그의 독자가 찾아갈 수 있도록 나름의 세계관을 치밀하게 그려낸 작가다.
그가 하루키에 비해서는 더 고양되고 높은 차원의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만약 두 작가가 같은 목적을 은연중에 지니고 글을 쓰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찌 되었든 더 넓고도 더 고양된 영향력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끼치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을 동시대 속에서 상대적으로 조금이나마 다르게 변화시킨 실질적인 성과를 이뤄낸 쪽은 아직까지는 하루키였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작가의 태생도 중요하고, 평생에 걸쳐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며, 주제는 절대적으로 무거워야만 한다."
이번에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이름은 "가즈오 이시구로"이다. 그는 하루키에게 없는 세 가지를 갖고 있는 작가로 보인다.
첫 번째, 일본 문학이라는 좁은 세계를 벗어난 것을 떠나서 영미 문학사를 관통하는 줄기가 뻗어 나온 영국에서 작품을 만들어온 말 그대로 일본계 영국 작가이다. 오해가 있을 수 있겠으나 다른 나라에 가서 글을 쓰거나 영미 문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만 상을 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노벨 문학상을 주고자 하는 인물의 프로필에 좀 더 가까우면서도 유리한 입지라는 이야기다.
두 번째, 혁신과 새로움을 가지고 과거를 벗어난 실험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해왔다. 모두가 이야기하듯이, 하루키는 최근의 소설 작품들을 경유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시도나 자기 자신의 작품 세계를 벗어난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는 작가가 아니다. 가즈오 씨의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SF문학까지를 망라한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글들을 써가고 있는 작가라고 하니, 일단, 참신함이라는 측면에서도 하루키가 현재는 속 시원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세 번째, 주제가 나치나 인종차별 등의 범 인류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속 시원하게 이런 문제에 있어서 명확한 색깔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소극적으로 이러한 내용들을 자신이 수십 년째 만들어온 소설 속 세계 속에 마치 양념 같은 성격을 가지고 드러나도록 다루면서, 은근한 독자의 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근원적이면서도 조용한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가즈오 씨는,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자신의 서적 속에서 어필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받지 못한 이유는 좀 더 명확해 보인다. 그렇다면, 받지 못했으니 가치가 떨어지고, 받았으니 가치가 높은 작가일까? 읽지 않고서 판단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책이 많이 팔렸으니 무조건 가치가 높은 작가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노벨상이 수상되는 문학으로서 범세계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이 세 가지를 제대로 갖지 못하면 불가한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면, 사실 많이 쓸쓸해지고 심심해지기까지 한다.
"작가의 태생도 중요하고, 평생에 걸쳐서 새로움을 추구해야만 하며, 주제는 절대적으로 무거워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하루키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죽여야만 했던 구시대의 "이데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데아" 스스로가 원해서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이데아"를 죽인 스토리의 핵심은 책을 읽는 각 독자의 "메타포"에 의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죽여야 할 갖가지의 "폭력적인 굴레"를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이 명확히 "나치즘이나 일본 군국주의, 사이비 종교, 인종차별, 불륜 등"으로 지나치게 명확한 공격 대상을 가지고 쓰인다면, 독자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 속에 연결시키고 현실 속으로 확장시켜갈 수 있었을 이야기의 힘은 반감될 수 있다.
물론, 정확한 형상화와 드러내기 또한 수준 높은 문학적인 기술이다. 주제가 모호함을 벗어나 명확해야 하는 것도 중요한 글쓰기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확한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면, 어느새인가, 이 인간의 자유와 인류의 인간성을 광대한 차원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온 "문학"이 체조 널뛰기라든가 리듬 체조, 피겨 스케이팅과도 같은 심사위원들이 객관적이고 정확한 채점 기준을 가지고 점수를 들어 평가하는 대상으로 그 평가 기준이 좁아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성을 접은 좁다란 통로에 놓여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건 이미 반 이상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덜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 조차도 마치 바둑처럼, 인공지능이 더 잘 해낼 것이다. 인공지능보다 인간이 더 잘할 수 있고 나은 창작을 해낼 수 있는 영역으로 문학이 남고자 한다면, 그것은 정밀하게 짜인 채점표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작년에는 "밥 딜런"이 팝이라는 대중문화를 범세계적 문학 수준까지 격상시킨 존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파격이 있었다. 그렇게 한번 파격을 보여주었으므로, 이번에는 좀 보수적인 색채로 수상자를 선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가 아니라 누가 타게 되더라도, 앞으로는 심드렁해질 것만 같다.
이런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팝 가수에게 이런 상을 줬던 이유가 뭐야? 노벨 문학상에 대한 저변 확대? 그럼 금년에는 왜 일반인에게 생소한 작가를 찾아 상을 주는 거지? 노벨 문학상에 대한 공신력의 향상? 다음번에는 그럼 무엇인가? 매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가장 외모가 훌륭한 작가에 상을 줄 셈인가?"
무게감이 엄청나서 두드러기가 날 정도인 정통 문학으로부터의 실질적인 문외자가 쓸쓸한 느낌을 받으며 쳐다봐야 하는 상이라면, 이 상은 "그들만의 리그"에 있는 상이다. 그리고 그 상을 수상하도록 만든 서구 문명의 심사위원의 지향점인 "이데아"는 서구 문명사회에서 아직도 건재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나치즘과 인종차별과 같은 인류 최대의 고통"을 세상에 존속시키고 있는 메커니즘인지도 모르는데도.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감상문이자,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전방위적인 복기다. 이 내용이 도움이 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쳇바퀴처럼 돌아다니면서 몇 편의 서평을 읽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허전한 마음을 가진 정말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글이다. 지루한 분들은 과감히 돌아가셔도 된다.
글 속에서의 "나"는 이전의 하루키의 소설에서의 1인칭의 화자로 돌아왔다. 3인칭으로 진화하면서 새로운 소설의 세계를 느릿하게 열어갔던 하루키가 일종의 절벽을 만나서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읽히는 데 있어서는 보다 편안해졌다.
이 시대는 자기 관점 Point Of View, POV의 시대다, 가상현실 Virtual Reality를 넘어서서 증강 현실 Augmented Reality를 추구하는 시대에 전지적 작가 시점에 보다 가까워진 3인칭은 오히려 시대를 벗어난 시도가 될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그가 1인칭의 화자 시점으로 글을 쓰고, 글의 중간중간마다 다시 각 인물의 직접 화법이나 1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빌어 스토리 요약을 반복하는 것도, 페이스북 등의 SNS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읽어가는데 익숙해진 이 시대의 독자들의 "짧아진 기억력"에 대한 배려로 보였다.
그는 이 변화에 대해서 이전만큼의 합리화를 하지 않는다. 누가 한계로 보던, 시대에 야합한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과 더불어 있는 글쓰기를 한다고 보든 간에 그는 자신이 믿기에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싶었다. 아마도 3인칭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의 글을 썼다면, 엄청난 서적 판매고를 기록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그만큼 그 시점에서 글을 읽는 것이 이전에 비해서 낯설어진 디지털 문명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하루키는 이 시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그가 정확하게 포착하고 심리를 꿰뚫을 수 있는 존재, 자신의 소설의 매력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독자층이 30~40대의 가정의 위기나 자신의 존재의 위기에 봉착하여 혼돈을 겪고 있는 사람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하루키의 소설책을 사서 당장 돈은 되지 않을 긴긴 내용을 나름 복잡한 자기 세계에 비추면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남녀 불문하고 이 연령 구간에 모여 있다.
이 구간 전의 세대는 더 자극적이고 즐거운 내용에 빠져 있을 것이고, 하루키를 말 많은 꼰대로 볼 수 있으며, 이 구간 이후의 세대는 책을 쥐고 버틸만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면서, 하루키가 왠지 급진적이고 별생각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당장 먹고사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의 소설은 일정한 패턴을 벗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생활의 기반을 자신도 잘 모르는 이유에 의해서 잃게 된다. 일단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할 아내가 이별을 통고하거나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의 적이 누군가를 현자나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서 깨닫게 된다. 그를 돕지만 다른 면에서는 오히려 난관에 빠뜨리는 동료와 함께 한다. 무녀나 신녀와 같은 신비한 소녀가 나타나 국면을 갑작스럽게 전환시킨다.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 이면 세계를 통과해서 다른 세계로 가거나 파국을 반전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한 해피엔딩이나 새드 앤딩이 되지 않는다.
끝까지 책을 읽어가도록 만들고 중간중간 흠뻑 몰입할 수 있는 색다른 장치들을 더 이상 고안해낼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장 죽이기의 문장은 여전히 재기 발랄하고, 변화하는 세상을 받아들여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면모가 처음부터 중후반부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건재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서둘러 마무리를 지으면서 이야기의 결론을 맺고, “이중 메타포”로 공격을 당할 여지를 차단하느라 분주하게 스토리를 다듬는 그 답지 않은 모습이 느껴졌다. 유키와 후카에리 등의 신비한 소녀가 롤리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장치라는 비난에도 신경이 갔는지, 신비함의 정도를 많이 떨어뜨렸다. 이 소설에서 마리에의 가장 큰 고민은 발육이라는 부분에 고정되어 있다. 평범한 고민을 가진 그 나이 때의 소녀다라는 부분을 주로 강조했다.
하지만 이렇게 뭉뚱그려서만 표현해서야, 하루키의 소설을 수십 권 읽어온 열혈 팬입니다라는 이야기는 거의 무게감이 없다. 내게도 반복이 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의 소설을 격자무늬판에 올려놓고, 게임을 즐긴다면, 이 소설의 분류와 뭐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은 포인트고 뭐가 새로워지고 있는 부분인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의 글을 지금까지 즐겁게 읽어왔다면, 적어도 그 보답으로 뭔가 남겨주기는 해야 팬이 맞지 않을까?
1. 판타지 계열 (양을 둘러싼 모험->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댄스 댄스 댄스->태엽 감는 새->해변의 카프카->1Q84->기사단장 죽이기)
파격적인 변화로 신선함을 가져왔던 소설은 이 계보 안에서 이제 명확하게 몇 권으로 압축된다. 그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이 후일담류와 판타지물을 살짝 오가며, 이제 막 몸부림치며 만개하는 과정에서의 애매모호함을 보여주면서 잔잔한 충격을 던졌다면, "양을 둘러싼 모험"은 그가 세상에 제대로 된 "판타지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순문학"에 가깝더라도 소설이 얼마나 더 재미있을 수 있는가의 예시를 던져주었다.
"양을 둘러싼 모험"이 결국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 "댄스 댄스 댄스", "태엽 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 "1Q84", "기사단장 죽이기"로 이어지는 판타지 계열의 작품으로써 같은 연주를 조금씩의 변주와 약간의 새로운 기법, 무게감을 달리하는 주제와 소재를 통해서 세계관을 확장하거나 수평적으로 이동시키면서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실제로 이 계열의 작품에 대해서는 각각의 독자가 자신이 충격을 느낀 대략 20~30대 정도의 연령대를 기준으로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색다른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로 이해하는 글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하루키가 마치 "댄스 댄스 댄스"에서 자신의 히라가나 배열만 달리해서 만든 매너리즘에 빠진, 영매처럼 나오는 사춘기 소녀인 유키의 아버지인, 동성애자인 작가로 나타나 이미 고백해버리기라도 한 듯이. 누군가에게는 그의 정점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계의 끝"에서 끝나버렸고, 누군가에게는 "해변의 카프카"에서 끝나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소설은 마치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가 계속해서 이전의 스킬을 반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 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계보의 "기사단장 죽이기"의 직전 소설인 "1Q84"에서도 여전히 이와 같은 장치들은 유사해 보인다. 마치 그가 가진 고유의 서명이라도 된 것처럼 "무녀나 뮤즈와도 같은 신비한 존재의 등장, 이면 차원의 세계를 오가는 통로, 정체가 명확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세상에 피해를 끼치고 있는 사악한 무리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인물 간의 관계에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성교, 인물의 존재 의미나 정체성과 동일시되는 이름, 속 시원하지 않은 결말 등"은 반복된다.
그 모든 장치는 이른바 하루키라는 담배 메이커의 니코틴과도 같은 부분이다(메타포입니다. 단, 이중 메타포로써 하루키가 해로운 작가라고 의미하는 바는 없습니다, 이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셜록 홈스나 포와르, 루팡 등의 주인공이 나오는 연작 소설들이 수많은 팬들을 시대를 초월해서 거느리고 있는 이유와도 같은 부분처럼 보일 정도다.
다만,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같은 이름으로 다른 소설에서 등장시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정도 수준에서 이해해주자면, 대중 소설가로서의 하루키가 불성실하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줄 수 있다.
그도 일정 수준 이상의 판매고를 출판사에 올려주어야 하는 존재고, 자신의 나름 여유 있고, 품위 있는 삶을 높은 인세 수입을 통해서 지속해 가야 하는 사람이다. 너무 위험한 모험을 하기에는 잃을 것이 많고, 그가 즐겁게 만들어 주어야 할 독자에게는 일정 수준 이상 채워주어야 할 갈망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하루키로부터 세상에 없는 혁신과 놀라운 파격성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면, 그 그룹은 포기해야 할 브랜드 마케팅 상의 어쩔 수 없는 전략적 판단도 있을 것이다. 마치 코카콜라와도 같이 브랜드가 잘 형성되면, 혁신을 포함한 이성적인 매력보다는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 같은 감성적인 측면에 호소하는 것이 비용 대비 고소득의 요령이 되는 법이다.
무조건 새로워야 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는 아날로그 방식의 문명 영역에 남겨진 서적의 고유성과는 다른 영역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 아닐지? 이제 이미 잘 만들어진 그의 세계 속에서 "진미"를 체험하는 팬을 위한 작품을 쓰는 것이 앞으로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하루키 작품의 정해진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치매에 빠진 일본화 작가로 등장하는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일본화를 그린 아마다 토모히코라는 유명 작가는 치매에 빠진 육체로부터 마지막 힘을 짜내서 자신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은 크기의 "기사단장"을 주인공이 "기사단장"의 부탁에 따라 아키가와 마리에를 살리기 위해서 죽이는 장면을 자신의 멀쩡한 의식으로 보려고 한다. 하루키도 어쩌면, 자신의 노년에 이런 모습을 상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 결국 무언가 똑같다는 비난과 비판, 변한 게 없다고 이야기하는 지점은 이 계보에 모여 있는 패턴의 유사성에서 나타난다. 뭉뚱그려 모두 고만고만하다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후일담 계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스푸트니크의 연인->색채를 잃은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국내의 작가 중에 하루키 표절 논란을 겪은 작가가 통상 혐의를 받았던 하루키의 작품은 이 계보에 모여 있다. 기존의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과 하루키가 만든 판타지 세계관의 소설의 경계 사이에 그 유사 작품이 모여 있는 것은 그만큼, 쉽게 가 닿기 어려운 이질적인 세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대놓고 유사하게 만들기에는 또한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상실의 시대"는 "색채가 없는~"까지 이어지는 후일담 같은 이야기로 된 소설 중에서 아직 그 이상의 매력과 완전성을 갖춘 작품은 내가 본 것으로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작품들은 현실의 일본 사회에서 극명하게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와 인간성의 균열, 시대의 변화를 실제 하는 세계에서 경험한 내용들을 기초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이면 세계의 모습이나 환타지적인 요소는 거의 없거나 매우 엷다.
공통적인 주제 의식은 사람과 사람 간에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영역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며, 이를 넘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렇다면, 제대로 사랑한다는 것은 도대체 이 세상 속에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기고 있는 것 같다.
3. 르포 또는 인터뷰 계열 (언더그라운드)
하루키가 현실과 동떨어진 작품만을 만들어 내고 있는 상업적인 대중 소설가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 싶어도 이 계열 쪽의 작품인 언더그라운드를 읽게 되면, 그가 제기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 진지한 질문과 상세한 파고듦에 대해서 현실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의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여타 소설 작품에 비하자면, 재미없다. 그러나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의 진지한 주제가 어디 있는지, 그 진의를 감잡고, 파악하고 싶다면, 이 작품도 읽어볼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르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 의해서 농락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옴진리교 사건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은폐했던 일본 정부와 저널리즘에 대해서 용기 있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류급의 소설가 중에, 실제로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 있음에도 이렇게 용기를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는 몇이나 있었던가. "기사단장 죽이기"나 "1Q84", "태엽감는 새" 등의 책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회적인 하루키의 의식은 어찌 보면 굉장히 소극적이고, 은유적이며, 우회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직유나 직접 화법을 통해서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면모를 “언더그라운드”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면, 그가 자신의 목적성을 감추고, 좀 더 저변의 확산을 노리면서 어떤 변화를 은연중에 만들어내기를 추구하고 있는가를 일부나마 감잡을 수가 있다. 일단, 많이 팔려야만, 이같이 트로이의 목마처럼 그의 책 속에 숨겨져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은근한 야심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것이 그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4. 그래서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하루키가 만드는 작품이 주제 면에서 더 무거워지고, 더욱 확장된 범위에서 그의 인식의 지평이 깊고도 넓게 열린 뒤에 만들어진 보다 고양된 방향을 지향할 경우에, 그는 "판타지의 영역"을 끌어들이고, "판타지의 계보"의 소설에서 사용된 장치를 재활용하여, 그의 독자의 자율적인 세계 이해에 대해서 자극을 선사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현실성 없는 혁명을 유도한다거나 대규모의 인식의 전환, 직접 대놓고 말하는 사회 비판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그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어느 정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 순간에 벌어졌던 일본 국가 공권력의 우왕좌왕하는 모습과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했던 일본의 모습은 이후에도 "쓰나미 사태"와 "원전 부실"의 문제가 터지면서, 크게 변화 없이 문제 있는 상태 그대로임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내용은 "기사단장 죽이기"의 서두와 끝에서 지명을 언급하면서 제대로 다시 나온다.
근본적으로 사회 안전망의 취약 상태에 대해서 일본 정부가 상대적으로 한국과 같은 국가에 비해서는 좀 더 나은 면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은 인재와 재해에 대해서 아직도 매우 위험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이를 실행하는 것보다는 그저 그대로 문제가 적당히 있는 상태로 어찌어찌 굴러가는 것이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비용 문제와 생각하기 싫은 부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변화를 추구하기가 이 "이데아" 쪽에 가깝게 다가가서 인식과 권력의 상층부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말 그대로 귀찮고도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올바른 세상에 속해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변화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들리지 않는 메아리다.
이미 올바른 세계의 이상적인 모습이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세계 안에 만들어져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모습이 불완전한 그 "이데아"의 모사일 뿐이라면, 그 불완전한 영역에 있는 대다수를 비난하고 비판하면서 권리와 권력을 유지하고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 지식인과 권력자의 습성이다. 그것이 70대를 맞은 하루키의 성찰인 것 같았다.
그렇다, 그냥 영향력 있는 대중 작가 하나가 목소리 높여서 사회 문제를 말한다고 그 문제가 시정되고 해결되는 일은 그 때문에서라도 잘 벌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서구 문명의 철학 사상인 헬레니즘의 거두이자 헤브라이즘, 곧, 기독교의 모체에까지 영향을 끼친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를 상정하고 그 진리에 빗대어서 서열을 세우고 이루어진 폭력적인 수직적 사회 체계가 서구화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영역을 무시한 관념론의 해악은 이 세계에서 아직 증발되지 않았다.
서구 문명이라고 말했지만, 중근동의 이슬람 또한 이 관념론의 극단에서 IS를 통해 대칭 그 이상의 폭력을 세상에 가지고 들어와 있다. 문제는 서구 문명이 아니라 닫힌 사고의 체계다. 실제하는 사람과 세상을 느끼고 배우며 이해하기보다 이미 모든 것을 선험적으로 깨닫고 알고 있다는 신앙과도 같은 신념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불완전한 하부 체계가 그 불완전성과 취약 상태를 유지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를 가정한 사회 속에서는 매우 효과적인 이분법을 가능하게 해준다. "세속"과 "영적 세계"라든가, "순문학"과 "대중 문학"이라든가, "불완전한 유대인이나 아시아인"과 "완전한 아리아인", "불완전한 중국인 또는 한국인"과 "완전한 일본인".
그리고 그 이데아론으로부터, 일체의 인간성을 무시한 불완전한 세계에 속한 인간들에 대한 처벌과 살인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에 따른 확고한 행동도 이어질 수 있게 된다. 본디 그와 같이 살 수 없었던 사람들조차 그 과정에서 가해자의 입장에 강제적으로 처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결국 형상화된 60cm 정도의 크기로 나타난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이데아"의 모습은 나치즘이나 군국주의, 공산주의, 사이비 종교나 인종 차별 등의 극단주의의 폐해와 폭력을 길고도 광범위하게 이 세상에 살포해온 서양 철학사와 현대 문명을 가로지르는, 저 땅 밑에 봉인되어서 위험한 방울 소리를 계속 울려온 악령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1인칭 화자의 눈이나 "아키가와 마리에"에 같은 소설 속의 인물 중에 상대적으로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크기가 작고, 일면 귀여운 면도 지닌 "이데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내면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그 모습은 다르게 나타나거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같은 탈 중심주의나 탈 절대주의적인 설정은 "이데아론"의 위험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타파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설파하는 것보다는 더 효과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전략이다.
책의 서두에서 사실 초상화 작가인 "나"는 얼굴 없는 자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어려움에 갇혀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 "나"는 자신이 통과해온 이면 세계의 강에서 얼굴 없는 뱃사공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 이야기는 그대로 결말부에서 언급되지 않은 상태로 사라진다.
그러나 실제로 독자는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의식 중이건 무의식 중이건 일련의 "의식"을 진행하는 상황을 비유적인 "메타포"로써 소설 속에서 체험하게 된 것일 수 있다. "나"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사람을 무가치하게 죽인 전체주의와 사이비 신앙, 부부간의 불신과 불륜, 온갖 다 나열할 수 없는 폭력을 만들어낸 "이데아"를 죽였다.
그러고 나서 그 "이데아"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방향과 지평을 열어줄 무언가 지표 같은 것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기사단장"과 같은 형태의 "이데아"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손쉽게 그려낼 수 있는 성격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 것일까? 그것은 얼굴 없는 자의 얼굴을 그려내야만 하는 것처럼 어려운 질문이다.
그 얼굴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자리에는 "나"에게나 "독자"에게나 "이중 메타포"라고 하는 무서운 괴물이 장애물을 만들어 세우고 있다. 그 이중 메타포란 겉으로는 건전한 은유를 표방하면서 이를테면 "강한 일본"이라고 하면서 "무자비한 군국주의"를 숨기고 있는 것이라든지, 실제로는 은유로써 제공한 내용이지만, 해석을 은밀하게 행하는 방식으로 비판당하는 하루키의 작품의 장치일 수도 있다.
유키나 후카에리, 아키카와 마리에 등의 그의 소설 속 무녀 또는 신녀 캐릭터는 실상 무자비한 소설 속 세계에서 평화와 구원의 통로로 작용하는 신녀나 뮤즈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메타포다. 하지만, 잔인한 평론가와 독자는 그것을 "롤리타 신드롬"을 자극하는 마케팅 장치로 해석한다.
멘시키는 인물의 철저함의 측면과 신경증적으로 한 여자를 깊게 오랫동안 사랑하고 집착하는 면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오마주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제대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유능하고도 손에 거둘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능력을 집중하는 한정된 상황에 몰입해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에 대한 메타포로 보였다. 그의 철저함은 또한 빈 구석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말벌 소리"로 비유되는 폭력성을 지니게끔 만드는지도 모른다.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는 그런 의미에서 독자, 곧, "나"의 안에 있는 폭력성. "네가 뭔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어"라고 외치는 완고한 모습의 메타포이다. 결국, 잔인한 살육을 거리낌 없이 해냈던 나치군이나 군국주의 하의 일본군의 폭력성은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는 경계심을 전달한다. 우리는 이 어두운 우리의 봉인된 측면이 세상으로 나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경구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더 세세하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역사, 세상에 대해서 아는 만큼만 하루키의 작품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건져낼 수 있다. 그러나 스웨덴 한림원의 심사위원은 서양 철학사의 근원인 "이데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듯한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그다지 썩 좋아하진 않았을 것 같다.
한없이 가벼운 서구 작가의 문학 작품을 근거로도 문학상을 수여했었던 그들이 누구도 아닌 하루키보다 약간은 더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일본계 영국인 작가에게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혹 아닐까 하는 멋대로의 의혹이 생겼다.
어쩌면 그곳에는 날카로운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너 같은 사람은 우리의 리그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이데아에 가까운 쪽에 있지 않은 주제에 어딜.....’ 그들은 기사단장을 찌른 칼이 자신의 가슴께 어딘가를 욱신 하게 만든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