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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ug 11. 2016

<칼이 피다>-민초가 피어나다

가까이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체험하다.

동학 농민군이 거병한 대의는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으로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을 담고 있었다.

1894년 가을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은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이를 두고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동학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라고 하였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항일 의병전쟁, 독립운동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동학_농민_운동 (위키백과 참조)


7월 하순경부터 507페이지의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 8월 7일 자정에 읽기를 마쳤다.


이전에 읽었던 권영준 작가의 "거기, 그가 있다"(작성한 서평) 또한 읽기가 가히 쉽지 않은 책이었지만, 동일한 작가의 이 책, "칼이 피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훨씬 읽기가 쉬운 책이었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는 수월하지 않은 독서를 이 책이 본의 아니게 강요하고 있음에도 한번 더 이 작가에 대해서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 싶어 질 만한 계기가 있었기에 독서를 마칠 수 있었다.


극 중 산 위에 모인 동학 농민 운동의 상징화된 인물들이 수시로 암송하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지기 금지 원위 대강..."이라는 주문을 우연히 1994년도에 외운 경험이 있었다. 108자의 주문. 이는 "도교"의 주문이고, 기독교로 치자면 "주기도문"같은 위상을 도교 안에서 갖고 있다. 최후의 순간에 이 주문은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모으는데 있어 기도문이나 주문의 역할은 어느 종교에서나 지대하다.


수백 년 이상의 시간을 건너뛰어서, 작가가 이 극을 써내기 위해 치열하게 연구했을 내용의 일부분을 "경험"했다는 것이 이 소설에 대해서 흥미를 갖게끔 만든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위해 잃어버린 다른 기회는 없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잃어버린 이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는 진정한 민초들의 삶을 돌아볼 기회들을 바야흐로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과 죽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아쉬워하게 되었으며, 나와 분리된 과거의 인물들로 그들을 이해하기보다 바로 옆에 있는 존재들처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40대인 나에게도 어느샌가 이런 전통적인 작법을 가진 글을 읽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되풀이하면서도 일면 부끄러움을 가지고 계속 읽도록 만든 또다른 이유다. 그들은 우리였고, 우리는 그들일 수 있다. 시공간적으로는 멀리 있다고 해도 인간적으로는 밀착되어 있다. 이런 느낌을 이 책은 던져주었다.


단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만큼의 극단적인 사회적 참상이 이곳에 모두가 느낄 수 있을 만큼 확연하게 일어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외세에 기댈 수 있는 능력이 없거나 기득권으로서의 안전 라인 안에 자신의 삶의 기반이 들어가 있지 않다면, 곧, 상위 1%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산 위에서 관군이 쳐들어와 토벌당하는 자리에 같이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근 몇 년간 벌어진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보아도 그러하지 않은가?


책을 읽고 난 뒤에 3일가량 내가 읽은 것 중에 잊어버려지지 않는 부분들을 곱씹어 보니 이 "칼이 피다"가 던지고자 한 내용은 이것이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간 민초의 모습들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시 살려 내는 것이다.'


나라가 어렵고 곤궁한 삶에 빠져들어갈 때마다 사실 그 당시의 위정자들이나 기득권 계층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위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실제로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내기 위해, 비록 중과 부족의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도 들고일어났던 의병들이 있었고, 학도병들도 있었으며, 농민군들이나, 말 그대로의 백성들, 이른바 목숨을 버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은 다큐멘터리화 된 다소 건조한 서술로써 그려지거나 역사책의 한 단락 또는 장으로 사라져 간 그들을 다룬 내용 중에는 이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으며, 무엇이 그들을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어떻게 저항했으며, 때론 어느 곳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어떤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참여했으며, 죽음을 맞아서도 의연하기만 했던 것인지, 타협이나 회피를 시도한 과정은 없었는지 등의 내용은 거의 공백으로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만한 극화 소재로써의 매력이 충분한 대일항쟁의 역사나 임진왜란 등의 일부 승리를 담고 있는 내용이야 물론 극화로 만들어질 이유가 충분하여 계속 재생산되고 있지만, "동학농민운동"은 말 그대로 빈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는 한도에서는 이 책 이전에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 이 정도의 밀도를 가지고 철저한 고증과 지역색, 당시 민초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생생하게 살려 내어 극화화한 드라마나 연극, 뮤지컬, 소설 등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장벽은 거의 압도적인 이 책의 분량이 주는 무게감과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상황, 단 2일간의 상황을 연극 희곡을 작성해내는 방식으로 담아 만들어졌기에 만들어진 세세한 지문들과도 같은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행동 묘사와 형용, 대사와 심리 묘사 등의 내용들의 밀도 높은 연결의 연속이며, 결과적으로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점점 더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정들게 되는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해지기 때문에 오는, 스토리상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확인하기가 고통스러워지는 과정들이다.


물론 작가가 세부적으로 기술한 고서에 기반한 한자 어구와 문장 표현, 언어유희, 식자층으로서의 동학의 우두머리들이 내뱉는 수많은 표현들이 나열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 읽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을 느낀다면, 완독은 앞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 장벽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은 그저 흘려 읽는 방법 밖에는 없다. 한 달여를 읽을 생각을 했다면 아마도 나는 옥편과 더불어 수백 개의 링크를 웹상에서 검색하며 이 내용들의 정확한 의미들을 추적해 들어가야만 했었을 것이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밥 한 끼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먹을 수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더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내용을 본문과 책 표지 뒤에서도 강조를 하고 있어. 유약하고 현실과 일면 동떨어진 동학의 우두머리들의 허위의식과 허세, 당시에 이미 힘이 될 수 없었던 조선의 사상 놀음에 대한 슬픈 조명을 하고 있다. 실제로 급박한 싸움의 장소에서 이 식자층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아노미와 패닉에 빠진 상태를 연출한다. 그럼에도 대단한 디테일로써 책의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부분은 소설 내의 한부분으로 보기보다는 한국의 한자 문학과 철학의 역사를 탐구하는 동시에 한자와 연관된 공연 예술의 고증을 돕는 목적의 학술서나 실용서로 별도 편집되어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도 들었다.


한창 문학 소년 행세를 하던 중고등학교 시절에 번역상의 난해함까지 배가 되어 읽기를 포기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불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던 작품들보다는 이 작품이 원래 갖고 있는 집필 동기가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단면"을 우리에게 다시 재현해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한 절차라고 믿으면서 '친절하게(?)' 부가된 수많은 세부 내용들을 견디어 내었기에 결국 끝까지 읽어갈 수 있었다.


솔직하게 이것만으로도 독자가 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작가 역시 어쩌면 이와 같은 자기 충족감 비스름한 함정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싶은 것이다.


현시대에 이르러 극화를 만들어 내는 작가는 독자가 결국에는 자신의 영역 내에서 상상력과 더불어 작가와는 다른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이해할 영역을 남겨둘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광범위하게 인정받는 예술가들은 '잘 버린 사람'이다.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다 드러내고자 하고 인식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작가의 영역 내에서 해결해주고자 한다면 독자는 결국 자신의 읽기 속에서 소외되는 동시에 반작용으로 자신의 생업과는 상관없는 그 극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현시대의 뇌과학은 많은 우리의 상식과 아카데미즘에 의해서 형성된 지식의 상당수를 거의 실시간적으로 파괴해가고 있다.


일례로, 프로야구 선수들이 공을 잡는 메커니즘은 이미 선수들의 뇌와 눈이 실제 공의 움직임보다 앞서서 공의 궤적의 영상을 그리고 잡아내는 거의 무의식적인 현상임을 최근에 실제 뇌 반응과 영상 측정을 통해서 밝혀냈다. 이처럼, 현실의 인간은 그대로 오는 자극에 맞춰서 후행되는 반응을 도식화된 상태로 만들어 내는 존재만은 아니다.


그러나, 창작을 하는 이들 중에 일부는 자기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도식화한 독자/관객/시청자 등에 대한 이해에 천착하며,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디테일들을 너무도 많이 만들어 내고, 이 디테일들을 견디거나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참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을 끈기있게 만들어 간다.


불과 수년 전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 영상물들과 극화들의 홍수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뇌는 그렇다면 요즘 들어 어떤 방식으로 스토리를 보고 있을까? 거의 대부분 적절하게 잘 버리고 잘 내려놓는 작가에게 성공의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작품 속의 일부 빈 공간들을 독자들 자신이 거의 자동적으로 채워가며 스토리를 유영해 갈 것이라는 가정을 해본다면 말이다.


프로슈머, Prosumer, 생비자란 개념이 이제는 일상화되어 있다. 생산을 하는 동시에 소비를 하는 프로페셔널한 소비자를 뜻한다. 작가 역시 독자들이 그냥 독자가 아닌 프로의 독자들이 되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메시지를 보낼 효과적인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글의 독자층에 대한 프로필이 먼저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야 하며, 마치 마케팅을 시도하는 기업과도 같이 시장 세분화 전략을 통해서 대상군에 대해서 정확한 영점을 잡고 창작을 해 나가야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고객으로 독자들을 인식하고나서 분류한 뒤에 이런 군에 속해 있는 독자들이 관심도 없어하거나 이미 익숙한 디테일들은 동어 반복이나 다름없는 부분이기에 과감히 생략되어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가 90년대 초반 학번들을 대상 고객군으로 영화를 찍었다면, 학력고사에서 한문에 대한 배점이 절대치로 5점 밖에 안되었던 이 학번들에게는 한자를 들이댈 이유가 거의 없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 어느쪽 방향으로도 최소주의 (Minimalism)는 대부분 옳은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지나치게 버리다 꼭 필요한 부분마저 버리는 위험도 같이 있지만.





"거기, 그가 있다"가 식스센스급의 반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이번 "칼이 피다"의 반전은 "유주얼 서스펙트"급이다.


작가는 독서를 함에 있어 수많은 장애를 걸어놓는 동시에 결말에 있어서는 보다 판타지나 반전 영화에서 나타나는 내용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며, 패배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을 베푸는 동시에 장애물들을 넘어 결말부에 도달한 독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듯하다.


역시 책을 읽는데 일종의 장애물 중 하나가 되었지만, 말을 더듬는 대사를 십 수 페이지에 걸쳐 늘어놓는, 트라우마에 의해서 말더듬이이자 정신지체아가 된 캐릭터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말미에 가서야 왜 이 캐릭터가 적지 않은 비중을 가지고 등장했었는지 이유를 결국 알 수 있었는데. '유주얼 서스펙트'급의 반전을 위해서였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적지 않은 독자들이 결국에는 끝에 도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 답답하고도 고통스럽게 전개된 이야기를 견뎌낸 보상처럼 건질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영혼들은 치유받았으며, 칼은 하나의 춤으로 피어난다.

칼이 피다와는 연관이 없는 '칼 춤' 이미지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낸 권영준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들을 보다 보면 '칼이 피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그 두 가지 의미가 다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함에서 나오는 힘, [칼이 피다]의 저자인 권영준 감독을 만나다 (1)" 

"단순함에서 나오는 힘, [칼이 피다]의 저자인 권영준 감독을 만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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