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창호 9단: "바둑에는 '복기'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위의 문장이 떠올랐다.
공연예술가, 연출가이자
희곡 작가인 그가 겪은
삶의 커다란 굴곡,
어떤 의미에서는 "패배"를
치열하게 복기해 보는 내용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되어가는
수많은 경로들이 있다.
보통은 현실의 자신과
자신이 실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간극이 클 때, 이를 메우기 위해서
글을 열심히 쓰게 되고,
이를 통해서 "명예와 권력과 돈,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이
결국에는 치열하게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욕망이지만
그 배경에는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
종종 나타나고는 한다.
러시아 대륙을 한때 장악했던 시인인
푸시킨조차도 자신의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야 바스 류빌: http://m.cafe.daum.net/shaliapin/6WCc/25?boardType=U&q=D_4gI5L5EgFJI0& )"을
통해서 그의 아주 오래 전의 사랑을
놓쳐버린 패배를 고백하면서
고통스럽겠지만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 책 또한 패배에 대한 치열하고도
솔직하면서도, 다시금 승리를 지향하는
이기기 위한 준비를 멈추지 않는
에너지의 원천을 지닌 자신의
의식 세계 속으로, 자신의 경험을
조명하기 위해서, 전인격적으로
자신이 연출하고자 했던 연극의
세부를 다시금 다듬고 다듬어,
극장의 관객이 아닌 독자들이
마치 공연처럼 느끼면서 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돌아본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와 같은 공연이 동일하게
시도되다가 멈추어 버렸고,
다른 연출자에게 공이 넘겨진 이야기를
다시금 그려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하나의 공연을 치밀하게 구상해서
비유와 은유의 개념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상상 다큐멘터리'라는 문구가
책을 홍보하는 문구로 나와 있는 것은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이
정말 고통스러운
개인사를 낱낱이 까발린 게 아니라
좀 더 상징화되고 승화된 이야기라고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감이 살아 있다.
작중 화자인 "그"가
생각하고 겪고 있는
공연 현장의 내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조금씩 이야기가 심화될수록
내 감정을 이입시켜
그 고통이나 망설임, 주저함,
때로는 강렬한 자기 확신과
반대로는 처절한 자기 비하감 등
다양한 감정들을 체험하게끔 한다.
작중 화자와 배우들, 스태프,
마장동으로 상징화되는
속물근성을 가진 권력자,
부패한 정치인 등
인물 모두가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한 모든 느낌들이
강렬하게 와 닿았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야심을 갖고 에너지를 기울여
글을 써보았지만,
전념을 다해서 글을 쓰기보다는
다른 길을 찾은 "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과거의 회상이 손에 잡힐 듯
앞으로 떠오르는 듯했다.
물론, 이런 느낌을 받아 순식간에
여러 페이지의 글들을 열정적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꼭 나와 같은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다.
보다 강렬한 느낌을 받을 사람들은
무대 위와 바깥에서 그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수많은 공연예술가들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확장 된다면,
사회의 조직 내의
정치적인 네트워크에
적절히 잘 기대어서
살아가는 법을 잘 모르고,
오로지 자신의 업무 또는
작품, 실력, 능력을 통해서
경제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사회적인 가치를 만들어 낸 사람들.
예술적인 높은 수준의 작품보다는
말 그대로 잘 팔릴 수 있는 작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에 치열한 창작가의
고민이 종종 폄훼당하는 현실 앞에
뒤틀린 인생을 겪는 사람들일 것이다.
몰입했었지만, 끝내는
자신의 이름으로
그 가치를 창출했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서 뜨거워지는
가슴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마태수난곡"처럼 장엄하지만
스타카토처럼 뛰어드는
재기 발랄한 언어유희와
해프닝들이 '헝가리 무곡'처럼
버무려진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다지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이세돌 9단과 알파 고의
바둑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에는 흰돌과 검은 돌의
무늬에 불과했었던 것처럼,
자신의 관심사와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책장은 멈춰있게 된다.
공연, 특히나 창작 연극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나
이 연극의 역사적 백그라운드인
'김삿갓'의 이야기들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의 난,
역성혁명 등 오얏리씨가 지배하던
조선의 수많은 전란을 맞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에 대한
또한 우리 역사에 대한
'복기'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이 글은 한 장 한 장 넘겨 읽기에도
버거움이 있을 수 있다.
김삿갓과 본격적으로 설전을 펼치는
정시후와 이극도, 원호 세명의
이야기의 디테일을 잘 이해하면서
"한자"를 파자하거나 이전 역사의
고서들에 대한 인용과 참조를 통한
이야기들을 끈기 있게 읽을 수 있어야만
이 책이 던지는 참맛을 이해할 수 있다.
가련과 아진과 더불어 교감하는 장면도
이러한 디테일들을 이해해야만
건질만한 내용이 될 수 있다.
돈줄을 쥔 마장동은 혐오스럽고
경멸스럽게 묘사되었고
엄청난 연기력을 가진 강두한은
명예와 돈, 권력, 사랑을 한 몸에 쥔
작중 '그'의 선망의 대상인 인물이다.
또한 "그"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기타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럭저럭 인간 군상들인 인물들 간의
조합은 사회 조직 안에서 경험한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되는
상호 작용들의 반복이기 때문에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틈바구니 안에서
좀 더 능수능란한 처세를 해내지
못하는 그에 대해서 조금 답답해진다.
이것이 복기가 좀 더 자세히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러시아 유학파인 평론가에서 연출가로
전향한 류리는 '사대주의'에 빠진
이 사회 전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사실 류리에게 유혹을 당하지만
류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의 작품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우리도 외국 문화에 매혹당하지만
결국 우리가 산 책에 대한 인세는
외국 작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서
그 나라의 문화를 살찌우고 수준을
높이는데 이바지하게 되는 것처럼.
그럼으로써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치밀하게 창작하고
우리 사회가 가진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되고 성장된 문화를 재조명한
작품의 완전성을 위해 투신했다고 해도
결국에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이 '공연예술계'의 풍토를.
그러나 그것은 사실 수많은
다른 한국 사회의 여러 조직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데
이 작품이 가진 스토리의
확장 가능성이 열려 있다.
어쩌면 작가는 이를 좀 더 보편화된
스토리로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대화의 형식으로
가난하게 사는 인생이
미리 예약되어 있는,
잘 나가는 배우가 아닌
연극판의 스태프들과
그럭저럭 배우들의
실상에 대한 자조도 깔려 있고,
높은 예술적 가치를
구현하고 작품에 있어
최대치의 완전성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더 이상 창작의
미덕이 되지 못하는
이 사회의 풍토를
그리는 내용도 나온다.
상업적인 요소에
더 높은 완전성이라는
방향성이 포함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이것은 패배에 대한
복기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예술계의
현실의 비참함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작품의
느낌도 일부 받기도 했다.
묘사가 치밀하게 이어지면서
그 묘사와 더불어 있는 사물들과
장소, 풍경, 조명 등등이 정밀한
디테일로써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스토리가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힘도
잃지 않고 있으니,
음악으로 치자면,
리드 기타 연주자가
간주 구간에서 드럼을 치고,
피날레에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는 구성이랄까.
원맨 밴드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일어났다.
마지막에는 끈질기게 이 책을
읽어온 사람들이 맞이하게 될
약간은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그 방향으로 갈지
예상할 수 없었던 반전이 나온다.
이 반전은 작가가 자신의 창작활동에
대한 치열한 복기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메시지처럼 이해된다.
자신의 경계를 부수고 다시금
승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치밀하게 고민하는 가운데서 나온
결론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 책의 결말은 더 깔끔했다.
결국 '거기, 그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작가는
승리하기 위해 그를 그곳에 두고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예술혼과
창작 에너지를 새롭게 불태우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든 단상 : 대중의 눈높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이라는
문구가 책 안에서 나타나고는 했다.
작중 '그'는 그런 작품을 만들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의당 만들어야 할
작품을 만들기를 원한다.
그의 캐릭터가 가진 중심이며,
예술가적 기질이 가진 핵심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양식으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을 만든다는
표현은, 대중이라고 불릴 사람들에겐
솔직히 열 받는 표현이다.
왜냐면 우리는 자신이 대중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예술가들이 자신에게 '수준이 낮은
대중'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를테면, 프로그래밍을 하기 위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알고리즘을
이해하고 또한 만들어내는
프로그래머들에겐 복잡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코드가 얽힌 전개도처럼
보일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재미가 있을 턱이 없다.
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이 아니라서
그 작품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드처럼 보이지 않는 작품을 원할 수 있다.
대중들은 각각의 사정으로
복잡하고 각기 다르게 전문적이고,
예술적으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야
찾았던 정보를 어디서나
한 사람이 찾아낼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정보는
힌트만을 던져주고,
관객이나 독자들의
새로운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
창작가들에게 남겨진
과제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중의 무지에
자세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기 높이 쌓인 전문성의
경계를 허물면서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이 시대의 대중에 맞는 눈높이란 없다.
차라리 서로들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다른 이들의 영역을 바라볼 여유가 없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바흐조차도
더 높은 급여를 주는
사용주를 찾아
계속 직장을 옮겨 다녔다.
피카소는 초창기에 전시회에서
부자의 돈을 빌려 자신의 작품들을
고가에 사재기하여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가치를 인정받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당시에는 대중문화였다.
볼테르는 거의 매주
한편씩의 희곡을 써서 공연하여
자신이 귀양 간 도시의
GNP를 올려놓았다.
밀란 쿤데라는 수준 높은
소설 작품들을 통해
동서양을 오가며
높은 흥행까지 이뤄냈다.
파울로 코엘료는 먼저
웹상으로 소설을 발표했었다.
그 작품의 이름은
"승자는 혼자다"(전 2권)이다.
자신의 작품을
돈을 내고 사보는
관객이나 독자들은
작품의 완전성만큼이나
또한 중요한 존재다.
왜 완전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이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유 안에 "인간"이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아야 한다.
실제하는 인간은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퉁쳐서 불리길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일부가 "나"를 제외한 다수를
"대중"이라 부르길 원할 뿐이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쩌면
더 많은 곳들에 그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