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은 황금빛 와인 음미, 소설 읽기는 청포도 굴림
스포일러가 일부 나옵니다.
책을 읽기 전에 권영준 작가님이
책 뒷면에 써서 남겨 놓은 문장은
마치 하나의 수수께끼라도 된 것처럼
또는 계속 글을 읽어가게 만드는
유도문이라도 된 것처럼 뇌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소설 읽기가 햇살 좋은 나무 그늘에 기대어 탐스런 청포도를 하나씩 입에 넣고 달콤히 굴려보는 것이라면, 희곡 읽기는 붉게 노을 진 수평선을 지긋이 바라보며, 황금빛 와인을 혀끝으로 향긋이 음미하며, 보는 것이다."
- 영준치 못한 어느 예술가의 제법 영준해 보이는 짧은 생각
그저 이를 문장을 줄이기 위해서
축약해보자면, 그 문장은 매우
드라이해지면서, 작가님이 갖고
있는 원래의 의도와는 거리가
많이 멀어지게 된다.
“희곡 읽기는 관조에 가깝고,
소설 읽기는 경험하고 내면화
하는 것에 가깝다.”
1. 소설 읽기는 어쩌면, 그저
내면화하고 경험화한다는
소리와는 다른 뜻이었을 것이다.
일단 햇살 좋은 나무 그늘에
기댄다는 자체가 그 소설의
현실을 사실과는 다른 관점에서
좀 더 편안한 자신의 현실에 비추어
거리를 두고 인식한다는 의미 같다.
탐스런 청포도를 하나씩 입에
넣고 굴린다는 의미는 좀 더
여러 감각이 날 것 같은 소재의
내용을 꼼꼼히 느끼면서
경험한다는 의미 같다.
하나씩이라는 의미는 순차적으로
소설 속 인물이나 소재, 장면의
변화를 또렷이 구분하면서
본다는 것 같다.
2. 희곡 읽기는 붉게 노을 진
수평선의 의미가 그 희곡
자체가 무대의 장면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희곡 작가가 만든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읽기 위한 전제 조건이며,
이를 지긋이 배경으로 생각하며
바라봐야 하는 과정이 있다는
이야기 같다.
황금빛 와인이란 결국, 소재나
이야기가 가공되고 숙성되어,
날 것 아닌, 손질이 매우
많이 되어 있는 상태임을
의미하고, 혀 끝으로 향긋이
음미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그 소재나 이야기, 인물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이를
감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소재와 주제로 희곡과
소설을 동시에 써본 사람이
되거나, 그 사람이 쓴 두 개의
장르가 다른 같은 내용의 글을 읽은
독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3. 그렇다면, 영화 보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황혼 녁에
스러져가는 나무의 그림자를
등 뒤에 느끼면서 포도와 와인을
동시에 집으면서 입으로 우격다짐으로
먹고, 이를 삼킨 다음에 위장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음식의 맛을 다시 소처럼
반추해보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든, 세 번째의 문장을
쓸 자격이 있을만한 사람은
권영준 작가님 같은 분이
영화 제작까지 한 뒤에
세 가지를 병렬로 만든
작품을 낸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다.
작가님이 영화를 만들기를
기대해야 할 것 같고, 최초의
작품의 최초의 감상문은
내가 적어보고 싶다.
감사하게도 서평을 하나
적기 위해 책을 한 권
보내달라는 요청에 흔쾌히
한 권 보내주셨고, 덕분에
한 달 동안 회사 일과 더불은
영화 감상 외에도 좀 더
집중력을 기울여해봐야 할
다른 일이 하나 더 내 일상을
건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같은 소재에 같은 인물, 같은 스토리를
그리고 있어도, 희곡과 소설 간에는
독자가 느끼는 차이가 명확하다.
그 다름이 이런 양상으로 다르다는
그 깨달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만든 책이 이것이었다고 생각하면
같은 스토리가 반복되고는 있지만
이 "동시상연집"을 읽을 동기는
잘 유지될 수 있다.
요즘 세상에서 이런 시도는
잘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와 같은 깨달음을 보여주기
보단, 희곡과 소설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시험문제의
짤막한 지문으로 나오는 것이
경험이 허용하는 한계일 테니.
이 짧지 않고, 한 가족의 비극이
다시금 해피엔딩으로 변화하는
스토리로 가기까지의 풍성한
디테일을 가진 소소한 일상사.
이를 꼼꼼하게 형상화한 내용을
각각 다른 형식으로 두 번
읽어갈 시도를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제 세 번째 권영준 작가님의 책을
"거기 그가 있다"와 "칼이 피다"에
이어 세 번째 "동시상연집"으로
읽게 되었는데. 이 세작품 다
읽는데, 한 달 가까이 내지는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터프한
과제를 던지는 작가다.
그러나 그럼에도 읽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각기 다른 장르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고,
자신의 삶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형상화해야
최대한 의도한 대로 독자에게
그 진면목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감잡기 위함이고,
독자에게 각기 다른 장르의 가치를
깨닫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앞의 희곡의 어릴 적
"딸"을 해외 입양 보내야 했던
비극적인 삶의 경험을 했던
할머니의 이름을 "애심"이라고
짓고, 뒤의 소설 속의 같은
삶의 경험을 한 할머니의
이름은 "옥분"이라고 지었다.
같은 인물에 대한 같은 이야기를
해도 희곡과 소설 속에서 그
인물의 "본질"이 다르게 이해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애심"은 속으로 닳고 숙성된
그 인생의 무게와 비극을
희극으로 전환하고 달관하는
내공을 황금빛 와인이 된 것처럼
숙성시킨 "사랑의 마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인물이지만,
"옥분"은 작가가 자신의 직간접적인
경험으로부터 가져온 거의 날 것의
소재와 가까운 그 현실 속의 인물의
이미지와 최대한 밀착된 사실적인
인물이다.
"붉게 노을 진 수평선"은 또한
시간의 개념을 담고 있다.
희곡은 일정한 시간 내에
그 스토리를 마무리해야 하는
한정적인 시간 개념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완전히
저물어 버리기 전에 극은
마무리되어야만 한다.
"햇살 좋은 나무"는 그런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희곡보다는
스토리를 진행함에 있어서
시공간적인 제약을 훨씬
덜 받는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
속 디테일은 희곡에서 나오지
않은 다른 요소들이 더 덧붙으면서
더 풍성해진다.
한송이씩의 포도알을
입 속에서 굴려가듯이
이 자유로움은 세밀함과
더불어 무대의 한정된 시공
개념을 벗어난 풍성한 스토리를
독자에게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다.
이 "동시상연집"은
그럼으로써, 이 두 장르에 대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경험을
주는데 성공했다.
이 실험을 위해 차용된 스토리는
그렇다면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이 속에는
시사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인명경시가 만연되었던 한국
사회. 아동의 권리나 일반적인
국민의 살 권리 자체가 계속
일상적으로 무시되었던
이 사회에 대해서 작가는
공격을 그치지 않는다.
세월호에 대한 무신경한
대응에 대해서 외친 작가의
강렬한 직설화법은 순식간에
글 속에서 흘러 사라지지만,
그 안에 있는 강렬한 사회인식은
그저 장르 비교의 색다른
경험을 우리에게 주는
것만을 말하고 있진 않았다.
그 속에는 노년에도 불타는
사랑의 마음. 불안정한 딸의 부부
관계를 처연히 바라보는
애심이나 옥분이 삶의
현명함과 더불어 전달하는,
삶의 깊이를 담은 조언도 있다.
각각 희곡과 소설 속에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오래전 헤어졌던 딸의
짧은 귀환 중에 주어진
삶의 달관은 아름다운
인생의 한 측면이다.
세상이 지옥 같지만
지옥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 작가의 의지라고
느꼈다. 절망은 절망대로
있지만, 그 절망 귀퉁이에
묻어 남아 있는 희망을
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읽을만한 작품이다.
매우 수다스럽고, 인물을
형상화해서 실제처럼
만들어내고자 하는
수많은 디테일이 결합되어
있지만, 그러한 중심에서
멀어진 채로 시도되는 문장은
뒤로 가면 갈수록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어로 처리되는
수많은 대사는 이 작품에서
딸과 손녀, 할머니 간의
소통의 벽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장치였다.
소설에 가서는 잠깐 희곡과는
다르게 대사를 프랑스어로
쓰는 것을 잠깐 빼먹고 이를
드러내어 농담을 하는 작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는데,
이런 장난기를 드러내신 것을
보니, 소설마저도 방백 형식으로
쓰는 현장감을 느끼고 싶으셨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4월 말에 받아 6월 초에야
읽기를 마친 이 책을 이제
접으려고 하니 시원섭섭한
감정이 든다.
자 이제 나도 내일부터
영화와 소설, 희곡 감상문과는
다른 장르인 업무에 푹 취해서
나만의 작품을 한없이 써나가야지.
그것은 보고서이고, 이메일이며,
프레젠테이션이다. 이 세 장르(?)에
작가의 글을 옮기면 그 작품 속의
스토리와 인물은 송두리째 바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