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May 08. 2016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오리지널 되기

왜 즐겁게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 안 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책을 돈을 내고 사보는 독자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이 책을 사보기 전까지는 내가 얼마나 오만하게 그를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인정하고 판단을 보류하는 신중함 없이 이해했다고 자만했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물론, 이해하고 있었지만, 솔직하게 작가 자신이 이와 같은 수많은 오해들에 대응하는 글을 상세하게 작성하니 역시나 내가 이해하는 폭이 좁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두어 가지의 생각은 맞아떨어진다. 그는 자신의 책을 돈을 내고 사보는 독자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예술혼이 어쩌고 순문학이 어쩌고 하는 예술 순혈 주의는 그 시작에서부터 그의 글 쓰는 의미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국가 주의나 민족 주의자라기보다는 코즈모폴리턴(세계시민 주의자)으로서 인간의 보편성을 깊고도 넓게 파고드는 글을 쓰고 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하루키는 또한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보다 고양된 의미를 부여하는 수많은 일련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욕을 먹는 작가가 되었으며, 그를 신랄하게 욕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가 아닌 일본 내에 엄청나게 많이 있다. 오히려 항일 민족주의를 가진 우리나라에서조차 지금에 이르러서는 광범위하고도 확고한 지지층을 문단이나 일반 독자층 어디에서나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두꺼운 글로벌 팬층, 그냥 신간이 나오면 두말할 것 없이 일단 사보고 마는 충성도 높은 팬층을 가진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오히려 작가가 태어난 국가에서 적대시하거나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또한 인지상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지자는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인정받기 힘들다"라는 말이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1990년도부터 중독 정도가 높은 팬이었던 나조차도 갖고 있었던 오해들이 많이 풀렸다.


이 책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루키가 밝히고 있는 그의 소설관이 무엇인지, 왜 글을 쓰며, 어떻게 쓰며, 어떤 경로로 이렇게 광범위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전 세계적으로 높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지를 설명한 "자기변명과 합리화"의 책이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소설가로서의 인생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신의 일생을 반추하면서 보여주는 수준 높은 소설 작가 입문서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2-50대의 광범위하게 넓은 연령대의 작가 또는 블로거, 심지어는 글 쓰는 일을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책을 몇 권이라도 읽었던 동시대의 사람들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거론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어려웠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International Trading Business를 주로 했던 1999년도부터 2013년도까지의 기간 동안 만났던 중국과 태국, 베트남,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필리핀, 네덜란드, 체코,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의 내 나이 근방의 외국인들 중에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 놀랐었다. 심지어는 내수에 집중된 Business Process Outsourcing 일을 해온 최근까지도 누군가를 붙잡고 하루키 이야기를 해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기는 안 만나기보다 어려웠다.


물론, 나에게도 눈치나 감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물어보았을 때 알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 질문을 했던 것도 그 확률에 영향을 많이 미쳤을 것이다. 보통은 자기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사회의 조류나 조직의 질서에 매몰되지 않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라거나 책 읽기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 소설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 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자, 약간은 자급자족의 경제관념이랄까, 성실하게 자신이 일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고 일하는 태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은 하루키의 소설 한 두권 정도는 읽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물어보면 과반수 이상 이런 사람들은 그의 책을 최소한 한 두 권은 읽었다.


더구나 지금도 그럴지는 미지수지만,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의 논술 시험을 위한 참고 도서 중에 스테디셀러로 그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가 항상 목록 안에 들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필히 이 책만큼은 읽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는 중독성을 가진 작가이므로 한 권도 안 읽기는 쉬워도 한 권만 읽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그 한 권은 여러 권으로 변했을 확률 또한 높다.


하루키를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글로벌 비즈니스의 하나의 에티켓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도 들 정도였고, 책을 읽었다는 공감각은 서로에 대한 희미하나마 신뢰나 공통점을 공유하는 효과를 비교적 보다 쉽게 일어나게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2016년 오늘날까지 출판된 하루키의 글들은 글 쓰는 이들뿐만 아니라 읽는 이들에게 전반적이고도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이 영향력은 이미 이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5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동아시아 일대를 기점으로 유럽, 미주에 걸쳐 있다.


그는 자기 책이 이렇게 일단 출간만 되면 팔리게 되는 충성도 높은 독자들을 거의 예외 없이 번역되어 팔리는 나라들에서 광범위하게 갖게 된 이유를 사회적인 변혁의 시기,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의 시기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곧, 일본 같은 경우에는 전공투 세대와 같은 사회 변혁 운동이 끝나고 거품 경제의 시기를 부유하면서 사회의 패러다임이 정치적 혼돈기와 고도 자본주의 사회로, 다시금 불황이 지속되는 저성장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비유와 은유, 곧 세계를 이해할 새로운 메타포를 갈구할 때 그의 글의 확산 속도는 커졌었다.


우리나라 역시 민주화의 변혁기를 거치며 고도 첨단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시기에 전반적인 팬층의 확장이 있었고,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의 눈에는 급변하는 세계에서 부유하는 영혼들을 건져 한몫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중국에 대해서는 내가 2000년도 초반에야 팬층이 많이 생긴 것으로 오해한 측면이 있었는데, 대만 등과 마찬가지로 초기에 그의 팬층의 확산이 일어났었다고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80~90년대, 중국이 개혁 개방 노선을 걷게 된 시기에 팬층이 늘어나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1990년도부터 중독 정도가 높은 팬이었던 나조차도 갖고 있었던 오해들이 많이 풀렸다. 하루키가 사실은 전폭적인 일본의 문단이나 출판계의 지지를 원래부터 받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오히려 치부시 되고 갖은 방식의 과소평가를 받았던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을 좀 더 정확히 체감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의 오해에 대해서 그는 마치 자기 소설 속의 기묘한 성실성을 가진 인물들처럼 이해를 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고, 공적으로 드러내서 매번 변명을 해오지는 않았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는 점점 더 커져갔고. 그것은 과대평가가 아니면 과소평가 양쪽으로 치우쳐 있기 마련이었다.


책임지고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해주거나 혹 틀렸을 경우에 정정을 할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감각적으로 그를 비판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소설가를 지망하고 있는 적지 않은 세계의 독자들에게 주는 40여 년이 되어가는 "몸으로 체득한 글쓰기의 노하우"이자 어떻게 전업 소설가로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성공 사례"이기도 한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처럼 수월하게 읽히며, 마지막 장까지 흥미로움을 잃어버리지 않게끔 이끈다.




60대가 넘어간 오늘날까지 어떻게 그는 샘솟듯이 소설을 써나 갈 수 있었던 것인지, 책에 나온 노하우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추려보자면 이러하다.


1.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겼고, 그의 부모도 그가 공부보다 책을 열심히 읽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결국 "다독"을 실제로 해왔고, 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글쓰기 기초 체력이 충분히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2. 영어로 된 책들도 열심히 읽는 것을 즐거운 취미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이 학교 교육 과정상의 영어 성적을 높이는데 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문체를 개발하고, 번역을 통해서 향상을 낳고, 사업적으로는 영어 소설로 번역되어 각국에 출판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3.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온 스토리지만 그는 자신이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 운을 얻은 것에 계속해서 감사하고 있다. 군상 신인 문학상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통해 수상한 덕에 이른바 등단할 수 있는 티켓을 얻은 것은 그의 인생을 뒤바꾼 커다란 사건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아쿠타가와 상과 같은 또 다른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에 사로잡히지 않았기에 그의 글쓰기의 폭은 협소해지지 않았다.


4. 전업작가가 되기로 작정한 그 이후부터 그는 하루에 한 시간 이상 달리기를 지속했으며, 거의 이 같은 패턴을 중단하지 않았다. 체력이 글쓰기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즐겁게 달리고 있다.


5. 일본 국내에서 그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한창 높아지고 있을 때, 그는 미국 진출을 위해 힘썼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글을 번역해 줄 현지인들을 여럿 만나 깊은 유대감을 나누면서 도움을 받고, 뉴욕 기반의 문예지에 정당한 현지 작가와 같은 수준의 필터링을 받아 기고를 하면서 인지도를 넓혀갔다. 일본 국내의 광범위한 인지도를 기반으로 현지화 전략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국 언어의 도서보다 오히려 영문 소설을 더 많이 사보는 경향 때문에 자국어 출판물의 규모가 작아지는 현상을 겪고 있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관통하고, 체제의 변화를 크게 겪은 러시아에서도 높은 관심을 낳는 등 50개국에 걸쳐서 각국 언어로 출판되는 쾌거를 낳았다. 그에게는 모국에서 겪었던 설움을 날려버리는 계기이기도 했다.


6. 그는 소설을 오랫동안 쓰지 못하는 정체기에 봉착하는 경우를 거의 겪지 않았는데, 장편소설을 본업으로 하고 있지만 또한 번역이나 에세이 등의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장편 소설이 써져야만 할 내적 필연이 생기기 전에는 소설 집필을 하지 않음으로써 정신과 육체적으로 항상 소설을 쓸 필연성이 충만할 때만 집필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7.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자기 자신이 즐겁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이 글을 읽음으로써 그의 글을 돈을 내고 사보는 독자들 또한 즐거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일하고 있는 영역에서 이 같은 태도를 정리하자면, 고객과 고객경험 중심, 종업원 및 고객 관여도 향상(Customer & Customer Experience Focus, Employee & Customer  Engagement Improvement)를 제대로 실행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강제적으로 그의 글쓰기를 규정하고 일정화해서 작업하는 방식을 피해서 온전히 자신의 스케줄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지치고자 해도 지칠 수 없으며, 회의에 빠질 가능성도 작아지게 된다. 최상 수준의 서비스 기업처럼 느껴질 정도다.


8. 학창시절에 아내와 결혼을 한 뒤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돈을빌려 재즈 카페를 열었고.이후에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경험하다가 선택한 전업 작가의 길에 있어서, 그는 확신이 서자 세번째의 "양을 둘러싼 모험"을 집필 하기 전에 배수의 진을 치거나 건너온 다리를 부수는 것과도 같은 필살의 전략을 썼다. 어설프게 이쪽 저쪽에 다리를 걸치는 얕은 머리를 굴리지 않았다. 또한 고생을 했었던만큼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이 갖고 있는 크나큰 의미를 지금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9. 그리고 바로 아내가 지금까지 출판한 글들에 대한 거의 모든 1차적인 편집 작업에 대한 조력자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격한 논쟁을 해도 괜찮은 상대이고, 결국에는 그 말을 듣고 편집한 내용이 언제나 옳았었다라고 이야기 한다.


10. 덧붙혀 자신이 결국 출판사에 넘기게 되는 글은 초고 이후에 수없이 진행된 교정과 편집을 거친 글임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더이상 자신의 역량과 능력으로 더 손볼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들 때 넘기고 그것이 최상의 상태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진인사 대천명"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이 쓰는 그대로 명문을 남기는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의심하고 붙들고 고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외에도 대단하다 싶은 노하우로써 글쓰기에 앞서 등장인물들이나 소재, 사건들을 자신의 내부에 수많은 서랍이 달린 서랍장 같은 것을 만들어서 보관하고 이를 글을 쓰는 시점에서 활용한다는 내용들이 나온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그다지 머리가 좋은 사람이 못 되어서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이고, 똑똑한 사람들은 소설 쓰기와 같은 작업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것과는 배치가 되는 이야기라서 여기에 써놓기가 좀 어색하다.


예전에 돌핀 호텔이 꿈속에서 울고 있다는 "댄스 댄스 댄스"에서의 문장을 가지고 "칼 융"이 자신의 저서에서 지성이 세밀하게 발달한 사람의 경우 자신을 꿈과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건축물 같은 복잡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이야기를 인용하며, 하루키가 이와 같은 복잡한 내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한 서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또한번 놀랐다. 그 말이 맞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왜? 즐겁게 쓰면 안 되는가?


그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보자면 재능이 없는 상태에서 요령부득의 글들만을 쓰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뛰어내렸다는 가상의 작가가 나온다. 그의 입을 빌어서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엄청난 고뇌와 고민과 깊고도 넓은 문학계의 고정관념이나 관습을 추종하며 여기에서 요구하는 높은 기준을 넘어선 글을 써야만 하는 것이 지상과제가 되고, 억지로 쓰다시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되어 글을 써야만 하는가?라는 반문처럼 여겨지는 질문이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그런 기준에 사로잡혀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닐까?


내적인 필연성이 충만할 때 쓰는 글쓰기라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는 우리 각자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해야 하는 각자의 가정에 관계된 일이나 일하는 직장에 속해서 하는 업무에도 적용될 수 있는 힌트를 전달해준다.


그는 상을 받기 위해서 글을 쓴다거나 일련의 일본 내의 문인들이나 출판계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돈벌이나 생활을 위한 활동으로서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지만 부차적이고 본질적이지 않은 요식행위나 눈치보기, 관습이나 관행에 사로잡히기를 과감하게 탈피함으로써 비즈니스의 본질이랄 수 있는 높은 "수익성"과 "규모의 경제 효과(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일단 출판만 하면 바로 구매하는 충성도 높은 고객층과 글로벌 인지도)"를 충실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이렇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그가 작품의 수준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글이 팔리기를 바라는 온전히 "상업성"에만 사로잡힌 작가가 아닌 것은 이 과정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방법이랄 수 있는 신선한 문체와 작법,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각도의 잘 형성된 관점을 제시하고, "일인칭"의 글쓰기에서 "3인칭"의 글쓰기로 이동하는 20여 년에 달하는 길고도 주도면밀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소설 쓰기의 새로운 영역을 계속해서 개척하고 작품의 품질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높여 왔다는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읽는 것은 무책임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로 적당히 던지는 이야기들이다. 일본 바깥으로 나아가서 성과를 얻기 전에는 "일본 내수용의 번역체를 흉내 낸 조악한 작품"으로 그를 욕했던 사람들이 일단 해외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리니 "원래 일본 외의 해외에서 잘 팔릴 수밖에 없는 무국적의 작품"이라는 욕을 하는 앞 뒤도 맞지 않고 일관성도 없는 말들을 들어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문예나 문단이라는 사회는 급속한 디지털 문명화를 통해서나 대단위의 글로벌화를 통해서 붕괴해왔고, 더 이상 70-80년대의 문학관을 통해서 현재의 글쓰기를 지속해서 책을 출판하고 판매 성과를 낼 수 있는 유효성을 잃어왔다. 물론, 소수는 아직도 이 바탕 위에서 서열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마치 사양 산업과도 같은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지혜나 전통의 나름 확고한 깨달음과 역사적 소프트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의미가 있는 대로 그대로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에 인정받거나 이해받지 못한다고 해서 글쓰기가 필요 없어질 이유는 전혀 없다. 그것은 하루키뿐만 아니라 수많은 현실의 작가들이 증명해왔고 증명해가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 좀 더 정확하게는 소설 쓰기나 기타 작문을 하는데 대한 여러 가지의 책들이 있고 강의도 있다. 물론, 사업계획서나 기획서, 광고문안, 프레젠테이션 문구 쓰기 같은 보다 업무 기술의 향상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한다면 아마 직장인인 나로서는 돈을 내고 충분히 받을 가치가 있는 교육일 것이다. 또한 베스트셀러 쓰기라든가 좀 더 단기적인 수익과 매출의 확대를 위해 필요로 하는 지점에서 효율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교육도 순전히 사업적 관점에서 글쓰기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하루키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 하나 있다. 그렇게 쓰고자 해서 배운 글쓰기의 생명력이나 효과는 사실 "오리지널"이 되기에는 미약한 것이라는 점이다. 좀 더 쉬운 말로 풀자면 글을 쓰는 이의 "나다운 글쓰기"는 될 수가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래가는 생명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돈"을 장기적으로 많이 벌기 위해서는 소설을 써서 팔고자 하는 사람이나 또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팔고자 하는 사람은 (또는 기업)은 최고(The Best)가 되기보다는 유일무이한 존재(Only One)가 되기 위해 몰입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나와 같은 비즈니스맨에게 던지는 무게감 있는 메시지인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지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업무 성과를 만들고,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떨어지거나 손상 입을 수 있는 품질을 지속적으로 즐겁게 자발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것도 수십 년 이상.


다만, 소설이 말 그대로의 비즈니스와 다른 점은 진입장벽이 거의 없는 링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볼펜 한 자루와 노트 또는 컴퓨터 한대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다. 다만, 전업 작가라든가 글쓰기로 먹고사는 존재가 되는 것은 거의 넘사벽의 영역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물론 일본처럼 풍부한 내수 독서 인구가 있는 나라에서는 어느정도 도전해볼만한 영역처럼 보인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말한다. "링 위로 올라오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아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