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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Dec 09. 2015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아우라>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불렀던 것이 되는 순간 이미 사라졌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라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은 사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에 검색을

해서 확인한 내용으로는......


아마도 오래전 내가 보았을 때의

기억이 내 멋대로 다른 제목을

지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소설집의

내용이 고집스럽게도 내가 기억한

제목에 더 맞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제목으로 이해해야만 내 감상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제목을 오해했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감상이 나왔기도 했고......


보통 이런 고집이 사람을 망치곤 한다.


소설은 옴니버스 단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써

한편 한편이 현실의 일상을

거의 완전하게 소설화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끊임없이 과연 현실의 일상에서

(물론 미국 사회의 중산층 정도의

상황이 나오는 소설이라 그 일상은

우리 일상과는 다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의미가

얼마나 "머리"와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들과 다르게 이루어지고

이해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깨달음이 있고, 사람을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이끌어주는 글이 있고,

말이 있으며, 경험이 있다.


때로 그 언어들로부터 먼 곳에서

오랫동안 지내다 보면

자신의 생각이 일종의 지옥 속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내용들이 이 단편집에서는

여러 번 반복된다.

절대적으로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것은 진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평범하여

마치 오랫동안 신었던 양말이나

때가 탈 정도로 오래 손목에 차고 있었던

시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이고

밝은 세상의 면모를 보려고 노력하더라도

끝끝내는 자기 자신을 그 방향으로

이동시킬 수 없는 어딘가에

"갇힌 상태"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품는 이미지나 관념의 보고는

다름 아닌 한계 지워진 정보와 경험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스토리가

우리를 유혹하고,

아무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상태에 도달해도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버리는

상황에 대해서 결국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 왔던 상태로

다시 되돌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러한 생각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키에

이러해야만 하는 것이었어...

그러니까 결국에는 이렇게 될 거구

그래야만 해...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안돼... 이렇게 되어야만

난 확실하게 안심할 수 있어..."

이미 이러한 공식을 깊숙이  가슴속에

받아들이고 나면

더 이상의 사랑의 의미에 대한 탐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일종의 지옥도를 그리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누군가도

이러한 패턴을 밟아

비슷한 상황 속에 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란 사실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면 누군가 미리 해놓은 말들과

누군가 이미 겪었던 경험,

그리고 문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일면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정보나 지식들에 대해 듣고, 보고, 읽어왔다.

그리고 다시금 그 정보나 지식들을 통해서

생각을 구축하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고 보니 세상은 분명히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이해가 되기 쉽도록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일면 얼마나 안심되는 상황인지는

여러분도 다시 경험을 되살려서

떠올려보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꺼내어 주지 않으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랑의 악순환, 지옥도와도 같은

생각의 설정 속에서 결말을 맞으면

그는 결국 일이나 취미, 술, 연민 등에

비중을 두면서 삶의 형식을

고정시켜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이 현상을 항상 놀라는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사람은 사랑을 염두에 두는 순간부터

어딘가 달라지곤 하는 족속이기 일수다.

그렇게 지나간 사랑에 배신당하거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사랑의 실상을, 물론 자기의 환경과

경험이 이끄는 범위에서의 사랑이지만,

체험하면서 그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결국 한 가지의 본질을 깨닫는다.

자기 자신을 가꾸지 못하는 존재는

결국에는 타인을 가꾸어주지도 못하고,

사랑을 하더라도 파괴적인 의미의

사랑을 만들어내기 일수이며,

궁극적으로는 사랑의 제대로 된 결실을

얻지 못하게 되기 마련이라는 것...

나 역시 나만의 지옥도가 있었다.

그 형상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빌헤름 텔이 화살로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맞춘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심장을

겨냥하게 되는 경우라 할 수 있었고,


때로 그것은 내가 타인에게 날리는

화살일 수도 있고, 타인이 내게 겨누는

화살일 수도 있었다.

그러한 화살에 심장의 어느 부위가

 도려내어지면서 천천히,

난 사랑에 대한 회의에,

그리고 삶의 불가해한 속성인

상대적인 인간 간의 가치 변화,

느낌, 현실의 변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이 생겼다.

굳이 먼저 한계를 그려놓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가끔은 남들이 어렵다고 얘기하는 책을,

나름대로 어렵게 읽어내리곤 했었다.

그러면 누군가는 물었다.


이 책을 "다 이해"하면서 보고 있는 거냐고..

하지만 그 질문 자체가 우스웠다.

이해 못할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명히

당장 이해 못함을 대체할 다른 상상력이나,

잠시 판단을 보류한 상태로 넘어가면서

난해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대해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인데...


"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예 읽지를

말아야 한다는 내부 규칙에 얽매여 있음에

쓴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깨달음의 결실이었다.

그것은 그만큼의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한계에 대한 근거 없는 범위

정하기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물론 명확히 되고 안되고의

분명한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해 못할 사람인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지,

읽을 수 없는 책인지,

그나마 어느 정도 건져낼 수 있는 책인지는

만나보거나, 사랑해보거나 읽어보아야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건 미리 판단될 문제가 아니다.

절대로 그것은 이미 자기 머릿속에 그려진

그대로의 상황으로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 이전에 있었던 먼저 생각의 범위를

한정 짓기 좋아했던 나의 경향은 결국 의미 부여에 대한 회피나 침묵으로 이어졌었다. 사랑에 대한...


모호한 상대성의 세계,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와

의미부여의 변질 과정을 지켜보다...

사랑에 대해 몇 자 적는 것마저도

완전히 포기하곤 했었다.

그러나 사랑의 원형이 무엇이던가...

그것만은 붙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우라"... 푸엔테스의 작품이

아름답고 바늘처럼 찔러대는 언어로

풀어헤쳐 놓은 사랑의 모습은

절대로 그 이상으로나 그 이하로

떨구어져 나가지 않는 결정판이다.



그 속에 있는 문장만이 사랑에 대해서

나의 사유와 행위를 고정시킬 수 있는

일종의 정책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그것은 결국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기울이는

생각으로부터 온다.

"내가 그녀에 대해서 생각을 기울이면

기울인 만큼 그녀는 점점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원형은 그렇다.

결국 나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종합해나가다 마주친 진실은

다름 아닌 그것이다.


"내가 그녀에 대한 생각을

게을리하거나 진정한 그녀의 모습을

벗어난 생각에 잠겨 있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점점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것은 나의 문장이다.

때로 그 멀어짐의 속력은

세상 그 어느 존재의 빠르기도

능가할 수 없는 상태에 돌입한다.

멀어진 사랑에 대해 떠올려보며...

내 마음 저편으로 사라져 간 사람들을

하나씩 되돌려본다.


가슴이 아프기보다는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가 내 입술에 번져간다.

그들은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서둘러 떠나갔다.


그리고 그들 중에 누군가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누군가는 깨달음의 과정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실상 "불렀던 것들"이 되어버리는

그 순간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이다.


그러나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했던 것은 온전하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고정된 생각의 형식을 벗어난

받아들임이다.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남겨두고 바라보기,

이해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며

더 삶을 경험하고 느껴보는 것.


이것이 멈추어 있다면,

이미 죽어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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