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의 신개념 국가 선포 스토리
"침묵의 함대"라는 만화를 본 사람이
최근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만화는 1988년도에 연재를 시작해서
1996년까지 연재를 진행한 장편의
작품이고, 일본 국회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일본 내부에서도 파란을 일으켰다.
이 만화가 한창 잘 나가던 때는
마치 최근에 "진격의 거인"만큼이나
센세이션이 일어나서, 국내 언론은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작품"이다라는
우려와 비난을 작품 초기에 했었다.
하지만 이 만화의 후반부를 보게 되면
군국주의와는 상관없이 함장 개인의
무정부주의적, 곧, 아나키즘을 담아
탈국가적인 이념을 표방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후반부에는 일본 핵잠수함이
미국 본토까지 진출하는 내용이
2차 대전을 복수하는 것처럼
나오기에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당시 애니메이션의 최고봉에 올랐다.
그 이후로도 잠수함 소재로는 이만큼의
강렬한 극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핵잠수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중에
한 편이라도 즐겁게 본 적이 있었다면,
이 만화를 흥미진진하게 보는데
큰 장애는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는 하루키, 류,
마사히코, 겐자부로가 있다.
그들의 작품 안에서 엿보는 것은
일본이라는 사회의 취약성이며
이를 비판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은 범인류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이 만화의 작가도 그러한 작가였다.
침묵의 함대도 초반 이러한 풍의 비판부터
시작한다. 일본의 썩은 정치 풍토와 더불어
열강에게 차별받고 열세로 몰리기 일수인
불안정한 나라로서 일본이 그려진다.
자각을 토대로 만화는 승승장구하는
잠수함으로 하는 전투 능력 일인자인
주인공 함장의 분투기를 그려나간다.
차가운 이성과 독특한 카리스마,
열강들의 정치 역학에 대한 묵시적 이해...
일본과 미국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잠수함 '야마토'(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가라는 말로 비난을 받게 된
주원인이 되는 이름)가
일본인 승무원들을 태우고서
대양에서 무단으로 이탈하면서
"야마토는 하나의 국가이다"라는
기상천외한 선언을 하는 것이 전반부다.
그리고 그 목적은 결국 지구상의 전쟁의
종말을 이루는 체제, 각국의 핵잠수함들이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 심해에서 활동하며
핵을 무기로 주변국을 위협하는 국가들의
전쟁방지를 주도한다는 유엔의 이념 및
유엔 기구와의 합작을 기반으로 하는
전쟁방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핵 잠수함들이 정치적인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심해에서 아무런 위협 없이
바다 위에 있는 상황들을 통제한다는
착상을 주인공인 함장이 하기에 이른다.
이 핵잠 야마토는 만화 종결부에
이르러서는 미국 본토의 뉴욕까지
진입하게 되고, 유엔 회의에서
가이에다 함장은 연설의 기회를 얻는다.
패전국으로서의 설움을 만화로써
철저히 뒤집은 것이라고 보이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와 이념은
철저히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
발끈하는 느낌이 들 미국인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실제로 "Silent Service"라는 제목으로
영문판 애니메이션이 미국에 수출
되기까지 했었다.
이 작품이 성공작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일본의 강점기를 겪었던 국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만화에 칭찬을
하게 될 정도로 매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현실적이고도 세부적인 정보를
세밀하게 가공하여 감탄을 수시로
자아냈을 뿐 아니라 감정적인 면을
자극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일본 국민들만으로 한정하지 않는
영리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국주의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
주인공 함장의 냉철하게 다듬어진
이성에 대해서 저항할 구석을 느낄 만큼
어눌한 부분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도
매력을 더하는 요소이다.
만화라는 장르가 공공연하게
전 세계의 주요한 문화의 장르로서
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또한 이 와중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가 열광할 정도로 확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만화 자체의 세계에서만 끝나는
만화가 아닌 메시지가 바로선 만화
그리고 그 바로선 메시지를 곧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체계적 정보의 결합을
작가적 정신을 가지고 이루었기 때문이다.
2000년도에 이 만화를 열심히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정보를 제공하는 장르나 형태,
그리고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였다.
점점 더 많은 정보를 통해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사람을
반기고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가 된 것이 지금이지만
그때만 해도 사고의 범위는 협소했다.
(하지만 다시 편협하고 갇힌 사고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움직임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경계심을 느낀다.)
장난감이나 만화, 소소한 취미에
대한 깊고도 넓은 이해가 이제는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이 시대는 주류라는 명칭을 단
문화의 하위 장르나 산업, 형식,
체계들만이 무게를 갖지 않는다.
침묵의 함대는 잠수함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정보들을 하나의 선 굵은 이야기로
엮어낸 주도면밀함으로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오래가는
고유성을 가진 작품으로 남았다.
이 만화는 그러한 고유한 존재가
되라는 메시지를 함장이 세계를
향해 선포하는 방식으로 전달한다.
이 세상의 일상화된 모든 것들로부터
"독립하라"는 외침을 전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국가주의나 정치적 이념, 각기 다른
사회적 조직에 함몰되어 타인의
생각과 세계관을 맹목적으로 자신의
것과 일치시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각기 다른 존재인 사람들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나 자신부터 온전히 독립하여
각기 독립적인 존재로서 사유하고
행동하며, 진정한 조화와 창조적인
사고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집단에 함몰되어 몰려가는 것보다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길이 될 수 있다.
뿔뿔이 흩어지고, 서로가 문제아들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서 연대하여
살아가자는 이상이 나온 것이다.
국가 주의의 탈피가 평화의 방법이다.
이건 존 레넌의 "Imagine"가사와 같은
내용이기도 하다.
함장은 이 같은 연설을 마친 뒤에
회의장에서 저격을 당한다.
작품은 현실의 완고함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만화의 자각은 그때만 해도
전 세계 대중에게 환영받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런 자각이 흐려지고 있다.
단카이 세대로 불리는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세대와도 유사한 대 인구 집단이
잠시 일본 정권의 변화까지 이끌었었는데
어쩌면 이 작품도 이 세대가 젊었을 때의
약동하는 사고의 일면을 비추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이 걸려 대중화된 이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이 시대에
다시 이 이상의 변주를 제대로 해 낼
작품이 어디선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잠수함처럼 어딘가의 심해에 있기를
기대해본다. 침묵이 그대로의 침묵이
아니기를......
(사족: 연재의 시점은 일본 경제의
버블 시점과 냉전이 끝나면서
두가지가 겹치는 시기였기 때문에
스토리가 변화할 수 밖에 없었다는
배경도 있다. 일본이 버블 경제
상태로 남아 있었다면 세계 제 2위의
경제대국에 맞는 다른 스토리로 변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극화의 주제는
일관성 있게 "독립하라"였다.
주어가 설사 달라졌다고 하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