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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un 18. 2018

<세월호에 대해 썼던 글>-국민의 복수

이번 선거에서 이긴 쪽은 국민이다. 한 줌뿐인 정치 세력이 아니다.

뜬금없이 늦게서야,

벌어진 어떤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곤 한다.


2018년 6월 13일, 역사적인

선거가 끝난 이후 5일이

지난 지금에야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승리자는 국민이었다.

이념도 아니고

정치 집단도 아니었다.


수십 년간 어수룩하게

언론과 정치 공작과 쇼에

휘둘렸던 이들이

이제는 그런 트릭을 스마트폰에

띄워서 다 보고, 기억에서 잊힐

사건을 다시 꺼내서 추적하고,

추리할 수 있게 되면서

바야흐로 쉽게 당하지 않는

현명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살고자 하다 보니

어떤 싹을 잘라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2014년의 8월에 썼던 글을

아래에 다시 가져와서

보여 드리고자 한다.


그때 이미 우리는 알았던 것이다.

우리를 정말로 위태롭게도 만들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는 사람과 집단이

누구인지를.



세월호에 대한 늦은 단상

2014년 8월 18일 다음 블로그에서 씀
2018년 6월 18일 브런치에서 고침
“이 나라는 국민이 아무리 많이 죽어도 최고 통수권자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닐뿐더러 정부가 책임지고 사태 수습을 하고 같은 일이 벌어질 근본 원인들을 찾아 해결하는 나라가 아닌 것은 아닐까 싶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자살자가 수년 이상 OECD 최고 수준이고, 교통사고 사망자도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세계 2위 수준이다.

자살이나 교통사고 사망자가 많은 현실이 계속해서 전혀 개선되지 않는 것도 참 이상하지만, 당장 수백 명이 죽어도 그 앞서 죽어간 사람들 사이에 단순 사고로 파묻고 싶어 한다는 것은 누가 얼마큼 죽어 나가도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마치 상식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생명 경시의 사회에서 이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만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

경제 발전은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것이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선택해야 하는 길은 이제 무엇이 되어야 할까?  


세월호에 관한 뉴스를 많이도 보았고, 여러 사람들이 공유한 트윗과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의견을 계속 봐왔다.


침묵해도 좋을 만큼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분노했다는 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며,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이 행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어떤 변화가 있을게 분명하다고 순진하게 믿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몇 번의 기대를 벗어난 선거 결과와 변화 없이 그대로 흘러만 가는 상황. 변화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만 같은 정체된 이 사회의 모습이 일상화되는 것을 지켜보다 보니, 뒤늦게 이제야, 단 한 두 사람만이라도 볼 수 있는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내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이곳에 써보고, 다시 보고,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비겁했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 내게 솔직했다는 증거는 남겨두고 싶어 졌다는 것이 "나답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잊지 못하고 저주하는 것보다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시스템이 방치되고 있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 평범한 사람조차 절대로 잊지 못하고 계속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아래처럼 적어 두고,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으로부터의 글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더 무서울 수 있다. "가장 대중적인 것이 가장 위대하다"라는 문구가 있고, 이 가장 대중적인 것은 또한 확산 속도와 범위의 측면에서 특별하고 첨예하고 고급스러우며 귀족 취향적인 것보다 훨씬 강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사고로 인해서 죽었다. 더 나쁜 것은 이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 제대로 꽃도 펴보지 못한 생기 넘치고 앞으로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한 청춘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무엇보다도 이 비극이 더더욱 안타까움을 주는 이유이다.
 
인생의 20퍼센트도 아직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는데, 최근에 언론에 나오는 이야기는 기껏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가 벌어진 것이라며 단순한 사고사로 상황을 무화시키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족의 분노와 슬픔에 의한 행동들을 정확히 유족들이 주장하지도 않았던 과대 배상 문제로 왜곡하고, 폄하하여 해석하며, 유족 전부를 파렴치한 사람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적지 않은 사람의 참으로 가당치 않은 생각이 앞 뒤 가리지 않고 전달되고 있다.
 
왜 그 생각이 가당치가 않은가 하면,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다면 자식이 죽어 슬픈 사람조차 위로받아서는 안된다"라는 교육을 우리가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큰 인재로 인한 사고가 벌어졌을 때 이 원인들을 똑바르게 파악하고 관련자들을 발본색원한 뒤에 처벌하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 실행하는 것이 언제나 올바른 일이다"라고 배워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국민감정이나 정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나 정서를 가지는 것부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세월호 사건 당시 지지율이 40%로 급락했을 때 현 국가 최고 통수권자가 피해자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고, "해경 해체"라는 드라마틱한 전시적인 처방도 볼 수 있었지만, 세월호 사고의 근본 원인이었던 것처럼 매스컴에서 지목한 유병언이 사망한 것으로 공표되자 지지율이 다시 상승하여 이후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둔 후에는, 40여 일간 금식하며 눈물 흘리셨던 분과의 소통을 요청한 유족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무시하며, 지지율 떨어질 때 눈물 흘리며 공언했던 약속들이 유야무야 이행되지 않고, 아무 조치 없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아래에 순진한 도덕적인 판단 기준의 언어를 () 바깥에 쓰고, 한국 사회에 지금까지 잘 적응한 사회인으로서의 언어를 () 안에 쓰겠다.


1. 진심으로 이 나라의 지도자가 슬퍼하고 (혹시 안 슬프다고 하더라도 슬픈 척이라도 어느 정도 기간은 유지하고),


2. 이러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원인들이 방치되었던 다양한 상황들을 주도면밀하게 돌아본 뒤에 (돌아보다 손해 볼 것 같으면 적당히 돌아보는 시늉이라도 하고)


3. 원인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객관화시키며, 납득할 만큼 투명하게 밝히며 (그렇게 하기 싫다면, 지나치게 세세한 조사기록과 수치를 광범위하게 작성해서 도저히 파악된 사실들로는 어떤 결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내용이라도 공표하고)


4. 교정하고 문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근원적인 해결책을 만들고 (그런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면, 차선책이라도 분명히 내놓거나, 적어도 해결책을 고심하고 있다는 언론 플레이라도 열심히 하고)


5. 책임자들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히 처벌한 뒤에 (최소한 책임을 지게 하고 잘랐던 총리를 지지율 다시 오르는 것 같다고 불러들이지는 말고, 관련된 사람들 중에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충성도 높은 사람들이라도 잘라내는 시늉이나마 하고)


6. 해결책을 만들어 나아가는 등의 일련의 구체적인 순서에 따라 (뭔가 체계적이고 정부의 일처리 수준이 매우 프로답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어떤 제스처들을 제대로 보여주는 듯한 방침들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이를 실행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관련해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지도자의 진실된 슬픔 표명과 주도면밀한 문제 상황 파악과 투명한 공표, 근원적인 해결책, 엄중한 처벌, 해결책의 실행 중에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도덕적인 판단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로 보인다 (대중에 대한 세밀하고도 정확한 마케팅 기술 또는 지식이 없으며, 이 부분에서 분명히 대량 실점을 낳고 있다).
 
결국 벌어진 사건과 사고에 대한 원인 파악과 해결책, 그리고 슬퍼하는 국민들을 위한 시선이나 눈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국가 최고 통수권자와 그가 속한 정당의 지지율을 갑작스럽게 떨어뜨리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지율" 이외에는 그 대단히 높으신 분을 움직이지 못한다. 하나 더, "선거에서 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없이는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큰 피해를 당한 국민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던가, 정말로 진심으로 지도자를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존경심으로 따르게 만들 정도의 정치적 행위를 구상할 생각이 없고, 계속해서 나타난 상황들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처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당면 사안의 경중이 일어난 그 상황 자체의 경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자체로부터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지지율"에만 노골적으로 묶여 있다.
 
국민이 지도자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리서치 기관에서 나오는 "지지율"을 큰 폭으로 움직여주는 것밖에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의 1조 2항을 지금쯤이라면 이렇게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최고의 권력을 보유한 사람에게만 있으며, 그 권력은 국민의 지지율로부터만 나온다".


이상하게 느껴져야 하지만 이런 조항이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이상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 나라는 국민이 아무리 많이 죽어도 최고 통수권자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닐뿐더러 정부가 책임지고 사태 수습을 하고 같은 일이 벌어질 근본 원인들을 찾아 해결하는 나라가 아닌 것은 아닐까 싶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자살자가 수년 이상 OECD 최고 수준이고, 교통사고 사망자도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세계 2위 수준이다. 자살이나 교통사고 사망자가 많은 현실이 계속해서 전혀 개선되지 않는 것도 참 이상하지만, 당장 수백 명이 죽어도 그 앞서 죽어간 사람들 사이에 단순 사고로 파묻고 싶어 한다는 것은 누가 얼마큼 죽어 나가도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마치 상식인 것처럼 통용되어야만 한다는 것 아닌가?


생명 경시의 사회에서 이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위만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이 현실이다.


경제 발전은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것이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도 사람답게 살고 싶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선택해야 하는 길은 이제 무엇이 되어야 할까?  

(2014.08.18)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제대로 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왜?

제대로 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길에 이제야

제대로 접어든 것이다.

(201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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