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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r 24. 2019

*무비 패스 <우상>-허상으로 남기 위한 폭주

무엇이 우상화된 인물을 극단까지 몰아 가는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영화를 보신 분에게

제 감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롯데월드몰 시네마의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에서 본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올리는 중입니다.


아이가 있는 가장으로서 “우상”이란

영화는 사실 편하게 볼 수만은

없는 스토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5일 정도 지나서 다시 스토리를

떠올려보니 결락된 부분은 많았지만

이 영화는 재미보다는 생각할 기회를

던져주는 나름 가치 있는 영화가

분명 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부감이 많은 평들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이런 극단화된 스토리를

택한 데에는 이 사회에서 정말

일어나는 현실 속의 스토리가

영화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경우가 눈 앞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영화가 현실의 거울이라고 한다면

우리 일상 속의 비참은 그곳에서

아무리 잘 그려내려 해도

똑같이는 나타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모두가 인정하는 정점에 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걸 잡았다고 느낀 남자.

그에겐 흐릿한 목적의식은 없다.

많은 이야기로 그의 욕망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기에

그러한 탐욕스러움은 후반의

스토리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에겐 그 어떤 피해자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는 현실성의 블록버스터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의 음향

영상, 스토리, 연기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한 동작 한 동작,

하나의 대사와 이에 따르는

대사의 중간중간, 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길만한 요소를

최소화하는 꼼꼼한 디테일이

블록버스터 작품에 있는 것들

이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관객은 철저하게 한석규와

설경구, 천우희 3인의 시점에서

종합된 정보를 토대로 영화 속

현실을 이해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길을 잃게 되는 부분은, 너무 정확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하얼빈식

조선어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귀를 들이대어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고통스러웠던

짧지 않은 씬들이다.


실사 녹음의 최첨단화 때문인지,

음향 효과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인지 또렷하기

그지없는 모든 소리 중에 그 말들만

의도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잘 안 들린다.)


그에겐 그렇게 어려울리는 없었다.

쉬워 보였다. 그가 확신한다는 증거는

이후에 나오지만, 그의 반듯한 외모와

언변이 만드는 이미지에 대중이 쉽게

끌려온다는 것을 느끼기에 어려움은

없다. 결국 우상, 곧, 아이돌 화한 인물에게

있는 진실한 실제의 속성, 인격이라는

것이 어떻든 세상은 쉽게 넘어가 버린다.


그렇게 성공하기 위한 과정에 있어

가족을 어느 정도 이상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던 남자가 집에 들어온 그 순간

차고 속에서 비닐에 쌓인 낯선 남자와

차 주변의 피를 닦으며 울고 있는

그의 아내가 보이고 들린다.


이 시점에서 관객들은 팝콘을

유달리 많이 먹기 시작한다.

이 영상적 충격의 순간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왜 아들은 죽어버린 사람을 싣고

집에 온 걸까? 나를 끝장 내려고

하는 걸까? 끝장이 나지 않게

수습을 해야지...... 이 대사가

표정으로 흐르는 연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리라.


“나”가 가족이나 크게는 사회 속의

“인간” 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우상”이 되어 버린 그에겐 아들도

아내도 어머니도 그 어떤 존재도

중요하지 않다는 그의 인식의

전조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아들에게 말하는 남자에게

떠오른 자신의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의

최소화 방안은 아들의 자수다.

이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아내에게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응하지 못한다.

진심과는 다른 허위의 언어를

그의 가족이 모를리가 없으니까.


누가 죽었는지에 대한 안타까움도 없다.

그건 그들이 특별한 계층에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아내와 아들은 사체 유기를

통한 증거 인멸을 의도했었다는

정황이 뒤에 나타나게 되지만.


일면 도덕적 인척 아들의 자수를

종용하는 국회의원이자 도지사

후보를 연기하는 한석규의 목소리

톤과 연기는 이 시점까지는 아직

인간성이라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연기한다.

관객에게 정의 실현 스토리를 줄 것처럼 가지만 거의 모든 클리셰를 제거하면서 의외의 씬으로 이동한다.


이 이후의 폭주가 거침없이 이어지며

피해자로서의 정신지체아의 아버지 역인

설경구와 이 지체아의 애인으로서

불법 체류 중인 하얼빈 조선족 처녀 역인

천우희가 그의 인간성이 끝장나는

단계와 그 끝장난 인간성이 우상화되는

과정에 장애물처럼 등장했다가 오히려

조력하게 되는 결론을 맺게 된다.


이 영화의 명확한 주연은 한석규도

설경구도 천우희도 아니다. 물론 연기력

자체로 엄청난 잠재력과 강렬함을

터뜨려 낸 것은 천우희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영화 속 내용에서

제대로 악을 응징했던 것은 그 자체로서도

어느 정도 악인 그녀였기 때문이다.

날 건드리면 무사할 수 없어. 요즘 이런 인상 없이 제대로 조직에서 살아남긴 어렵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건 다름 아닌 대중의 비현실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완벽한 존재로

가공된 “우상”이다. 이 허상에

자신을 가 닿도록 만들었을 때의

허상에 닿은 존재로서의 자신.

그것이 이 영화 속에서 모두를

미치도록 폭주하도록 만드는

주연 배우의 자리에 올라 있는

주제이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한석규는

천우희의 복수 이후에도 살아남아

정체불명의 방언을 지껄이면서도

군중의 박수를 받으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그건 한석규의 배역이 승리해서

살아남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우상을 갈구하고 있으며

밝혀진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몇 가지 제대로 갖고 있는

“우상화”된 존재에게 덮어 씌우고

살아가기 마련이란 이야기이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믿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

자네, 예수야......’이 정도의 대사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로

나오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고어물에서나 나올 정도의

비참한 사체 씬을 보여주는 인물은

천우희 역의 언니 역할을 하는

하얼빈 조선족 출신의 배역이다.


설경구의 폭탄에 의해 목이 날아가버린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한석규를

도지사 선거에서 떨어뜨리나

스토리상에서는 그 이상의 논란거리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

외부적으로 분명히 논란을 낳고자 한

노이즈 마케팅 수단으로써의

혐의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 곧, “우상”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손상당하거나 잃게

되는 것이 가장 비참한 상황이란 내용이

영화 속 현실에서 반복됨으로써

이 현실의 세계에서 그 “면”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때로 폭주하며, 자신과 타인을

같이 망가 뜨리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깨닫게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 이 영화가 노린 명확한

주제의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마치 지금의 시류를

읽고 이 타이밍에 터질 사건들을

예상한 것처럼 나타났지만,

사실은 모든 현대 국가에서

극단화하여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언론사 관계자들이나, 고위 장관급

인사나,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나,

Kpop의 아이돌, 오디션이 낳은 행운아 등,

이 모두가 정당한 자격 없이 얻고자 하는

허상.


그것을 폭발시키듯 날려버리고

추악한 진실을 제대로 확인한 뒤에

명철한 시선으로 그들과 우리 자신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면

그 이상 이 영화가 줄 수 있는 혜택은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극렬한 호불호를

낳는다. 가슴속에 허상을 품고

우상이 되거나 우상을 추종해온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무척 불편하다.

하얼빈식 조선어는 어쩌면 의도적인

것일 수 있지만, 도드라진 단점으로

공격받고 있다.


하지만 아는가?

우상화될 수 없는 계층의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 하는 동시에 우상화된

자라면 그의 어떤 못 알아들을 말도

잘 알아들은 것처럼 이해하는 게

적지 않은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들이 양쪽으로부터의 폭력을

유발하고 있음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집단과 목소리를

아무렇게라도 낼 수 있는 양쪽으로부터

말이다. 한석규 배역의 거침없는

증거 인멸의 살인과 설경구 배역의

이순신 동상 테러, 천우희 배역의

가스 폭발 씬은 이 폭력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충돌한다.


우리가 보다 안전해지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남아 있는 질문인 듯하다.


사족:


이 영화 속의 과잉 이미지 같은

폭력 씬과 살인, 신체 절단 씬들은

사실 한석규 씨와 설경구 씨의

이전 출연작 텔미 썸딩, 용서는 없다에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좀 불편하긴 하지만 데드풀의

절단 씬들도 웃으며 봐 온 내게

불평할 이유는 없다고 느꼈다.


정치적인 논란은 최소화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목 폭파씬의

이미지는 살포되지 않게 되어 있고,

원전 반대를 하는 위원회를 가진

정당이 통합 자유당이란 명칭을

갖고 있어 좌우파 대립을 불러오진

않는 설정이다. 나름 치밀하다.


물론 나의 목소리도 영화 안팎을

떠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한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너무 많은 정보가 의미 있는 정보를

감추는 세상이다. 메가급의 우상을

만들어 내긴 어려워도 더 다양한

우상들이 즐비해진 이 세상에서

허상과 진실을 감별해 낼 수 있는

정보는 실상 낮은 곳으로부터

올라온다. 이미 허상화 된 존재가

자신의 부끄러운 낯을 제대로

드러내긴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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