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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pr 07. 2019

<극한직업>-관객의 현실을 위로하다

우리나라에서 경제 활동을 한다는 것의 터프함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았다면

보신 뒤에 읽어 주세요.


어떤 관점을 가진 관객이

어떤 영화를 보았는가가

영화에 대한 각기 다른

평가를 낳는다.


그러나 큰 흥행을 낳은 영화라면

그 영화는 수많은 관객의 관점을

제대로 포착하고, 대중성의 핵심을

제대로 꿰뚫은 작품일 수도 있다.


"극한직업"은 2019년 이 시점에

우리나라의 관객이 적지 않게

느끼고 있는 글로벌 경기의 하강,

직업 전선에서 이탈당하지 않을까란

불안감을 다독거리며 위로한 영화였다.


적성에 안 맞는 직업 때문에 인정 못 받고,

그 때문에 자영업 전선으로 몰려나가

결국에는 치열하게 생업 전선에서의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만 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부드럽게 집어서

어렵지 않은 스토리로 판타지를

심어주며, 기대하고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2천만 명에 육박하는 흥행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이 영화에는 항상 이런

평이 뒤쫓아 왔었다.


"이런 영화가 천만 이상 흥행을

할만한 작품은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흥행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 영화 시장에서

영화를 작품성에 근거해서라든가

장르적 완전성, 치밀한 연출력,

스토리의 참신성 등으로 평가하는

관객의 눈에는 흥행이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 적지 않게 있다.  


때로 그러한 관점을 가진 영화팬은

나조차 포함해서 '우리나라 관객의

눈높이가 낮다, 좋은 품질의 영화를

만들 토양이 아니다' 등의 부정적인

평을 남긴다. 이런 평은 이제는 흥행의

확산을 막기보단 오히려 확산시키기도

한다. 그 욕조차도 이 영화가 재미있단

것만큼은 최소한 인정을 했다.


반골 기질 때문에 남이 욕하니 오히려

봐야겠다는 비중도 생기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면서 동시에 욕도

먹고 있다면 도대체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궁금증도 만들어 낸다.


시나리오의 나름 참신성을 인정받아

콘테스트에서 선정된 이 작품은

약간씩 다른 스토리로 중국과 한국에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중국에서는 영화 속 형사들이 차린

음식점이 랍스터를 만들었고,

한국에서는 치킨을 만들었다.

음식의 종목이 적절하지 않았던 건지

중국에서의 흥행은 참담했지만,

한국에서의 흥행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1700만명의 명량 다음 2위다.


닭이 우는 소리가 마치

영화의 시그날 음향 인양

계속 반복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나오는 대다수의

자영업을 하는 분이 이야기 하는 다소

자조적인 표현이 "닭을 튀기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자영업 중에 "치킨집 창업"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창업==> 치킨집

공식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프랜차이즈라면 바로 나타나는

업종도 "치킨"이다. 이래저래 닭소리가

나와야 할 이유가 충분해진다.


"마약단속반" 업무를 하는 조직으로서

반장과 반원은 모두 상사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승진의 길도 오리무중인

곧 해체될 반으로 몰리기까지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관객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불안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감정을 이입하게 될

포인트가 하나 더 겹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아직은 적성에 맞게끔

적재적소에 적합한 인원이 배치되는

발달된 시스템은 갖추지 못한 나라다.


이 조직 내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듯한 마약단속반의 일원들의

어수룩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은

사실 길고 짧은 경력상의 차이만 있을 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뒤에 두각을

나타내는 소수를 제외하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지도 잘 모른 체, 그저

"생업"으로써 맹목적으로 일하면서

수시로 겪는 압박과 비난, 질책에

익숙하게 버티면서, 이른바 "존버"로

살아가는 적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마약사범을 잡기 위해 도청 중에 조직 내의 마약반과 강력반 간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마약반을 격렬히 응원하는 마약단속반 형사들의 모습이다.

앞서 가는 국가는 이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발달된

구조를 갖고 있다.


취업에 실패한다면 다시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가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물론, OECD의 특정 국가의 시스템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쩌면 무늬뿐인

참여국 같고.)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취업 시스템은

올바른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가는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엄청난 처우의 차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높은 급여의

차이,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보다는

기업의 규모와 유명세에 더 사로잡히는

사회적 시선에 체면을 손상당하는

현재의 구조에서, 재취업 과정은

인맥에 의한 이동을 제외하면 통상

사회적 신분의 하락과 연결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꿈과 동기와 삶의 가치를 투여해서

온갖 고통마저도 달콤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직장인의 수는 통계상 다른 국가에

비해 떨어지고, 적지 않은 회사원이

퇴사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이른바

"버티는 중"인 구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경기가 좋다면, 물론, 이런 구조하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조직을 이탈할 사람은

많다. 그러나 지금의 저성장 국면에서

그러한 모험은 여의치 않다. 용기 있는

소수만이 목숨을 걸고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을 떠나 치열한 창업의 길로

나선다. 그리고 적지 않은 비보를 알린다.


이 구조 하에서 살아온 반 수 이상의

직장인이 공감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입할 수 있는 극화가 신파가 아니라

코미디이므로, 관객은 불편함보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어떻게 이 코미디가

자신의 비참함을 결과적으로 위로해줄

것인가에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이 위태한 창업을 위태하게 몰린

"마약단속반"이 반장의 퇴직금을

털어 연 뒤에 벌어진, 기가 막힌

"수원 왕갈비 치킨집"의 대성공은

창업에 대한 불안감을 떠나서

본업에 몸담은 상태로도 시도해본

실험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안도감을

안긴다.

원래의 취지를 잃지 말자고 하는 반장이 치킨집이 번성하는 것에 품고 있는 만족감이 드러난다. 이렇게 몸과 말이 따로 노는 씬이 웃음을 유발한다.

사회안전망이 위태하게 세워져 있고,

자살률이 높은 이 무시무시한 나라안에서

알게 모르게 사선을 걷고 있는 불편함을

가진 적지 않은 관객에게 이런 소 뒷발에

쥐 잡는 스토리는 그 자체로 자극적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나서

그렇게 솔직한 이야기를 하지는 못한다.

왜냐면, 우리는 설사 평가를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매일매일 경험해도

이를 드러내서 자신의 "면"을 손상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영화 캐스팅에 반장이 "배달의 민족" CF에

나오는 배우여야 했을 이유도 적절하다.


이하늬의, 자신의 육감적 매력을 최대한

억누르고,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혼신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다소곳함과 더불은 모순적인 섹시미도

연기해야만 하고 그런 여자 앞에서

들어맞는 멋지고도 세련된 남성성을

연기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결혼

적령기의 남녀의 꾹꾹 눌린 진정성을

개방시킨, 역할도 흥행의 큰 이유다.


이들을 포함한 나머지 모두의 연기와

후반부의 "어벤저스"급의 격투씬은

허술했지만, 억눌린 우리나라 직장인과

자영업자의 심정에 대한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운 자영업자"의

승리가 나왔고, 직장에서 설움 받았었지만,

사실은 하나하나 일당백의 특별한 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황당하고 작위적인

결말 씬이 급격한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결론을 만들지만, 이 허술함마저


그렇게 치밀하지 못하게 살고 있는

관객 대부분이 이미 앞서서 허술한 척

"치밀하게 위로해준" 영화의 편에 서게

되면서 오히려 큰 지지를 받았다.


"투캅스"나 "공공의 적" 같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았던 형사물이

다시금 이전에 내가 비난했던 영화의

목록에서 다시금 우리나라 안에서

"위대한 대중성"을 발휘한 영화로써

"극한직업"과 함께 계보를 잇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어쩌면 나도 나이가 들었고,

어쩌면 나도 더 이상 치밀하게

영화를 볼 수 없는 연배의 나이만 먹은

직장인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흥행의 배면에

위치한 것은 진지하게 사회적 모순을

공격하는 "우상"같은 영화보다 더

이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드러내고

마치 살풀이처럼 "한"을 풀어낸,

문제 해결은 아니지만, 성공적으로

문제 제시를 한 "참신성"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가 위태로운 국가의

제대로 된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

해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야 하는

작품은 아닐까?


"투캅스"와 "공공의 적"이 제기한

그 시대에서나 지금에서도 상존하는

문제는 정치와 치안이 부정한 세력과

결탁해 있는 이 나라의 치부였고,

그것은 지금의 시대에 와서 대중들로부터

여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가게끔 하는

단서로 작용했었다.


"극한직업"이 제기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직장인과 소상공인에게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사회 안전망의

위태로운 모습이다.


그곳에는 적성에 맞는 인적 자원 관리와

재취업을 위한 제대로 된 시스템이 없이,

그저 실업률 수치를 관리하기 위해

"개인의 행복"과는 상관없이 국가

중심의 관점으로 세워진 형식적인

구조가 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위태한 창업을 해야만 하는, 적지

않은 수많은 사람을 필사적으로

만드는 취약한 사회 안전망이 있다.


영화에서는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극화를 경험한 수많은

우리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이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남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남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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