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플리카>-예상외의 재미

키아누 리브스 연대기와 더불은 레플리카 감상

by Roman

그렇지요. 여기에도 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독일의 뮌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다.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변함없이 영화를 한편이라도 보기 위해

스크린을 열어 목록을 보고 하나씩

화면을 내려가는데, 언제나와 다름없이

그렇게 썩 보고 싶은 작품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런데 마치 “매트릭스”의 현실 실사화

버전 같은 분위기로 제2의 흥행 역사를

쓰고 있는 “존 윅” 시리즈에서 다시

자신의 성공작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재탕하고 있던 “키아누 리브스”가 나온

작품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게 “레플리카”였다. 흥행 유무를

떠나서 대중의 관심조차 제대로

끌지 못했던 이 영화를 보기까지

내 속에서 이뤄진 연상작용을

조금 써보려 한다.




“키아누 리브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


줄기 장창 그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보았다는 팬심을 드러낼만한 관객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나온 작품 중에

특기할만한 작품을 점점으로 봤다.


최초의 작품은 “엑설런트 어드벤처”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나름

연기 공부나 영화 데뷔 전의 필모그래피가

진지하고도 엘리트에 가까운 그가

최초로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출연한

이 작품 속의 그의 모습은 30년이

지나도록 기억난다.


1989년작으로 나름 흥행 성공했었다.

여기에서 그는 정말 찐따스럽고

바보스러운 사춘기 소년의 어리숙함을

한껏 드러내 주었다. 지금의 이미지를

생각해보자면, 이 영화는 흑역사에 가깝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나름 괜찮은 흥행은

그를 다른 작품으로 제대로 인도해 준

고마운 시작이었을 것이다.


1991년 작 내 마음속의 아이다호는 당시에 나름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그다음 기억나는 작품에서 그는 당시에

그렇게 큰 유명세를 구축한 배우는

아니었음에도 “리버 피닉스”라는

절정기의 핸섬함과 유명세를 누린

배우의 상대역 배우로 나왔다.


이후에 “리버 피닉스”가 요절했고,

“키아누 리브스”는 마치 이 영화를

통해 인기를 계승이라도 받게 된 듯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심심찮게 만들어지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퀴어물”이었다.

독립 영화였지만, 관심도는 높았다.


“키아누 리브스”는 “리버 피닉스”와

함께 동성연애를 하며, 방랑을 하는

인물로 나왔다가, 말끔하게 변신을 하고

이성애자로서 제대로 된 신분을 가진

제도권 안으로 돌아가는 역할을 해냈다.


이렇게 제도권과 비 제도권의

경계를 오가는 이미지가, 이후에 나올

“매트릭스”의 주인공으로 “키아누”를

선정할 배경이 되었다고, 다소 비약이

있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바야흐로 “폭풍 속으로”가

그를 액션의 세계로 제대로 초대했다.


1991년작으로 패트릭 스웨이즈의 강렬함을 계승 받는다.

이 작품은 수년 전에 2편 형식으로

제목과 형식만 유사하게 적용한

형태로 “키아누 리브스”가 맡았던,

강도 조직에 잠입한 경찰로서 두목과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고 감화되었지만,

결국에는 그를 배신하는 역할을

“키아누 리브스”보다 좀 더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배우가 했음에도 큰 흥행은

이루지 못했다. 그 배우에게는 “키아누”가

가진 초월성이 보이지 않았다, 덩달아

“구루”처럼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두목도

“패트릭 스웨이지”의 영혼이 담긴 듯한

강렬함을 뿜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로 리메이크나 리메이크 속편이 더

성공하는 경우가 있지만, 돌아가신

“패트릭 스웨이지”와 “키아누 리브스”가

만들어낸 풋풋한 “원형”에 가까운 이미지는

쉽게 카피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전 부인인

“캐서린 비글로우”의 재능이 “적은 제작비

대비 큰 흥행 수익”을 낳은 뛰어난 작품

이기도 했다.


그다음 그가 갖고 있는 철학적인 인상의

깊이를 강조한 “리틀 부다”를 넘어서서

그가 갖고 있는 초월적인 인상이 결합된 1993년작이다.


이후의 작품이 그를 액션배우의

최상 수준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1994년작으로 그는 최고 수준의 액션 배우로 인정받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 이후로 짧지 않은

시간, 제대로 된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카메론 디아즈”와 공연했던 약간 어설픈

로맨스 “필링 미네소타”와 재기 넘쳤지만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스토리의

“체인 리액션”이라는 액션물을 오갔지만

그는 “스피드” 이후에 추락하고 있는

다작 배우의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리틀 부다”와 “스피드” 이 두 영화를

“매트릭스”를 만들었던 감독(들)은

분명히 주의 깊게 보았을 것 같다.


워쇼스키 자매는 동양적인 이미지를

영화 속으로 끌고 오는 것을 중요시

하곤 하는데, “키아누”의 흑발은

언뜻 그를 아시아 계통의 배우처럼

보이게도 하기에 캐스팅에 중요한

이유였던 것 같았다.

1999년 세기말을 다룬 영화 중에 이 영화만큼 강렬했던 영화는 없었다.

왜냐면, 3부작까지 줄줄이 이어진

이 작품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이 두 영화에서 드러낸 이미지인

“초월성”과 “섬세한 액션”, “로맨틱함”은


이 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서 거의

필수에 가까울 만큼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키아누 리브스”를 대체할

배우를 이 영화에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다. 또 다른 백인도 아시아인도

흑인도 중첩되지 않는 고유의 배역이다.


“초월적”인 동시에 “세속적”이라는

경계를 오가는 배우로서 독보적인

경지를 갖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난 널 죽여야 돼, 그런데 그 이유가

그렇게 설명하기 쉬운 이유는 아니야”라고

말하고 총을 쏘던지, 팔다리를 격하게

움직여 가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으면서,

무게감 있는 배우가 된 것이다.


연발로 총을 쏘면 수많은 사람이 우수수

죽는 대량살상용 킬링타임 액션 배우와는

또 다른 영역을 가졌다. 극 중에서 그렇게

하고 있어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설득력이 있다.


2005년작 콘스탄틴은 매트릭스에서의 액션 이미지의 재탕이다. 그 때문에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의 작품이었다.

매트릭스 1/2/3이 모두 끝난 후

“콘스탄틴”은 그만큼의 흥행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대체 불가한 영역으로 자리 잡은

그의 “초월적인 액션”을 “퇴마사”로

보여줄 수 있었던, 나름 이미지 “해갈”을

가져온 작품이었다.


그다음의 10여 년간의 수많은 작품은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그저 그런 내용을

담고, 그저 그의 통장을 촉촉이 적시는

정도의 “일”로써 주어져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구가 멈추는 날” 한 편을

빼놓고는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쓰임새를 정확히 아는

감독이 마치 맞춤옷이라도 된 듯한

“존 윅”을 만들어 다시금 그의 “초월적

액션”을 “매트릭스”에서의 이미지를

다시 극대화하여 활용했다.

2014년작 존 윅은 노골적으로 “매트릭스”에서의 그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2편 제목을 보라.

전성기의 흥행 성적을 다시 가져오는 듯

“존 윅”은 그가 가진 흥행작의 이미지를

재탕하듯이 다시 가져오면서 “매트릭스”가

현실화된 것 같은 액션을 보여줬다.


심지어 “매트릭스 2편”의 부제가

“리로디드”인데, “존 윅 2편”의 부제는

“리로드”다. 3편은 이 지구 상에 어떤

의미의 화합과 평화를 ”혁명적으로”

가져올지까지 궁금해질 판이다.


영화 밖의 그의 현실도 남다르다.

그는 종종 지하철에서나 길거리에서

홈리스 차림으로 나타나는 배우로

유명하다.


그렇게 다니는 이유는 대략 이렇다.

“그의 애인이 유산을 하고 나서 그를

떠났고,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래서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홈리스 생활을 하고 있다.”


이건 살포된 무한대의 스타 이미지 중에

그의 이미지가 20여 년 이상 일정하게

관객에게 어필하는 중요한 이유다.


그 때문에, “존 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애인과의 추억을 가진 “개”를 죽인

조직 폭력배에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복수해도 일리가 있어 보이고,

말도 안 된다는 말을 못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 “레플리카”는 위에

이야기한 “키아누”의 이미지를

총합해서 만들어낸 “초월적이면서도

세속성이 결합된, 바이오 에스에프,

액션물”로 등장한다.



그의 대표작이 가진 이미지의

변천사와 그의 생활 속의 모습이

중첩되지 않는다면, “레플리카”라는

영화는 그저 뻔한 B급의 영화다.


개연성도 부족하고, 이야기의 치밀함도

약하며, 때문에 설득력도 적고, 화면조차

화려하지 않다. 그럼에도 “키아누”는

이 영화를 거의 혼자서 “하드 캐리”했다.


이제까지 그가 맡았던 역할과는

다르게 그는 인간의 정신을 복사해서

기계나 유전자 복제물로 이동시키는

과학자 역할을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매트릭스”처럼 자신의 정신을 가상으로

이동시켜서 다른 대상으로 들어가

“초월적인 액션씬”을 보여줬다.


극 중 초반에 폭우가 쏟아지는 밤

그는 아내와 세명의 아이와 더불어

보트를 타러 차를 몰고 가던 중에

불시의 사고를 맞아 자신만 빼놓고

일가족이 모두 죽는 비극을 맞는다.


이 부분부터 그의 공개된 일상사

스토리를 결합한 것이다. 그렇게 되니

마치 이 영화에서 그가 가족을

되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연구물인

인간의 정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마치 그의 현실 속의 불행을 다시

극복해보려는 노력처럼 보이게 된다.


“키아누”의 성공작 몇 개를 보고

노숙에 관련된 기사문을 읽은 관객은 이

시점에서 “영화가 참 허무맹랑하네’라고

말하며, 스크린을 끌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생체를 복제해서

수십일 내에 원래의 형상으로 복구시키는

기술이 나온다. 그의 영화 밖 속의

일상적인 비극이 해소되는 상황이다.


죽은 뒤에 수십일이 지나서 다시 이전의

기억을 갖고 되살아난 가족 중에

기계 복제 장치 수가 하나 모자란 탓에

막내 딸아이를 되살리는 것을 포기하고,


되살아난 가족의 기억 속에서 그 아이의

기억을 일일이 지우는 것을 선택하는데,

왜 자신의 기억에서 지우는 것은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할 겨를이 없다.


이 영화는 어차피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관객이 갖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아예 수많은 질문을 미연에 방지코자

한 것인지. 오로지 과학자로서 자신의

연구에만 치밀했지, 복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예상과 대비를 할 여유가

그 과학자에게는 없었다로 질문을

밀봉한다.


왠지 ‘노숙자 “키아누”가 연기한 과학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인 거지

잔 말이 많아’라는 내레이션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런저런 순진한 스토리의 진행은

“키아누”가 주연이 아니었다면,

그저 덜컥덜컥이는 고장 난 중고차가

달리는 것처럼 불안하고 엉성한

것이었지만, 정말로 그가 출연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가 성공적으로 가족을 되살리고,

그 과정에서 숨겼던 자신의 일탈을

회사의 고위 간부에게 들킨 뒤에

들킨 이유가 자신의 팀원의 배신임을

알게 된다. 안타까운 리더십의 부재다.

그만큼, 그의 이미지는 리더십과는

거리가 있고, 영화 속에서 그는 통상

자신을 배신한 적과 싸운다.


복제 재생 기술을 그저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하려고

하는 회사의 목적을 알게 된 뒤에,

군인과 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적들에게 쫓기면서, 완력을 지니지

못한 과학자인 그와 그의 가족이 붙잡혀

이 영화는 막다른 파국으로 흐르지만,

마치 예상이라도 되었듯이


그는 자신의 정신을 “로봇”으로

이동시켜서 “매트릭스”에서의

전자기적 접속의 또 다른 양상으로

현실 세계에서의 초월적인 액션을 하는

존재로 만들어 그와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적을 “가볍게” 처단한다.


해피엔딩까지의 과정은 그전까지

“키아누”의 성공작 몇 편을 잘 봤다면,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결론은

그 때문에 영화는 끝까지 볼만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으로는 물론 뻔한 작품이었다.)


그 이후에 군산 업체의 임원과

“결탁”해서 세속적인 성공을 하게 된

“키아누”의 정신이 복제된 로봇의

모습이 나오는데, 썩 자연스러운

결말이 이어지며, 희망차게 끝난다.


그런데, 그 대수롭잖은 결말이 의외의

통찰력을 가져다준다. 우린 심지어

깡통 덩어리로 들어간 우리가 익히 아는

누군가의 정체성을 그의 원래 외모를

떠나서도 기억해낼 수 있고 일치화할

수 있다는 내용 말이다.


기계에 이미 죽은 사람의 정신을 불어

넣어보려는 극 중 과학자 “키아누”의

시도는 계속 실패하는데, 그 이유는

로봇 몸체를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의 괴로움 때문에서였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의 정신을 복제된

신체에 주입해도 그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자 결국 정신이 자신이 로봇이 아닌

자기 몸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착각하게

만들 가상의 신체인식을 정신에 주입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착상을 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로 인해 자신의

카피된 정신을 넣은 로봇 안에서

“키아누”는 그 로봇을 자신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되는 동시에 로봇의 몸체가 가진

엄청난 파워로 적을 격퇴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는

불교적인 문구가 하나 떠오르게

되는데, 그 문구를 살짝 비튼다.

그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트릭에

의해서도 그 어떤 것이나 일은

일어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그와 연관되어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깨달음은 “키아누”라는 배우의 본질이다.

그 어설픈 극화 안에서 로봇에 주입된

상태일 뿐인 그의 정신을 가진 깡통 로봇은

또한 신체까지 일치한 그 배우만큼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른바 극화 속에서였건 극화 밖의

현실에서였건 배우나 배역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위의 이와 연관되는

이야기는 배우의 본질이 영화의 극화와

일체화되었거나 극의 이미지를 점령한

“매트릭스”와 “폭풍 속으로”같은 작품은

더 외관상 훌륭한 배우가 다시 영화에

출현해도 이전 원작의 매력을 능가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그 이유를 보여주는

작품이 이 영화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게만 보자면 “레플리카”도

“키아누”와 일체화된 썩 재미있는

작품일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같은 배우가 더 퇴행되고

수준이 낮은 작품으로, “엑셀런트

어드벤처”쪽으로, 가는 것은 흥행의

적신호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이 작품을 오롯이 희귀한 관객 중에

하나로서 볼 수가 있었다.


결론은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 30년 이상 영화배우

역할을 해온 그의 롱런 필모그래피를

적어도 액션 영화의 계보에서 이해하지

못한 젊은 관객에겐 이 영화가 재미

있을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젊은 관객은 이 영화를

여러 영화의 아류작으로만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는 역대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작품 중에 최저의 오프닝 흥행을

올렸다. 제작사와 제작진이 어쩌면,

너무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한

방식이 실제 관객에겐 쉽게 먹힐 방법도,

효과적인 마케팅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렇게 글을 올리고

싶어 졌다. 나처럼 “키아누 리브스”와

오랜 시간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에겐 의외의 재미는 줄 수 있는

영화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비행기에 타던, 영화 스트리밍 또는

다운로드 서비스, 넷플릭스, 와차 등을

열고 나서도 당장 뭘 봐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얄 때, 이 영화는 하나의 상비약이다.


최소한 중반 이후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뮌헨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볼만한 작품으로

동료에게 이 작품을 추천해주었다.


그런데,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1개월가량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후회를 하나 한다. 추천하기

전에 물어봐야 할 것 하나는, “키아누

리브스”란 배우를 좋아하는가였는데

그것을 묻지 않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