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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un 07. 2019

*무비 패스 <하나레이 베이>-소언 다상

적은 언어 속에 풍경과 희로애락을 담아내다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디지털 시대에 와서 영화라는 장르는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와는 비교할 바

없이, 많은 언어를 통해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장르가 되었다.


설명하는 정보가 영상 및 비영상

언어로 너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나와 있고, 손쉽게 영화평을

다는 사람도 수없이 많다.


역설적이지만, 텍스트가 너무 많은

영화라서 배격되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문맥상 모자란 디테일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한다.


알아서 이해하겠지 싶어서 줄이면

왜 줄였는지가 문제가 되고,

그 말을 듣기 싫어 늘이면, 왜 늘였냐고

문제 삼는다. 둘 중에 어느 쪽의 욕이

더 무섭냐고 묻는다면, 물론, 왜

늘였냐는 욕이 더 무서운 게 맞다.


그냥 아무렇게나 영화를 만들어도

나 같은 사람이 끼어들어 이 영화가

위치하고 있는 영화사 속의 위상이나

기법이니 테크닉이니,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생각해본 적도

없을 의도를 간파했다고 주장하며

주저리주저리 글을 쓰고 있다.


이 현실에서 영화부터가 말이 많으면,

그저 일반적인 관객의 이성이나 감성은

마비될 수준에 처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절제미와 단순미를 알고 있는 대가였다.

얼핏 뮤직 비디오와도 같은 감각적인

화면이 흐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성에 대한 깨달음이 사라져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영화 자체에만 감상을 집중한다면

매우 유익한 감상이 남는 담백하고

간결한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이곳의 디지털

세대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는 인간성의

중요한 부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가는 과정에 대한

내용을 잘 드러내 주었다.

이국적인 해변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브런치 무비 패스로 보는 세 번째의

영화인 "하나레이 베이 (Hanalei Bay)"는

구석구석 뒤져보면, 상징성이나 반전의

단서, 꼼꼼한 편집과 카메라 앵글의

여러 의미 등등 정말 말로 나오지

않은 수많은 언어가 떠오르게 된

영화였다.


대신에 대사는 극도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절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상을 통해서 "하나레이 베이"의

현실감을 어떻게 전달하고, 그곳의 질감을

관객에게 어떻게 느끼게 만들까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에 보았던 "허상"과 "논픽션"이

정말 수다스럽기 그지없는 영화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는 영상 그 자체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 본질에 충실했다.

그리고 최대의 극적 반전이 여주인공의

솔직한 그리움의 토로라는 지점에 있었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침묵하고,

배경 음악을 최소화하며, 장면의 변화를

줄이고도 줄인다. 그리고 곳곳에 이 영화의

감독과 제작진이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이

나타나고 있다.


여주인공은 의상이나 삶의 형태에 있어서 최소주의를 보여준다. 옷을 입어도 심플한 것으로, 차도 군더더기 없는 차로, 화를 내도 작게, 울어도 짧게, 회상도 점프 씬으로.


이 영화를 굳이 메시지를 찾아야 하는

영화로 이해하고 싶다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다.


파괴된 가정의 화해와 죽은 이에 대한

아픔과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여가도록

도와주는 자연으로 사람이 돌아갔다는

이해, 죽은 사람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그 흔적을 다 버리고,

없애는 것보다 삶에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이야기.


이것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하면서 뜨끈한

국물과 더불어 화끈하게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이 통상 우리나라 작품의 방식이었고,

수많은 수다 속에 묻어가는 방식이

프랑스 영화의 전통적인 장기라면, 일본

영화 중에 적지 않은 수준급의 작품은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정말 사람이라는 것이 이 정도만

느끼고 살아도 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가져올 정도의 비인간적 설정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줄이고 줄인 덕에,

"아들을 갑자기 낯선 하와이의

해변가에서 상어에게 잃어버린 어머니"가

1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서 그 슬픔을

해소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고

있다가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라는

중심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했다.

맨 첫 장면에서 그가 상어에게 당하기 전에 서핑을 하는 장면은 짧게 지나간다. 이것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다른 면으로 하나 더 칭찬해줄 만한 점은

정말로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적지 않은

관객이 정말 "하나레이 베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는 점이다.


초반 부에 서핑을 즐기던 한낮의 바다 위의

풍경 속에 있었던 아들이 암전과 더불어

주검으로 나타나는 장면 이후에

관할 경찰관과 그의 아내인 심리 상담사(?)

부부가 계속 그 어머니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온 사람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므로, 하나레이

베이를 미워하지는 말아주세요"였다.

10년 간의 하나레이 방문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아들뻘의 젊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단서를 발견한다.


아들의 죽음 이후 매년 같은 시기에

이곳을 찾아오는 어머니의 시도는

자신의 아들을 빼앗아간 이 해변을

이해하고 사랑해보려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제대로 사랑을 주고받지 못했던

그의 가정, 마약 중독자이자 요절한

남편과 또한 요절한 아들이라는 비극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해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고,

사랑하는 과정에 있는 장애물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픔을 잊으려 하기보단

오히려 더 강렬하게 더 느끼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현명함을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일부는 일본에서 온

아들뻘의 두 젊은이와 만나 서핑을

왜 아들이 즐기게 되었을까를 이해하는

내용과 바다와 더불어 묻어버리려고

했던 슬픔을 떠올리게 만드는 술집에서의

고집불통 미군 아저씨의 난동, 그리고

진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젊은이들이 이야기 한 "외다리 서퍼"를

찾아 해변을 헤매는 이야기들로

군더더기 없이 잘 매듭지어져 있다.

 

영어를 못하는 척할 줄 알고, 사려 깊게 아들을 잃어버린 아주머니를 위해 대신 싸우기도 하고, 그리움을 받아들이도록 "외다리 서퍼"이야기를 가공하기도 한 청년이다.


이 부분은 나이와는 별도로 더 사려 깊고

능력 있는 젊은이를 극화에서 드러내는

일본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양념 격의

인물이 하나 제대로 나오면서 극화를

조금 더 풍성해지도록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인물조차 제대로 많은 말을

남기지 않고, 여주인공이 "외다리 서퍼"가

혹시 자신의 죽어버린 아들이던지 연결된

존재는 아닐까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해변을 헤매는 동안 그저 극화에서

잠시 사라져 버린다.

바다의 매력 앞에 그 어떤 배우의 매력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연은 바다다.

그래도 또 다른 인물이 부재하는 동안에

묘사된 해변의 바람과 파도, 발 위에

묻었다 바람에 쓸려가는 해변 모래의

모습은 대다수 영화 속에서 쉽게

찾아낼 수 없는 해변의 현실감을

체감하게 만들어준다.


어느샌가 관객은 여주인공처럼

이 해변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진다.


그리움을 꾹꾹 눌려놓다가 아들을 찾아 해변을 헤매는 이 씬은 가슴 아프다기보다 격렬한 영화적 반전처럼 느껴진다.
마약 중독자이자 폭력적인 죽은 남편이 즐겨 들었던 음악을 죽은 아들이 즐겨 들었었고, 그것을 듣기 싫어했던 그는 결국 듣는 순간 단절되었던 감정과의 연결을 느낀다.

그의 입으로 피아노로 음악에 대한 꿈을

가졌다가 마약중독자인 남편을 만나

그가 바람을 피우고 죽은 이야기까지를

젊은이들에게 한 뒤에 그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차마 하지 못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슬픔을 중화시키려고 한다.


결국에는 진심으로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인정하고 해변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세상과

화해하는 장면은 이 해변의 매력을

영상으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 속의 배우는

"하나레이 베이"였다. 그 배우는

고통을 준 존재인 동시에 기쁨과

화해를 가져다준 존재였고, 동시에

영화가 끝난 뒤에 내게도 남아 있는

슬픔이 혹 있다면, 가서 풀어버릴 수

있는 곳이 그곳이 아닐까라는

인상마저 남겼다.


영화 속에서 잠깐 순진하다 싶은 대사를

떠올려보자면, 영어를 잘하는 일본인이

칭찬받는 장면이고, 이에 대한 자부심마저

서로 나누는 장면이다.


지금에야 우리나라에선 영어를 얼마나

더 수준급으로 잘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화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일본에선

영어를 익숙하게 할 수 있는 국제화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캠페인성

발언이 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면이 살짝 귀엽기도 하다.

이 부분만이 영화가 갖고 있는

사족이라 말한다. 비록 나도

네이티브 수준에선 모자란 영어를

쓰며 먹고살고 있는 마케터이지만.



글을 쓰고 나서 검색을 해보니

이 작품의 원작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하루키의 것이었다.


이 단편은 "도쿄 기담집"에

실려 있고, 그 책은 분명히

본 책이 맞는데, 전혀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었다.


원작이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이렇게 되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원작의 내용이 무엇이었든 간에

해변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이란 장르에서는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묘사된 해변을

담은 글에 대한 기억이 나에겐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에

끌린 중요한 이유는 그 누구보다

이 멋진 "하나레이 베이"라는 배우

의 말없는 매력이었다. 하루키가

쓴 단편은 아무런 휘광 효과가 없었다.


이 작품은 그러므로, 온전히

감독이 만든 나름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에 남아 있는 것은

하루키 단편이 주로 남겨놓는

상실감이란 감정보다, 삶에 대한

긍정과 추억의 아름다움이었다.

여주인공은 일상으로 씩씩하게

복귀했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통적인

하루키의 단편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을지는 그려진다. 그보다

나은 마무리였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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