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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Oct 29. 2019

<조커>-자기 합리화의 망상

조커의 관점에서 편집된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혹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다른 링크로 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중심 주제로
삼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글을
써오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작품, “조커”를
마주하니 진땀이 나는 듯하고
정신이 조금 몽롱해지고 있다.

왜냐면, 내가 가진 주제인

“자기 자신되기”에 곤란한 질문을
들이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남에게 확실한 피해를 주고, 그 자체로
거의 “절대 악”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 역시도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이 작품 같았다.



이 질문은 내겐 도전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반응하며,
그 결과 또는 과정으로서의
글을 써야만 할지 고료도 안 받는 내가
직장 생활의 중간중간과
주말의 휴식 시간 내내
그 생각이 머리에서
잘 떠나지 않았다.

오늘 밤 바야흐로 잠들기 전에야
글을 쓰면서, 이제 나름대로의
정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미국, “암흑가의 황제”였던
“알 카포네”는 “금주법”이 있었을 때,
“밀주”를 통해 돈을 벌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엄청난 위법 행위를
했던 사람이었다. 누가 보아도
“악당”임이 분명했었다.

그 “알 카포네”조차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연쇄살인마 중에 뉘우치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태어났건 환경이 만들었건 간에
상종 못할 악인도, 그 자신에겐
자신이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두가 자신이 올바른
삶을 살았고, 올바른 일을
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 올바름을 절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진리는 범법자의
입장에서는 평소 생각하는 범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질서에 어긋나게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필연성이나
당위를 주장할 합리화는
어떤 식으로든 이뤄진다.

협상이란 인질을 잡고 있는
흉악범과 하더라도 그 흉악범의
이야기에 있는 내용을 그 흉악범의
관점에서는 맞는 이야기라고
인정해주면서 진행해야
어느 정도의 협의점에
도달할 수 있다.

인질을 풀어주거나, 자수하는 등의
원만한 결론은 인간성의 진실과
심리적인 본질을 잘 이해하는
협상가가 이야기를 풀어냈을
때에만 만들어낼 수 있는
훌륭한 마무리다.

그러니까 관객이 “조커”가
되기 전의 “아서 플렉”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가 겪은 비참한 과거에 대한
그의 합리화를 그의 관점에서
쳐다봐 주는 것일 테다.

협상이 안 되는 자기 연민과
망상, 착란, 충동, 분노에
휩쓸리는 “절대 악”이
그임을 확실히 알기 전까진.

이 영화는 여러 화면 뒤에
조금씩의 반전적인 내용을
뿌려두고 있다. 그런데
그 반전이 정통 히어로물이나
안티 히어로물에서 나오는 류의
반전이 아니라, 심리 스릴러 물의
반전이란 것이 영화의 핵심이다.

결국 “조커”는 구제불능의
살인마라는 “자기 자신”이 되어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이
내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자로
돌변하며, 우리가 이전의 배트맨
3부작 중 “다크 나이트”
에서 “히스 레저”의 신들린 연기로
보았던 그 “절대 악”에 근접했다.

마치 변신 로봇처럼 변화한다. 신체와 움직임, 목소리 모든게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완전히 달라진다. 한 배우가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영화 속에서 갑작스레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유아기에
학대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마저
죽이는, 초반의 “아서 플렉”
과는 완전히 다른 충동적인
살인마인 “자신”을 찾았다.

그것이 너무 기쁘고 활력이
넘치고 자연스러운 나머지
춤까지 춘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 “꿈을 향해 가는 자의
발걸음을 보라, 그는 춤추고
있다”의 기괴한 변형 같았다.

이 춤은 수퍼맨이나 아이언맨 등의 히어로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능력을 체감할 때에 비견될만하다.



첫 번째 살인 이후의 춤은
히어로물의 “각성”을
악인의 “각성”으로 변주하고,
그 유명한, 계단을 올라가며 자신이
아닌 삶을 살아갈 때의 무거움과
위축됨이 보였지만 몇 번의 살인을

마치고 “머레이”의 쇼에 나가기 위해
내려갈 때는 예술적일 정도의
춤으로 바뀌어 “악행”이 만개한
악당으로서 히어로물의 초인적인
능력을 펴는 장면을 또한 다르게
변주했다.







어머니의 착한 아들로서
지극히 간호하며 , 어려운
가운데서도 같이 살아가던
모습이 어이없어질 만큼
“변신”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어머니가
30년 전에 가정부로 일하면서
가졌던 “토마스 웨인”에
대한 헛된 망상을 알게 되고,
그의 사생아가 자신일 거란
또 하나의 조작된 기억을 알게 되어
갖게 된 분노가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은 그의 그러한 행동을
이 지점부터는 합리화해주지 않는다.
 
바로 이 행동은 다시금 앞에서
보고 있었던  씬들을 순식간에
복기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객관적인
3인칭 시점으로 “아서 플렉”을
찍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이 지점 전의 스토리로
돌아가자면, 그는 자신의 망상과
실제 벌어진 상황을 뒤섞으면서,
자신의 관점에서의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편집하면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찌 보면, 관객을 선동하는 수준의
카메라 워크였다.

첫 번째 살인 이후에 자신이 몰래
스토킹을 하기도 했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스쳤던
싱글맘의 아파트 방문을 열고
들어가 사랑을 시작하고

같이 밤거리 데이트를 하며,
경찰의 취조 때문에 병상에
눕게 된 어머니를 같이 간호했던
기억이 잠시 나열되었으나
그것이 사실은 “아서 플렉”의
망상이었음이 드러난다.

그가 다시 한번 싱글맘의 아파트의
닫히지 않았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소파에 앉아 있었을 때, 방 안에서
그를 마주친 싱글맘이

(마블 엑스맨 데드풀 2에서 출연했던

여배우가 이 배역을 맡았다, 또 한 번의
디씨의 마블 배우 돌려쓰기)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나가주기를
요청할 때에야 카메라는 그가
망상을 진실로 믿으면서 관객에게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고  있는
중이란 강력한 힌트를 던진다.

결국 합리화하고 진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이야기 상당수가 어쩌면
잘 가공된 망상일 수 있음을 그제야
관객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깨달음을
실감하기도 전에 “아서 플렉”은
자신의 발작적인 웃음을 찍어
자신의 쇼에 올려서 조롱거리를
만든 “머레이 쇼”에 출연하기 전,

방송 중에 자살하기 위한 리허설을

자신의 집에서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나중에 그가 “머레이”를
자살하려던 권총으로 쏴 죽일 때
충동적이고도 즉흥적인 살인마인 “조커”,


“머레이”에게  “아서 플렉”이

자신의 이름으로  방청객에게

소개해달라고 했던,


그 이름의 “악당”이 이제 바야흐로
제대로 대중 앞에서 악행을
보란 듯이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효과를 더 크게 만들었다.

그가 자살 전에 읊으려 했던 메모 속
대사인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
가치가 있길”이 ‘나의 살인이
무엇보다 더 가치 있길’로 전환되며,
그가 이젠 가책이나 죄책감이 없는
살귀가 되었음을 각인시킨다.


이후의 더욱 격화된 쓰레기 청소 노조의

시위와 난동 중에 그를 체포하여 태운

경찰차를 그의 지지자 인양 광대 분장을

하고, 엠뷸런스로 부딪쳐 탈출시킨 장면과


그가 정신 병원인 듯한 곳에서 상담을

하다가 피에 젖은 발자국을 바닥에

찍으며 난동을 피우는 장면에 대해선

곳곳에 설명이 잘된 글들이 많다.


이 또한 망상일 수도 있고,

이 또한 선후 관계가 뒤바뀐

“조커”의 기억의 편집일 수도 있다.


만약 난동 중에 지지자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마도 그를

추종하는 무리와 함께 범죄활동을

지속할 세력을 구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 병원에서의 상담은

초반의 카운슬링 중에 언급했던

그의 정신병원에서의 기억이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그곳에서 이미 상담을 하던 직원에게

폭력을 가하고, 도망치려는 전력을 가진

환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가

사회로 복귀한 후 그의 폭력성을 누른

것은 아마도 복용 중인 다량의 약이었을

것 같다. 이를 끊어버린 것은 정부의

예산 삭감이었고.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조커” 혼자만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어쩌면, 지금의 시대에

빈민 및 취약 계층을 방치하려고 애쓰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자기 자신되기”란
화두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신되기”’만이 “제대로 된
자기 자신”되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젠척 앉아 있던
내게 영화는 다시 묻는다......
아니, “조커”가 되기 전의 “아서
플렉”은 묻는다.

“자기 자신”이 되려다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자기 자신”을
최대한 억누르고 자신의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해피”한 웃음을
주기 위해 “코미디언”이 되려고
애를 썼고,

“광대”로서 “타인”을 보다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왜 자신에게는 아무도 배려를
해주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냐는
것이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순간까지
“자신”을 억 눌렀는데, 왜 인생은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냐는 질문도
덤처럼 따라붙는다.

그럼으로써 점점 더 자신을 누르기
어려운 순간까지 외부환경이
자신을 밀어붙였고, 결국 사회가,
자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어머니마저 자신을 힘들고 비참한
상태로 만들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여기에 대해서
제대로 복수하겠다는
합리화를 극 내내 진행했다.

극의 초반에 그는 광대 분장을 하고
한 가게의 광고 간판을 돌리며
호객 행위를 하다 아이들에게
광고판을 빼앗기고 파손당한 후에
집단 린치를 당한다.


그 이후엔 고용주로부터 이런
사정을 설명도 못한 채 배상을
요청당하고 화를 풀 곳이 없어
골목에서 발길질을 했다.

버스에서 아기를 즐겁게 해 주려고
얼굴을 찌푸리며 광대 짓을 하다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핀잔을 들은
그는 정신질환 문제로 일어나는
발작적인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카드에 그 증상이 적힌 내용을
그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웃고 싶지 않지만 웃을 수밖에
없는 비참함을 드러낸다.


광대 일을 같이 하던 동료가
좋은 뜻으로 자신을 지키라고
권총을 하나 사서 주는데,
병원에서 이를 흘리는 바람에
다니고 싶던 직장을 잃는다.

정부의 예산 삭감 때문에
정신 질환에 대한 카운슬링도
끊기고 먹던 약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된다.

어머니가 예전에 “토마스 웨인”의
집에서 가정부 노릇을 했었고
자신이 그의 아들이란 기대를 하고
집을 찾아가고, 극장 화장실에서
만나 안아달라고 하지만, 입양된
아이였을 뿐이라며 모멸적인
언사와 함께 얼굴을 맞았다.

토마스 웨인의 아들인 브루스 웨인, 배트맨에 대한 조커의 애증의 이유가 바뀐다.


그는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채
광대 분장을 한 자신의 옆에서
앞자리에 앉은 여자를 감자칩을
던지며 희롱하던 세 남자 앞에서
또 한 번 더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리고, 이 때문에
그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한다.


여기까지의 스토리에서 관객은
“아서 플렉”의 기괴함을 제외하곤
일종의 동정심이나, 고담 시라는
가상공간이 갖고 있는 극단화된
빈부 격차의 위태로움을 목격하게
된 것 같다.

살인마나 극렬 폭력 주의에 물든
이들에게 멀쩡한 사람까지
인내심을 잃고 동조하게 만드는
예외 없는 냉정한 시장경제 중심의
사회가 어쩌면 살인마 그 자체보다
무섭다는 것을 은연중에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졌다.

폭발 직전의 그의 관점에서야
그의 폭력과 살인은 불가피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여러 옵션 중에 최상의
것은 여전히 아니었다.

어머니의 충고대로 그는 어쩌면
코미디언이란 그와 전혀 맞지
않는 일과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었고, 총으로 살인을 시작하기

보단 그전에 진지하게 싱글맘과
사귀려 노력할 수도 있었으며,

그것이 “자기 자신되기”의

건전한 답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프리퀄 안티
히어로 무비가 성공하기 위해선
그 모든 선택의 가능성을 일소하고
무력한 저소득 빈곤층의
정신질환자이자 광대에서 혼돈의
살인마라는 극 중 배역으로서의
극단화된 양쪽을 엄청난 이미지와
신체 격차, 살인의 희열을 온몸의
춤으로도 표현해서 그럴듯한 현실
속의 인물로 형상화한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 같은 특별함이 더 중요했다.

그가 아닌 어중간한 배우가
했다면 사회적인 논란보단
“조커”의 일대기 자체가
이전의 잘 알려진 코믹스나
영화와 너무 다르다거나
너무 미화되었다는 등의
지적이 더 많았을 것 같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만들어낸
“조커”연기가 너무나도
뛰어났다는 것에 대해선 거의
이의가 없다. 그는 배우로서의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고, 그에 맞는 박수를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배우는 영화 속의

배역인 “조커”가 그 자신다워

보일 수 있는 연기를 해냈고,

그럼으로써 독보적인 “조커”를

형상화해 냈다. 그것을 나는

“자기 자신되기”의 큰 예제라

이름 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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