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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Feb 02. 2020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정말 로컬 영화

미국 영화의 백인 남성 주류 시대에 바치는 회고와 찬사

조금 늦게 영화를  뒤에 글을 써서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유의 바랍니다.


이 영화는 주요한 미국 영화사에 대한

사전 배경을 모른체 본다면 재미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영화다.


최소한 할리우드 키드 정도 되는

미국 영화에 대한 조예가 있어야

아무 사전적인 공부 없이도 진지하게

감상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영화는 그저 잔인한 극화 중에

하나가 될 뿐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관련된

이야기를 읽어야 그의 아내였던

"샤론 테이트"가 임신 중에

광신도 집단의 교주인 "찰스 맨슨"의

사주로 침입한 광신도에 의해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던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살인 사건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의 비극성은 일단,

"찰스 맨슨"이 "악마"를 숭배하는

교주로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악마의 씨(로스 메리의 아기)"를

추종했었기에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고, 다만 자신이 만들었던

음반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음반 관계자를 죽이고자 했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로만 폴란스키"가

유럽에 가있는 동안 잠시 빌렸던

집이 그 관계자의 집이었고

들이닥친 일당은 그 집에서

예정된 무작위의 살인을

"샤론"과 그의 지인에게

행했다는데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은 미국인의

뇌리에 아마도 오랫동안 남았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트라우마처럼

미국의 "히피 문화"의 방종의 극단을

보여주고, 무조건적인 자유주의가

꼭 좋은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는다는

일례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씻어 내릴 것인가에 집중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따라서

이 살풀이 판이 일어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영화의 끝판에

이르러서 찾아올 카타르시스를

누리기가 어려워진다.


쳐들어온 사이코패스 일당을

잔인하게 처단한 "레오"의 배역과

"브래드"의 배역의 모습을

잔인한 액션 이상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사실을 알아야만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액션 영화라든가 평범한

드라마가 아닌 실제 배경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가정해서

만들어진 가상현실 또는 평행 우주에

대한 이야기며, 그것이 반전이 되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것이 평행 세계를 다룬 영화라고

미리 홍보를 하고 나면 반전에 따른 놀라움과

해소감은 반감한다. 영화의 태생 자체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미리 이야기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 중에 가장 높은 평가와 큰

흥행을 누렸다.


중국에서 이 영화의 수입을 "이소룡"을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둔 큰 쾌거다. 글로벌 전체에 할리우드

키드가 그만큼이나 많고, 영화 보기 전에

간단한 검색으로도 배경을 살필 수 있는

모바일 문명이 이 한계를 넘는 역할을

했던 것 같기는 하다.



두 남배우의 매력만이 어필되었다고 생각한다.

"샤론 테이트"를 맡은 "마고 로비"에게

무슨 연기력이 발휘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관객은 그 비극을 트라우마로 간직해 온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글로벌화된

트라우마라고 보기엔 협소한 범위에 있다.


영화 속에서 "로만 폴란스키"는 얼핏

위대한 감독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사를 뒤지다 보면, 그는

"아동 성폭력"을 저질러 미국 밖으로

도망 다니고 있는, 미국법에 따르면

범죄자다. 그가 미화되고 있다는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백인 감독 동업자

의식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다.


마찬가지로, "이소룡"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나름 성공한 "킬 빌"의

"우마 써먼"이 입고 활약한 검은

줄무늬 노란 체육복 의상이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지만,

그는 어찌 보면 "신격화"되어 있는

"이소룡"의 이미지를 오만방자하고도

무술 실력이 모자란 인물로 바꾸어

"브래드"가 맡은 배역에게 일면

압도당하는 이미지로 그렸다.


통상 일반적인 감독이었다면, 이 영화는

'"패러렐 월드(병행 세계)"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고, 이 영화에서

그려진 "이소룡"은 실제 우리

세계에 살았던 "이소룡"이 아니라

"브래드"의 배역인 "스턴트맨"의

능력을 강화해서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텐데


1. 영화의 스포일러 노출 최소화

2. 노이즈 마케팅을 통한 티켓 파워 확대

3. 드러난 인종 차별 의식을 부정

하는 방식으로 "쿠엔틴" 감독은

가상의 인물의 무력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는 설명에 덧붙여서, 그가

실전 무술을 군대에서 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소룡"이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단언을 했다.


어찌 되었든 할리우드 영화 역사의

"백인 주류 시대"를 회고하는 이 영화에서

무너뜨리고자 한 것은 "샤론 테이트"의

비극뿐만 아니라 "아시아 배우에게 빼앗긴

강력한 무술 실력에 대한 이미지"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영화의 포커스는 사실

매우 좁고도 명확한 것이다.


물론, 재미있게 끝까지 보았긴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작품이 이야기하는

몇 가지 포인트는 너무나 분명해 보여서

부정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영화는 "백인 주류 남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행복했고,

더불어 주도적이지 않은 보조 역할에

머물렀던 "가련한 백인 여배우"에

대한 회고만으로도 아련한 시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에서

분명히 소외되고 있는 것은


수많은 다른 인종이자 능동적인

여성상을 내면화한 배우와 관객이다.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가

행복했다고 드러나게 이야기하는데도

로튼 토마토 점수는 최상 수준이고

흥행은 그 감독의 영화 중 최고 수준이다.


"우주전함 야마토"나 "지 아이 조" 급의

자뻑 영화를 오래간만에 보게 된 셈이다.


로컬 영화를 대표하는 자국 또는 특정 인종

최고주의가 글로벌 영화제에서 이렇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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