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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reedom plus

<분수에 맞는 삶이란 없다>

왜냐면 누구의 인생도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by Roman


두려움과 실패란 주제를 떠올리자니 왠지 모르게 제 인생에서 가장 진한 실패담을 떠올리고 그 생생한 기억을 묘사하면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거나 또는 그 실패로 인해 두려움을 느꼈는지를 쓰고 이를 인생의 교훈으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의 형식적인 드라마를 떠올리고 써보고자 생각해보니 너무 많은 실패가 떠올랐고, 그중에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선뜻 맘에 드는 하나의 일관된 기억이 잡히지가 않더군요.


어찌 보면 저는 제 인생의 수많은 실패 때문에 지금의 현실에 처하게 되었고, 지금의 현실도 어쩌면 실패보다는 좀 더 성공이 많았다면 좋았을 실패에 더 가까운 현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거대한 인생의 실패로 아주 뛰어난 인재도 되지 못했고, 그저 그런 인생을 살게 만든 수많은 실패의 결과물이 혹시 저는 아닐까라는 그런 불안감조차도 일어나더군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삶에 대해서는 나름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 드러내 놓고 자랑은 하지 않더라도 뿌듯하게 느끼고 살고 있으니 하루하루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변의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제 인생은 아주 밑바닥에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거하다가 중년 근처에 이르러서 서서히 만개하는 이른바 대기만성형의 인생입니다. 그 친구가 저와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함께 한 친구이다 보니 그만큼의 신뢰가 가는 평가이기도 합니다. 원래 친구란 인생의 나침반 같은 것이라 저의 궤도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그만큼 잘 가르쳐 주는 존재도 없는 법이니까요.


제가 겪었던 실패란 다름 아닌 인생에 대한 절망에 빠져 있었던 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판데믹이라는 절체절명의 인류의 위기 상황에 비교하자면 제가 인생 속에서 절망에 빠져 있었던 순간은 어쩌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어렵고도 힘든 순간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에겐 생과 사의 선택을 매번 고려해야 하는 매우 불행한 기간이었고, 생의 전반에 걸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무게로 어깨 위에 얹어져 있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양가가 흔쾌히 만족하면서 이뤄진 결혼을 했던 것은 아니었고, 두 사람이 이룬 가정은 일면 행복한 가정이 될 것처럼 가기도 했지만 할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가난에 빠진 가정에서 가장 노릇을 하며 베트남 전에도 참전했던 아버지의 주사와 더불은 폭력성과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던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았던 어머니의 천진함은 오랫동안 맞지 않았습니다. 10살 무렵 결국 두 분이 이혼하게 되고, 아버지와 흡사한 외모를 가진 제가 눈앞에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저와 어머니를 따로 떼어 놓기 위해 저를 아버지에게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아버지와의 동거는 모든 시간 괴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육아를 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 아버지로 인해 자주 괴로운 순간을 겪게 했습니다. 오랜 동안 어머니를 제대로 만날 수 없었던 시간은 점차적으로 생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로부터 저를 멀어지게 만들기 시작했지요.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고, 그런 불우한 삶을 친구에게 들키기 싫어 가장했던 잘난 아이의 이미지는 "잘난 척하는 아이"라는 낙인을 찍게 만들어서 이른바 "왕따"로서 고립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를 거의 매일같이 원망했었지만, 그럼에도 제 이름을 영어로 Roman이라고 지었던 이유가 "소설가가 되라는 뜻"이란 이야기를 했던 것은 제게 남아 있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절망할 이유를 준 동시에 희망을 가진 이유도 준, 이른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삶이 제겐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관점을 갖게 한 가장 큰 실패의 순간이었습니다.


공부는 하기 싫었음에도 동화책부터 만화책, 잡지, 소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찾아 읽었고, 국공립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남독의 결과로 알아먹지도 못할 이야기를 잔뜩 갖고 사는 청소년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로 쌓아 올렸던 문자를 마구 마구 글로 적어 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양의 글을 써가는 것 자체는 제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는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첫 번째 제대로 된 도전 방법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즐겁게 읽거나 글에서 의미 깊은 교훈이나 위로, 유용한 정보, 위대한 지식을 쌓아 올릴 수 있는 내용을 써내는 것은 아직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렇게 퇴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잡문을 주로 적다 보니 교내외에서 글을 쓰는 공모전 등에 출품을 해도 제대로 수상을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적어서 제출했던 일기를 보았던 선생님이나 친구 중에 일부는 저에게 글을 써서 발표를 해보는 기회를 주기도 하고 또래 답지 않게 생각이 깊은 면이 있다는 칭찬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문학에 대해서 나름 조예를 가진 독서량이 많은 유복한 가정의 친구를 하나 중학교 때 만나서 그때부터 제가 읽은 책과 쓰는 글에 대해서 나름의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을 처음으로 하나 알게 되었지요. 그 친구 덕분에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 고전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탐색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영상 문명의 시기가 오기도 전에 소니와 아이와의 캠코더를 가지고 영화 이론서를 탐독한 뒤에 고등학생 시절의 여름과 겨울 방학을 모두 영화를 찍기 위한 시간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그 친구와의 교류가 인생의 희망을 찾아가고 이를 실현해 가는 중요한 과제 수행의 시기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친구에겐 저와의 교류가 그만큼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눴던 문화적인 교류는 그에겐 직업의 선택 같은 미래를 위한 과제와는 상관이 없었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누르고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위한 이벤트였던 것이 그 성장기의 상황에서 저와의 커다란 차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읽고 썼던 글은 자발적인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그 자신감은 사회적으로 제가 처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공부를 하게끔 이끌었고, 대입을 나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지금에야 대부분의 고등학생과 재수생이 모두 입학해도 남아돌만큼 대학교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대입 시험의 경쟁률은 4~5대 1의 수준이었기에 입시를 통해 원하던 대학에 입학한 것은 자부심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가진 꿈과는 다르게 보다 빠른 취업에 도움이 될 상경계의 무역학과에 입학한 것이 저의 선택이었고, 지금의 직업 경력도 이 전공과 맞는 선상에서 이뤄지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마련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계속되었기에 다니던 교회에서 대학 입학 장학금을 받기도 했고 친척의 도움도 받고, 재혼을 해서 미국에 가서 살고 계신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아버지가 98년도 아이엠에프로 하시던 부동산 중개업소마저 망한 뒤에 새어머니와 함께 도미한 이후, 홀로 군대를 다녀와서 일 년 여간 휴학을 하며 했던 일이 신문배달이었습니다.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신문배달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영어공부를 한 뒤, 오후 내내 영어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밤 10시에 신문지국소에 들어와 잠을 자고 다시 배달하는 삶을 일 년 여간 반복하면서 나름 돈도 모았고, 영어도 유학을 1~2년 다녀왔다는 또래 학생보다는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데 더 많은 진도를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 같은 삶이 저에겐 삶의 두 번째의 큰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 복학을 해서도 신문배달과 학업을 병행하기도 했었고,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관생들의 투표로 선출된 기숙사 동장을 하면서 4학년 1년간의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마쳐가는 과정에서 이후의 삶에 대한 절망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문 배달은 저에게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여러 깨달음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들은 그저 처음부터 가난하게 태어나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어 회화 학원을 차렸다가 억대의 빛을 지고 신문배달로 그 빚을 갚아가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절제력 있는 태도로 주변의 모든 이로부터 존경받았기에 그를 닮아야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만들었습니다. 무학자에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며 일하는 분도 있었지만, 그분의 계도로 배달하던 신문과 경제지를 매일매일 읽으면서 점점 더 나은 교양과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반면, 배우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 몇 살 많았던 분은 잘 살던 집안이 무너진 뒤에 프랑스 유학의 꿈이 끊긴 분이었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는 자신을 연민하며 에로배우로 데뷔하려고 시도를 하면서 배달을 펑크 내기도 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로 모두의 원성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그 이후에 변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필요 없는 걱정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곳에서 깨달은 것은 삶 속에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게 되던지 그 위치에 대한 외부 평가나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기 평가와 더불어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분명히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환경의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위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는가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과거의 실패에 사로잡힌 두려움 때문에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잃고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다는 나름의 자부심과 뿌듯함을 가지고 앞으로도 보다 현명한 삶의 방향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계층에서 태어났다고 그것에만 얽매여 살아가도록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고, 분수를 지키라는 경구에 따라 이미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분수를 지킨다는 정확한 의미는 헛 된 요행을 바라지 않고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온 인생은 그러하였고, 다른 분들도 지금의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나은 인생을 향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려는 사람이 주변이나 그 어디에나 있다면 그들이 부지불식 중에 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자신의 위상보다 떨어지는 사람을 하나둘씩 확보하고 있다는 기분 좋은 느낌일지도 모릅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닫는 것 이상 중요한 인생의 태도는 또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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