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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Freedom plus

<내가 나라고 부르는 것>

태어난 그대로의 나인 동시에 나와 타인이 만들어낸 나

by Roman

나는 작가다 공모전에 참가하려고 중에 결국에는 기한 내에 쓰지 못하고 남겨진 글입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태어난 그 자체의 온전한 나로 남아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 그것에 도달하도록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면 이런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태어난 자신을 그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부르는 게 사실은 좀 더 맞는 "나답게 살아간다"의 의미를 살린 표현이 아닐까요?


"꿈을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그림자를 닮게 될 뿐이다"라는 말도 있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등의 여러 가지 "나"란 사람이 결정론적으로 정해지고 그 바깥의 다른 모습으로는 변할 수 없다는 수없이 많은 문장이 있으며, 통계가 있고, 편견도 있고, 고정형의 사고방식으로 사람은 그 낳은 모습 그대로에서 하나도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수많은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회적 상식인 것처럼 포장되어서 그것에 맞는 사례들만 구미에 맞게 남겨져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너무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인생의 여러 충격 중에 하나는 너무 기쁜 마음에 하루하루가 즐겁고 하는 일이 좋아서 단 하나라도 더 많은 성과를 내려고 애쓰던 예전의 한 직장에서 그 집단의 주류였던 사람들과는 달리 대기업 출신이 아니었고, 그들이 나온 대학교의 섬유 전공자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겪었던 수많은 수모의 언어였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일했던 그 시간 내내 겪은 그 피로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20대 초반에 모든 인간의 자질과 능력, 태도가 결정되어 버린 것처럼 행동했지요.


채용 요건에도 설명되고 있지 않은 무슨 사농공상 계급 나누듯 사람의 등급을 나눠놓고, 그렇게 대우를 하는 것을 겪으며 7년 동안 그 회사를 다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비슷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심신 미약을 빌미로 한 모함 아닌 모함도 당하고, 이루어낸 실적도 평가절하당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나와야만 했습니다..


"다크 워터스"라는 영화에서 발수 및 방오가공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유해 물질을 미국의 생산 공장에서 무단 방류하여 그 지역의 주민들의 생명과 환경, 안위를 빼았았던 회사로부터 일부 섬유 사업 부문을 분리해서,

또한 지구 온난화 이론을 허구화시키기 위한 학문 등을 연구하고 살포하는 90개의 단체에 암암리에 1997년부터 2018년까지 1억4천만불 가량 지원한 회사에 매각하여 만들어진 회사였습니다.


상기의 엄청나게 환경적으로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른 회사가 이 두 회사였다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2013년도에 퇴사하고 난 뒤에도 한참 뒤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에서 그 두 회사와 큰 관련이 없는 다른 회사에 와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상기의 내용은 영화화가 이미 되어 개봉된 내용과 그린피스가 조사해서 10년 째 배포한 내용으로 부터 확인한 것이기 때문에 근거가 없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나름 쟁쟁한 대기업 출신 경력자들과의 경합을 통과해서 2006년부터 담당했습니다. 제가 선정되었던 이유는 당시의 의사 결정권자가 그런 학벌이나 경력의 장벽을 뚫고서 올라간 분이어서 였습니다만, 그분이 다른 부서로 이동한 뒤에 겪은 일들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2006년경 그 회사의 모기업은 창업 시보다 2400배가 성장한 100조 원 연매출의 회사였고, 그 매출은 당시의 삼성전자의 매출 수준과 유사했었습니다. 이중의 10분의 1 가량인 12조 원의 매출을 지닌 “인비스타”에 그전까지 중소기업에서 계속 일을 했던 제가 입사했다는 것은 당시에는 기적과도 같았고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다닐 수도 있었을 직장에서 그들 부류, 즉 대기업으로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거나, 특정 출신이 아니라고 겪어야만 했던 서러움과 위기의식은 심지어 교감 신경에도 물리적인 손상을 주었고, 항상 다른 곳으로 탈출할 꿈을 꾸거나 엄청난 성과를 내서 그들이 꼼짝 못 하게 성장해야만 한다는 양쪽의 생각을 오가며, 시시각각 바뀌는 하루의 희로애락을 롤러코스터를 타듯 견디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실제로 나름 엄청난 "노오력"에 결부된 엄청난 운도 따른 결과가 나와서 실적은 그전에 제가 담당했던 그 일을 제 전에 했었던 훌륭한 출신의 전임자들에 비해서는 훨씬 좋았습니다만, 썩어 문드러져 가는 카스트 제도 때문에 국가의 크기에 비해서 그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인도의 국민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이 나눈 등급에 천착했고 저는 그 부류에 속하지 못했다는 가장 큰 핸디캡에 부딪쳐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까지 변하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후일담을 들어보니 남아 있는 그들조차 이젠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각자도생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위한 책 한 권을 집단지성의 성격을 갖고 공동 집필을 한다면, 아마도 "직장에서 특정 부류로서 살아남는 법”등의 매우 성공적인 베스트셀러가 여러 권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목만 이렇게 노골적이지 않다 뿐이지 이런 책은 이미 많긴 합니다.


2006년 이후 14% 남짓한 유사한 부류의 사람이 살아남는 동안, 83% 이상의 다른 직원은 자의와 타의에 의해서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낼 수 있는 경제적인 성과는 특정 사업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는 매년 줄어들었고, 국내에서의 고용에 대한 기여도 점차적으로 축소된 것입니다.


그 회사의 살아남은 사람이 가진 수많은 변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들이 빠진 함정은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성"을 추구함으로써 생긴 함정입니다. 나와 다른 남을 배제하여 생긴 그들만의 강화된 생존성은 궁극적으로 조직의 창조성과 에너지를 떨어뜨리고 스스로 무너져 내리게끔 만들고 있는 것이죠. 마지막 한 명이 회사의 문을 닫을 때까지 그것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 회사를 퇴사하고 나온 뒤에 우선은 섬유산업을 떠나고 싶었기에 "유베이스"라는 컨택센터를 주업으로 하는 중소기업이지만 해당 컨택센터 산업, 다른 말로는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내에서는 국내 최대의 업체에 일종의 대규모 경합 과정을 거쳐 입사를 했고, 섬유에서의 경력을 살려 나중에는 이 회사가 인수한 봉제회사로 옮겨 또 다른 업무를 했었습니다.


그러다 국내 대기업인 H사로부터 입사 전까지 3년간 매년 한차례씩 입사 제의를 받다가 차별화된 품질의 원사를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코로나의 영향을 받고 있는 금년과는 별개로 이 회사는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경쟁력이 있는 기업입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업무의 강도는 여타 기업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반의 근무 후에 최근 승진을 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었기에 이것은 저에게 많은 힘을 주는 사건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또 이 내부에서 이 인간 세계의 변함없이 벌어지는 인간 군상 간의 투쟁을 위아래 양 옆, 전방위적으로 다시 겪어 왔고 또한 겪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이라서만 이런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 사는 사회에 가도 이 같은 "텃세"나 "무리 속의 권력 싸움"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예전의 한 회사에서 일했던 순간 겪었던 나름 충격적이고도 부당하게 느껴진 수많은 일 덕분에 이제 와서 겪는 일이 주는 충격은 이제는 그만큼 크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오늘 닥친 위기의 순간과 더불어 내일도 어떻게 버티며 동시에 성장하고 발전하여 어떻게 성과를 높여갈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통상 남을 죽이기 위해 최대한의 에너지를 사용해온 사람은 그에게 공격을 받은 사람에 비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이른 시간 안에 보다 빨리 취약한 상태에 이르게 되더군요. 꼭 필요하지 않다면 그렇게 하지 않고자 합니다.


저는 가족을 지키고 미래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제 에너지를 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언젠가는 창업을 하던지 경우에 따라서는 시대에 맞는 일을 지금부터 공부해서 준비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현실 도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투쟁을 하고 살아 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삶 속에서 제 글을 쓰는 이 순간만큼은 행복합니다. 솔직히 제가 글을 잘 썼는지 못 썼는지도 잘 모르지만, 조금씩 쓸 때마다 나아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런 데서 보람이 느껴집니다.


이곳에선 남을 모함할 필요도 없고, 모함을 당할 충분한 이유도 없으며, 경제적인 가치로 재단당하여 당장의 평가를 받아 등급이 매겨질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저의 글에 대한 조회 수나 구독자의 수, 작성한 글의 수, 완독자의 수, 완독한 글의 비중 등에 대한 데이터는 모이고 모여서 브런치 측이나 연계된 출판사 등이 이 브런치 내의 여러 작가를 분류하고, 평가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가보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제가 저에게 내릴 수 있는 평가가 아닐까요?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저자신이 아닌 타인의 그럴듯함을 모방하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내면서 그 같은 모습이 자신의 것이 결국에는 되게끔 만드는 훌륭한 시도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자신의 본질에 충실한 내면을 반영해서 쓰는 솔직하기 그지없는 글 또한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에도 또한 의미가 있고요.


그런 저런 시도 속에서 탄생하는 글과 그 글을 써가는 과정에서 드러나거나 변화되어 가는 제 모습을 보며,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지 아닌지를 “에세이"의 차원에서는 평가할 수 있을 것이고,


"영화 리뷰"의 글에서는 제가 이 시대와 가진 간극의 정도를 확인하며, 같이 영화를 본 사람과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시대에 맞는 감각을 유지하고 개발하는 것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책 서평"의 글에서는 제가 가진 지성과 감성을 동원하여 한 권의 책의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고 이를 통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한 단계 지적인 성장을 이뤘는지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이 피드백이 많지 않은 저의 글을 통해서 저를 평가하며 조금씩 저를 더 다듬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저만의 방식으로 더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향상될 거라 기대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잘 거치다 보면, 아마도 처음 웹상에 글을 써서 올리던 1999년보다는 나은 2010년, 2020년, 2030년..... 을 계속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불과 어제와 오늘 저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저의 실수로 말미암아 자괴감과 고통, 공포, 후회, 자성, 포기의 심정, 분노, 희망, 배신감 등등의 여러 가지 희로애락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그저 밖으로 발산하며 경감시키는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에 사로잡혀 저자신을 잃으면서 더욱더 상황을 망가뜨리는 쪽으로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얼마 전에 "행복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보았듯이 건강과 행복감을 지키며 장수까지 하면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성숙한 방어 기제"중에 하나인 "승화"를 추구하여 글을 한편 쓰면서 이렇게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며 일을 진전시키고, 정당한 급여를 받고 가족을 지키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 기제 중에 정말로 갖고 싶은 "유머"는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시도하면 잘 안돼서 종종 썰렁해지는 그런 수준이기 때문이지요.


"승화"의 수준이 되지 못하는 글을 종종 쓰지만, "승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는 이 글이 저나 다른 누군가를 위로해줍니다. 그런 동시에 최소한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저에 대한 인생의 여러 방향으로부터의 공격 앞에 맞설 수 있는 힘과 아이디어, 여유를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저이며,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공간과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도 저는 글을 쓸 것입니다. 그저 그것이 "나이므로". 일주일의 아주 짧은 2-3시간의 글쓰기는 제 업무나 육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업무와 육아를 위한 밑거름이 이 시도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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