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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ug 29. 2020

<타임 패러독스>-모든 시간의 나

과거/현재/미래의 나를 하나로 (원제: Predesitination)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다른 글을 찾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에단 호크와 세라 스누크가 나오는

작품이다.


2014년도에 만들어진 작품이고 재미있게

본 팬들이 매우 많이 있다.


도대체 그 해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고, 왜 그렇게 놓친

작품이 많았을까?


13년간 일했던 섬유 산업에서 떠난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다른 산업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 나름 발군의

노력을 했었다.


그렇다 아무래도 나 이상의 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런 시기였다.


이 영화 속의 "에단 호크"는 정체불명의

단체에 속해서 인류에게 1970년대에

가해졌던 무자비한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계속해서 시간을 앞 뒤로 거슬러 다닌다.


눈 앞에서 테러를 개시하기 전의 테러범을

놓치기를 반복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얼굴을 완전히 잃게 될 정도의 폭발로

화상을 입고 피부를 기워 붙여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된다.

원래 그의 얼굴이 무엇이었는지 관객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얼굴을 갖고 나타난다.

생각해보니 2014년에 이 영화를 봤다면

기워 붙인 얼굴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내 모습과 에단 호크의 모습이 왠지

겹쳤을 것 같다.


나는 그때 직전의 회사에서는 7년,

그 전의 회사에서는 6년, 총 13년을

섬유 산업에 종사했었다. 다시 이

산업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IT가 병합된

BPO 산업으로 투신했던 나는

그 전까지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갖고 있던 지식을 폐기하고 망각하며

동시에 새로운 지식과 일하는 방식을

일거에 받아들여야만 했고, 그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맡은 일은 나름 그 회사의

중대한 책임 업무였기 때문에 매번 통렬한

공박을 사방으로부터 당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한 회사나 조직에 오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조직에 새롭게 오는

사람을 막 대하거나 마구잡이로

다루는 것이 용납되는 시대가

더 이상 아닌 이유는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2~3회의 인수합병을 겪고,

최소한 2~3회의 이직을 통계적으로

겪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누구나 가져야 할 상식으로써

이해가 된다. 이젠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무너졌다. 평생 직업은 혹 있더라도.


그러나 나 역시 직장 생활의 초반기에

다른 회사에서 온 경력자를 이미

그 회사에 있었던 익숙한 동료들과 더불어

"왕따"를 놓았던 적이 있었고, 적응 전의

미숙함을 통렬하게 공박하며 앞 뒤로

그들을 비난하는 일원 중에 하나였다.


그런 방식의 행동과 사고는 그저 삶의

익숙한 일부였다. 어디를 가던 어느 곳에

있던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사람 간에 생긴

서열이나 질서를 이제 막 진입한 사람이

무시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질서를 무시하는 것을

최대한 피해야 하는 것만큼, 새로 진입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나 그가 경험한

문화와 직무 능력을  미리 선입견을

가지고 무시하는 것도 용납되선 안된다.

여러 번의 이직을 하면서 처절하게

깨닫게 된 진실이다.


왜냐면, 이제는 한 산업 내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진득하게 오래 일할 사람을

제대로 한 곳에 고정시키기

어려운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이직 횟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필요할 때 이직을 할 수 없는 인물이 되는 것이 더 위험한 시대다.

젊은 사람에겐 젊은 사람 나름의 기회가,

나이 들은 이에겐 그 나름의 기회가 있다.

구미에 안 맞다는 이유로 내쫓다 보면

그들이 가져왔을 성공의 기회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가진

조직에게 계속 인력을 빼앗기고 빈약한

인적 구성을 가진 허약한 조직으로

쇠락하는 지름길인 바로 그것은 너무

강한 나머지, 외부에서 온 것이라면

모두 바이러스 인양 퇴치하게 만드는

"폐쇄적인 조직 문화"다.


문화를 떠나 적응하기 위해서 받아들이고

배워야 할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조직

또한 저절로 사람들을 떠나게 만든다.


이른바 2000년대 초반에 그 당시의

국내 회사보단 보다 자유로운 문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글로벌 회사에

입사했었지만, 너무 잘 만들어진

그 회사의 문화 자체도 장벽이 높았고,


그에 적응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회사에

한국 조직으로부터 먼저 들어와 있던

경력자가 가진 글로벌 최상급의 꼰대

문화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최상 수준의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 회사의 싱가포르 법인의 경우

400여 명의 신입 직원을 뽑았던 바

200여 명이 회사를 1년 내에 떠났다.

퇴사율 연 50% 수준이라면

채용 비용상의 마이너스와

투자한 시간에 대한 마이너스,

기업 이미지의 악화까지 고려하자면

엄청난 수준의 수익과 매출의 누수가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물론, 아웃소싱은

100% 연 이직률이 있어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일반 제조, 생산 기업에서 이 수준의

퇴사율은 엄청나게 높은 것이다.


한국에서야 높은 수준의 고통이 있어도

일자리 구하기가 녹록지 않은 분위기상,

특히나 내가 속해 있는 섬유 산업에서는

기를 쓰고 버텨야 하는 당위가 있지만,


싱가포르처럼 글로벌 유수의 회사가 다수

진출해있고, 보다 풍부한 취업의 기회가

있는 곳이라면 새로운 입사자에게 동기를

제대로 부여할 수 있는 문화가 성립되지

않은 회사에겐 구인 난이 바로 직격탄처럼

떨어지게 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복지와 대우 수준이

타 글로벌 기업, 특히나 섬유 기업 중에선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최상 수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열악한 수준이라

보기에도 어려웠다.


문제는 표방하는 문화 수준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여 선진적이고, 철학적이고,

경제학적인 백그라운드까지 철저하게

디자인되었지만 그것을 지켜야 하는

직원과 그것을 지키게끔 하는 최고 경영자

간의 언행이 서로 불일치했던 것이다.


지구 상에선 이제 "몽골"이란 이름으로

아직 남아 있는 국가지만, 오래전

"칭기즈칸" 시대에 "몽고"는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었다.

이민족을 군대에 편입하고 비전 안에 같이 융화시키며 로마와 같이 공헌한 이민족이라면 지휘관의 신분을 주고 권한을 이양했다.

"몽고"가 강성했던 이유를 당시의 뛰어난

전쟁 기술인 "말 위에서 자고, 먹고,

칼싸움에도 능숙한 기마병을 대량으로

육성했다"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했던 그들의

"아메바 조직"의 위대함은 종종 간과된다.


"칭기즈칸"은 인체의 조직 세포와도 같은

단순한 직제의 조직을 유기적으로 만들어

결합하고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같은

음식과 주거 조건에서 같이 전쟁터에서

싸운 존경스럽기 그지없는 리더였다.


그의 명령에 목숨을 걸었을 수많은

군인을 금세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직의 규칙 또한 "칭기즈칸"과 그의

모든 군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로 인한 동기의 상승을 무시할 순 없다.


심지어 최근 도덕성을 의심받는

"페이스북"의 창업주 "마크 저커버그"조차

"구글"과 싸워야 할 때, 같이 새벽까지

일하며 진두지휘를 하고 동기를 부여했다.

이건 시대에 뒤쳐진 이야기가 아니다.


4년여간 근무했던 "유베이스"는 모호한

개념의 "좋은 사람, 좋은 회사"라는

문화를 회사의 최대 장점으로 가진

핵심 역량이 창업주이자 회장, 오너인

회사이다. 이제는 누구도 그렇게

하고 있을 거라 상상하기 어렵지만,

회사를 키워가는 과정에서 그분은 하루에

한번 그 회사의 여러 다른 말단 상담사를

여럿씩 불러서 친히 소통을 해 왔었다.


마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 같고 그렇게

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이상 효과적인

조직 관리 기법은 없는 것 같다. 직원에게

최고 경영자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

그 이상의 뛰어난 조직 관리 기법은

지금껏 경험해 봤던 적이 없다.


지금의 회사에서도 대기업의 병폐를

무너뜨리고 거듭나고자 최고경영자가

말단까지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자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중단되었고, 그 이유는

감만 잡을 뿐이다. 아마도 그것이

불편해지는 사람이 여럿 있었던 듯하다.


인생으로 그것을 한번 비유적으로 다시

돌려서 생각해보자. 조금씩의 단계적인

성장을 거쳐서 조직의 상부로 이동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적인 존중을 조금씩

더 획득하는 과정에 과몰입하다 보면

인간의 능력과 자격에 대한 허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 우리다.


인생을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제대로

경영하기 위해선 성장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재정리하고

다시 통합해야 지금의 세상에서 이른바

자기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무조건 나이 먹어 단순 작업상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나이 많은 자신이나

타인을 직업의 무대에서 배제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무조건 어리고 유효한

판단을 내린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나이 어린 자신이나 타인을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 또한 어리석다.


인생을 통합적으로 떠올려서 이해할 수

있어야 극한의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를

끌어안고 대응할 수 있으며, 이 사회 속의

수없이 많은 집단과 다른 연령 대의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과 제대로 된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다.


1~20대도 8~90대를 감잡을 수 있고,

8~90대도 1~20대를 감잡아야 한다.

왜냐면 같은 시공에서 실시간적으로

상호작용하여 만드는 이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전의 시대보단 더 큰

영향력을 인생의 판 위에서 서로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1인 미디어가 창궐하는

그런 시대에 이르렀다.


영화는 “타임 패러독스”의 한 가지 이론을

강조하여 만든 영화였지만, 내겐 자신의

인생을 통합해서 이해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그려서 보여준 영화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에단 호크"의 이름이 "존"이고

약간 중성적인 이미지의 여배우

"세라 스누크"의 이름이 "제인"이다.


관객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만든 것 같고,

또한 이 이야기가 상징적이고도 비유적으로

우리 모두를 다룬 것임을 대놓고 드러낸

것인 양, 단순하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다.


"존"은 정체불명의 조직에 속해서

"피즐 폭파범"이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면서 1970년대에 엄청난 테러를

뉴욕의 빌딩에 가해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고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친 자를

잡고자, 정해져 있는 타임 슬립의 시도

가능 기간 동안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때마다 놓치고, 결국에는 자신의

얼굴마저 잃어 새 얼굴을 가지게 된다.

인류에 대한 엄청난 사명감을 가지고 버닝 아웃 상태에 이른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임무 완수를 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그 임무를 성공시킨다. 그러나...

그리고 최후 임무를 수행키 위해 한 바의

바텐더로 위장하고 "피즐 폭파범"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제인"을 기

다린다.


너무나도 분장이 잘 되었던 관계로 "세라

스누크"가 바에 등장했을 때, 여성일 거란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는데, 바텐더와

술한병을 걸고 자신의 이야기가 매우

새로울 거라 자신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제인"의 과거사가

드러나게 된다.

바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그가 여성이었을 거란 느낌은 거의 받을 수가 없다.

"제인"은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사고로,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여성기를 상실하였다.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퇴화된 남성기가

발견되어 이를 복구하여 남성이

되어버린, 구구절절이 기구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트랜스 젠더"란 이유가 아닌

색다른 성전환자가 나온 것이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기에서부터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남다르게 여성 답지 않은

힘과 성별 불문하는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었던 것부터 특별하다.

단지 색다른 이야기를 던져서 술을 한 병 꽁짜로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마치 익숙하게 알았던 사람을 만나 털어놓는 것 처럼 "제인"은 처음 만난 "존"에게 전부 이야기 한다.


나중의 충격적인 반전 전에 드러나는 전조

중에 하나는 그가 여성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남성기도 함께 가진 사람이었던

부분이다. 이 부분이 스토리상 매우 중요하다.


넘쳐나는 힘과 뛰어난 지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아” 태생과 주변 사람과의

폭력적인 반목이 계속되면서, 당시의

시대상에 맞춘 사회적 성공을 위해 우주

조종사의 위안부가 되는 교육 과정에

지원했다가 동료와 싸운 탓에 해고당한다.

이런 그녀가 남자기 되어 살아가게 되는 기구한 사연이 설득력 있게 등장한다.

이 부분은 가상 및 평행 현실 영화라

실제 미국 역사상 이런 일이 있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중에 이 교육을

진행한 집단이 “피즐 폭파범”을 잡기 위해

타임 슬립을 하는 요원을 배출하는

비밀 기관이란 설정도 있어 허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아기가 생기자

그 남자는 냉정하게 사라져 버리고,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여성기가 소실되어

의사가 발견한 남성기를 대신 복구해 주어

남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기는

누군가에 의해서 납치되어 사라진다.

"제인"을 사랑했다가 비참하게 아기만 남겨 두고 떠난 그 남자가 누구였을까? 그 남자가 피즐 폭파범일 것이라 생각하며 추적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다.

엄청나게 기구한 사연 밖에 남지 않은

그는 그 내용을 모티브로 해서 고백 및

폭로 내용을 올리는 잡지에 필명을

가상으로 만들어 자극적인 기사문을

기고하는 작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존”은 그를 데리고

타임 슬립을 하는 바이올린 악기 케이스

모양의  장치를 사용해서 그를

“피즐 폭파범”일 것으로 추정되는, 갑자기

사라진 그 남자를 처음 만난 시대의

그 장소로 데려간다.

그곳에 도착한 다음, "존"은 마치 "제인"을 이용해서 "피즐 폭파범"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이 부분부터 세 번의 반전이 나타난다.

1. 알고 봤더니 "제인"이 여자였을 때

만났던 남자는 남성화된 "제인"이었다.

만난 뒤 서로의 취향을 “당연하게" 맞추면서

사랑에 빠져, “제인"이 "제인"을 사랑한

과거를 만들게 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자신의 불행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원망하려야 할 수가 없도록.


애초부터 "존"은 이렇게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남성화된 "제인"을 과거로

데려왔던 것이다. "제인"은 자신의 과거를

그 상태로 남겨두고 다시 돌아와 "존"이

속해 있는 조직에 속하여, 그와 같은

타임 슬립 임무를 수행하는, "존"의

은퇴 후의 후임자가 된다.


2. "제인" 둘이 서로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존"은 "제인"이 낳은 아이를

병원에서 납치하여 "제인"이 발견된

고아원에 찾아가 그 앞에 내려놓고 온다.

그럼으로써 "제인"의 아기가 "제인"이

되도록 만든다.


3. 폭파 전 날의 뉴욕의 테러가 발생한

빌딩 근처에 숙소를 잡은 "존"은 근처

코인 세탁소에서 드디어 "피즐 폭파범"일

것이 분명한 자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이 자신의 바뀐

얼굴임을 알게 되면서 경악케 된다.


계속 쫓았던 미래의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이 죽게 되는

스토리가 계속 반복될 수 있을 것”이란

경고까지 들은 상태에서도  “존”은

미래의 "존"을 쏴 죽이고 임무를 마친다.

결국 테러는 방지되었고.


4. 그러면서 모든 영상이 "존"의 머리

속에서 한 번의 점프샷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는 결국 고아원에 버려진

"제인"의 딸이 자라나 "제인"이 되고,

그 "제인"이 남성이 된 후, 타임 슬립

비밀 기관에서 "피즐 폭파범"을 잡기

위해 여러 시간대에서 뒤쫓다가

얼굴에 화상을 입어 성형 뒤에 "존"이란

이름을 갖게 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뒤쫓았던 "피즐 폭파범"은

결국 이 임무로부터 은퇴한 뒤에

생각이 바뀌어 과거로 돌아가 인류를

테러한 "존"이었으며, 그를 죽인 자가

또한 "존", 자기 자신이 된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길게 쓸 것도 없이 이야기가 간단히 정리 된다.

스토리 자체의 반전의 연속도 대단한

임팩트를 주었고,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의 나까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스토리의 결말은 어이없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극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인가라는 경탄을

낳게 만들었다.


내겐 이 이야기의 끝이 이렇게 설명된다.

"자신의 기원과 끝을 완벽한 스토리로

마무리하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개념으로

만들 수 있다면, 완벽하게 통합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란 내용이다.


이것은 운명처럼 정해지지 않은 각 시간

대의 삶을 통합하며 수없이 반복되는

자기 통합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그것은 얼핏 비극 같지만, 그것이 앞으로

각각의 우리 삶에 남겨진 과제가 될 것이란

깨달음을 선사한다.


우리가 결국에는 타임머신을 만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있었던

일들의 기억과 앞으로의 미래에 있게

될 우리 각자의 모습에 대한 나름의

통합된 스토리를 가지고 완결된 삶의

모습을 살아가면서, 계속 변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현키 위해 노력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나와 다른 인종이나 대학교,

직장, 성별, 전 직장, 지역, 취미 등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평적으로

널리 퍼진 이 다양한 인간의 모습은

내가 될 수 있는 여러 개연성을 가진

나의 또다른 모습일 수 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는 수직이고

공간적으로는 수평인 삶 속의

다양한 내 모습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의 아름다운

완결성을 살짝 내게 드러내 준 영화

그것이 “타임 패러독스, Predestination”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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