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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y 04. 2020

<학살 기관>-테러의 문법

마니악한 소재를 파괴력 있게 다루다. 실사판을 기다리려 함.

난해한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애쓰면, 상대방은 자신이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나름 몇 번 이상 더 쉽고도 알아듣기

쉽게 다듬어 보려고 노력했겠지만

결국에는 스토리 자체는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음에도, 비주얼과

감각적인 영상, 이른바 제대로 된

파괴적 미학과 결합한 폭력 영상을

담은 "애니메이션"이 하나 만들어졌다.


이 극화는 한국어로 된 한자명을

그대로 읽자면, 그저 학살을 일삼는

일종의 "기관" 곧, "Institute"나

"organization"과 같은 일련의

공적 성격을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organ",

"장기"등의 "신체 기관"을 일컫는

뜻을 갖고 있었다. 확실히 일본색이

강한 제목이었다.


이미 오랜 인류의 진화의 역사 속에서

자체적인 식량 자원의 배분 인구 조절로

인류의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각 인종과 국가, 민족, 지역별로

무의식적인 학살 행동을 촉발하는

"기관"이 인류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고, 이를 자극하면 서로를 죽이게끔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 꽤 진지하게

설명되면서 여러 차례 나온다.


선천적으로 학살을 일으키는 기관이

특정 문법의 언어에 맞춰 작동한다는

진화심리학+생물학+언어학+액션이

그럴 듯하게 결합된 특별한 내용이다.


이것이 한 번에 머릿속에 들어와

차곡차곡 정리되기가 쉽지 않고,

과연 어떤 메커니즘이 제대로

"학살"을 일으켰는가가 감각적인

몇 개의 액션씬 속에 숨어서 사라지기

때문에, 약간은 막막한 끝장면에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학구적인 악당인 "존 폴"이

MIT 출신 운운하는 찬란한 기술문명과

결합된 차갑고도 지능적인 존재로

나오고, 문학적인 견지에서 언어의

힘의 영향력을 믿고 있는 그 역시

엘리트인 "클라비스 셰퍼드"라는

스파이와 특전부대의 중간 성격을

가진 군인이 나왔다.


그러면서 극 중 여성 캐릭터 못지않게

미소년에 가까운 30대로 그려지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사실 여성 인권이건

남녀노소 모두의 인권이건 잔인하게

인류를 말살하는 내용으로 덮여 있지만

여성 취향의 영화라고 이야기해줘도

무방할 정도로 "미소년", "BL물"의

인상을 적지 않게 뿌리고 있다.

부대원들의 스타일은 그 어떤 적도 따라올 수 없을 최상 수준이다.
그 둘은 마치 동전의 앞 뒷면처럼 그려졌다. 서로 위치한 자리만 다를 뿐 같은 존재인양 그려진다.

"존 폴"의 불륜 애인이자 "클라비스

셰퍼드"의 애정을 빼앗은 육감적이면서도

지적이고 주도적인 이미지의 "루치아

슈크로우프"는 "존 폴"에게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그가 일으킨 "영미권에

향해진 테러리스트 민족과 인종, 국가의

언어가 가진 문법”대로 "학살 기관"이

작동될 수 있게끔 언어를 살포하여

벌어진 "대량 살육"의 죄과를 "존"이

받게끔 만들려고 시도하다 무표정한

상태로 어이없이 살해당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불륜

행위 중에 불륜 상대 가정의 부인과

아이가 테러로 죽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이나 애정 그 자체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처신하는 모습은

극화에서 그다지 보기 쉽지 않은

"불륜 여성"의 모습이다. 욕망에

솔직했더라도 "이성"이 살아있는

여성 캐릭터가 그려졌다.

죽기 전까지의 그는 당당하고도 지적인 명료성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다.

극이 상당히 마니악하기 때문에 그만큼

지구를 둘러싼 액션 영화가 가진

적지 않은 "클리셰"를 파괴했다.


1. 통각을 마비시키는 나노 머신 약물

처리를 한 미국 특전대와 제3의 테러리스트

국가에서 마약을 복용한 채 싸움에 내몰린

어린 테러리스트들을 대비시켜, 과연

무엇이 다른가란 질문을 던진다.

거의 총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기고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묘사 되었다. 테러리스트와 대테러부대 간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스쳐간다. 압도적인 화력에는 죄가 없는가?

2. 역사적인 의식 같은 것이 없는 상태로

"테러"는 나쁜 것, 막아야 하는 것 등으로

포장하는 영미권의 논리에 일부 동조하는

작품인 것처럼 만들어 가지만, "존 폴"이

사랑하는 가족을 테러에 의해서 잃게 된

뒤에 복수심으로 "테러"를 행하는 각 지역

사회에 자신만의 "테러"를 가하면서

미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

궤변을 듣게 되면, 그것만큼 반어적인

표현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3. 사실 영미권이 테러로부터 안전해

지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점령하고

부를 빼앗아오고 "친미" 또는 "친영"

정권을 통해서 이권을 지속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대대적인 화해와

통제를 벗어던져야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칙처럼

역사적으로 "당한 쪽"이 자신의 오래

전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테러"를

하고 있는 상황을 무시하면서 테러를

영미권에 가하는 국가만을 욕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논리적 결락을 갖고 있다.


4. 그래서일까 극 후반부에서 갑작스럽게

"클라비스 셰퍼드"는 영문의 "학살 기관"을

자극하는 언어를 뿌리며,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그 해악이 전방위로

나타나게끔 만들어 버렸다.


5. 911 이후의 유럽과 미주는 철저하게

감시 카메라와 인증, 데이터화 된 정보

통제로 관리되고 있는 사회로 그려지지만

그와 동시에 신체 인증을 카피해서

사라진 존재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무방비한 면모를 노출한다. 결국 이 패턴을

파악해서 다시 체포한다는 언급이 잠시

나오지만, 무조건적인 통제만이 대테러

방법이다란 신념에 대한 공격이 이뤄진

셈이다.


6. "프란츠 카프카"의 난해한 소설과

어려운 "체코어"에 대한 설명(단어가

대략 200가지로 변화 가능함)이 나오면서

다소 문학과 언어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자극할 만한 약간의 현학적인 대사가

오가는 장면이 있다. 마치 "맥거핀"처럼

결말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다만 각 언어 간에

큰 차이가 있다는 내용과 언어를 그저 빌린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정체성과 일치된

것으로 생각하는가의 언어철학적인 논쟁이

오가는 느낌을 선사했다. 이 역시 특별했다.


극의 끝에 이르게 되면 상당히 마니악한

결론인 "모두가 다 불행해져(죽어) 버려!"라는

급진적인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통해 세계에 만연한 테러와 인종차별,

선진국, 후진국, 정보통제의 허상 등의

여러가지 편견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높은 수준의 흥행은 기록하지 못했던 것

같고, 그 외의 국가에서는 제한적 상영으로

끝났거나 VOD 시장으로 급강하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할리우드에서 판권을

사서 실사 영화로 만든다는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이전의 "인랑"의 실사화

실패, "총몽"의 "베틀엔젤_알리타"의

그럭저럭 흥행 이후, 또다시 거대한

프로젝트가 "박찬욱" 감독에 의해서

실행될 수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결과는 이 시점에서 알 수 없지만, "올드보이"를 축약해서 화끈하게 만든 그의 전적이 통한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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