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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Dec 27. 2020

<올드 가드>-스키타이족을 소환하다(1)

두 영화 속에서 스키타이인들이 소환되다.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아직 두 영화,

"올드 가드"와 "레전드 오브 토미리스"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유의 부탁드립니다.


 "올드 가드"를 보면서 불사의 존재들을 다룬

다른 영화나 극화를 한번 다시 떠올려봤다.

그러다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된 "스키타이"가

내내 관심을 끌었기에 스키타이 족이 언급되고

있는 영화나 극화도 찾아 보게 되었다.

이 다섯명과 물 속에 빠져 있는 "꾸인" 6명이 불사의 능력을 가진 Old Guard들이다.

그리고 “레전드 오브 토미리스”라는 영화가

스키타이 족이 페르시아를 무찌른 역사적인

사실과 연결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나라가 “카자흐스탄”, 2000년에

내가 잠시 있었던 곳임을 알게 되자마자

개인적으로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일대일의 무력으로선 당대의 누구도 이길 수 없었다는 스키타이인의 전설을 그린 영화다.

"올드 가드"의 중심 스토리는 불사의 존재가

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해서

대를 이어 "악"의 세력과 투쟁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통상 "불사의 존재"는 여러

극화에서 항상 정의의 편으로만 그려지진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들은

자신의 불멸성을 팔아 돈을 벌기 보단,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하는 선한자들로만 순진하게 그려진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가 전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동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랑이나

인간관계, 성취하려고 애쓰는 여러 가지

일이나, 달성하려고 애쓰는 성과 등이

어떻게 의미가 없어질지 알 수 있다.


"만약, 나를 포함한 특정한 사람 몇몇만

불사를 누리게 된다면?", 아마도 살아 있는

내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나를 사랑하지만 늙고 죽어가는 이에겐

당혹스러움을 줄 것이며, 그들이 죽은 이후에

계속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만들어 가더라도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릴 수 없는 내겐

그들이 죽어간 기억은 계속되는 슬픔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만큼이나 "불사"라는 것은 일단 죽음이나

노화의 공포와 고통으로부터는 당장 멀어지게

해서 좋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사실은 하나

빠짐없이 모두가 "불사"라면 혹시 몰라도,

몇 명만이 불사가 된다면, 그 소수에게는

축복보단 큰 저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불노불사"의 미래가 그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에게 행복한

것만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은 조금만

더 생각을 기울여 보면 알 수 있다.


그 조금만의 생각이 성찰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올드 가드"란

작품이 가진 약간의 깊이였다.


 "불노불사"의 존재가 숨어 다니면서

인류의 존속과 평화를 위해 계속

싸우고 다녔지만,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시대에 따라서는

악마나 마녀로 오해받아 불태워지거나

수장을 당하기도 한다.

"앤디"의 호흡이 잘 맞았던 파트너로 그려지는 "꾸인"은 갑옷에 갇힌 채로 수장되어 "올드 가드"들에게 계속 익사 당하고 있는 끔찍한 악몽을 전달해오다. 끝에 나타난다.

버려지고, 숨겨진 채로 간간이 살아가면서,

동시에 설정에 따르면, 그 "불노불사"

마저도 간간히 되지 않을 때가 오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죽을 수 있는

존재로도 그려진다. 새로 불사인이 하나

생기면, 불사인 하나가 죽게 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설정이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종교와 관계 없는 것으로

나온다.


 아마, 이 원작 코믹스의 판매 부수와

이 영화의 흥행을 높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설정이었으리라 생각해본다.


 절대적으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존재만으로 "올드 가드" 전체의

캐릭터를 한정하게 되면, 영화는 그저

"불노불사"에 대한 비관적 견해만으로

끝나는 영화가 될 수도 있지만, 주인공인

"샤를리즈 테론"의 "앤디"가 갑자기

상처가 재생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것만 같은 상황이 되자, 그 싱겁고도

부정적으로 묘사된 "불노불사"가

갑자기 가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 그들이 만난 악당은

"돈"을 버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사람의

목숨이나 인류의 존속, 평화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채

수익성만을 지향하는 기업형 악당이다.


 그 역할을 전형적으로 연기해준 제약회사의

사장은 어이없이 죽기 전까지 "불노불사"인

"올드 가드" 전부를 단지, 생체 분석을 통해서

재생 치유 성분을 뽑아낼 수 있는 인간성이

배제된 원재료로만 다루는데,

그 어느 시대에 맞서서 싸웠던 적보다

"올드 가드"에게 이만큼 유해한 적은 없으리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소소한 SNS의 범람에 따라 자신이 찍힌

사진을 우연히 자신을 찍은 사람의

모바일폰에서 지워내는 장면이라든가,

오랜 역사적 자료들을 다 이어서 보았을 때

이 "올드 가드"가 얼마나 인류에게 고마운

존재인지를 추적하고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해진 정보망의 모습은 이런 "미스테리어스"

한 스토리를 영화 속에 그럴듯하게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진 시대인가도 떠올리게

해준다. 이런 시대에도 그럴듯하게 전설을

만들어내려면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리라.


자신이 우연히 들어가게 된 사진을 휴대폰에서 지우는 장면은 리얼리티를 확실히 강화한다.

자칫 잘못 이야기를 만들 경우,

관객은 아무런 것을 느끼지 못할 만한

소재가 바로 "불노불사"인데, 그것을

벗어나 조금이라도 성찰 비슷한 것과

깊이를 남겨보려 신경 쓴 흔적이 느껴진다.


 또 하나 두 남자 동료가 서로 붙잡혀

고문 당하고 생체 실험을 당하는 중에

보여주는 정말로 신체의 매력이나 성욕을

떠나간 깊이로 작용하여 서로 간의 정신적인

존경이나 갈구로 맺어진 것처럼 외치는

격렬한 대사가 나온다.


 그 두 남자는 운명으로 맺어진 남녀 간의

처절한 대사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격렬한

사랑을 서로에게 표현하는데, 그 짧은 대사가

오가는 강렬한 순간에 강력한 사랑의

정신적인 연결이 "불노불사"의 상태에서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결합이 될 수 있을지를

잠깐이나마 상상하고 느낄 수 있다.


동성애가 아니라 몇백년 이상 이어진 사람과 사람간의 강력한 의식적 결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불노불사를 다룬 여러 영화의

클리셰들을 벗어나 새롭게 설득력

있게 보여준 장면 중에 하나였다.


 "앤디"로 불렸던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수천 년이 넘어가는 수명을 지닌

리더의 이름이 “앤드로마케”이고,

스키타이인의 이름이다라는 설명이

나오면서 이제 “넷플릭스”라는 백인

문명의 집합으로부터 나온 애플리케이션

미디어가 백인 문명보다 점점 더 화려해지고

정밀해지는 아시아의 문명을 더 연구하고

그 지역의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자부심과 그 자부심의 근거를 찾는

시대에 이르렀구나란 감탄사가 올라왔다.

중앙 아시아에는 여러 인종이 모여 있다. 금발도 있고, 흑발도 있고, 고증이 어긋난 화이트워싱은 아니다.

문화 상품의 진화는 결국에는 그 상품을

구매할 소비 집단이 어디 있는가에

달려 있고, 그렇게 팔리는 문화 산물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국가로부터

그 상품을 만들어 낼 것인가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할리우드”에서건 “넷플릭스”에서건

결국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지역의

“문화 소비자”와 “문화 창작자”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역사적 신비와 실제를

파고들어 지금까지 와는 다른 문화적

소스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창작을

위한 다양성을 잃게 되고, 벌이도

신통치 않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문명. 아직 때가 타지 않은 채로

엄청난 무력을 가졌던 순수 유목 민족의

신화와 문명의 발달사 속에서 어느 순간

주변에 흡수되거나 사라져 갔던 강인한

민족인 “스키타이”는 이제 바야흐로

동아시아권의 문명을 다루는 것조차

진부해진 이 시대에 낯선 문명권인

“중앙아시아”라는 새로운 문화적

영역으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관심을

이동시키는 것 같다.

이 영화는 고임금 국가가 CG로 대체한 대량 인력 동원의 전쟁씬과 광활한 황무지씬을 그대로 스크린에 실사 자체로 살려낸 희귀한 작품이었다.

이 분위기에 맞춰서 이제 다음에 이야기

해볼 영화는 직접 “스키타이”의 후예인

“카자스흐스탄”인이 직접 자신의 땅에서

만들어낸 영화 “레전드 오브 토미리스”다.

그냥 후진국에서 만든 영화라고 하면 일단,

“왜 그런 것을 봐야 돼?”라는 선입견이 강한

분에겐 꼭 소개하고 싶진 않은 영화다.


그러나 우리의 영화도 오랫동안 3세계의

싸구려 작품이었다. 내가 2000년에 들려서

경험했던 “카자흐스탄”의 문화적 지향점은

“일본”과 “한국”이었다. 그들은 러시아나

중국보다 자신과 보다 가까운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그들이 문화적 지향점으로

생각했던 “일본”과 “한국”을 바라보며

만든 그들의 스케일로서는 정말 커다란

작품의 수준은 어떠한 것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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