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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an 10. 2021

<원더 우먼 1984>-“지니”에 대한 성찰

지니의 흑화 버전에 대한 성찰

스포일러가 크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결말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로부터
영화를   얻는 새로운 경험의 즐거움을
빼앗아 가듯이,  영화 속의 소원을 들어주는
황수정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각각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가져갑니다.

시사회가 벌어진 미국 현지의 통신에서
“원더우먼 84” 곧 “WW84”는 엄청난 극찬을
받고 있었다. 그에 이어서 약간의 간극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이후, 솔직히 내가  
기대했던 것은 “TENET”을 뛰어넘는 호평과
더불어 코로나 19를 무력화하는 흥행이었다.

명실상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익히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어디까지나
코로나 19 하에서의 상대적으로 높은 흥행에
그치고 있어 안타까웠다. 1위는 맞았지만
실제로 이전만큼의 화려한 흥행성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악평을 읽어보고 요약을
해보자면, 1편에서 보았던 원더우먼의 강력함이
많이 시들었고, 빌런을 맡은 배역 또한 그다지
강하지 않은 이들이어서 서로 대결할 때의
임팩트가 높지 않아, 기대한 만큼의 액션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스티스 리그”로 이름 붙였던 2개의 영화나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같은 망작의 수준이라고
단언을 하고 있어서, 그 이야기들만 들어서는
절대로 봐서는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류 감독인 “패티 젠킨스”가
그렇게까지 망작은 남기지 않았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원더우먼” 1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엔 단순히 스케일이 크고, 액션이 엄청났다는
직선적인 이유만 있지 않았다. 그곳엔 매력적인
스토리 라인이 살아 있었다. 노골적이기보다는 

잔잔하고 애잔해 보였던 이뤄지지 않은
로맨스가 있었고, 신화를 촌스럽지 않은 현실로
잘 형상화한 영리함이 살아 있었다.

그렇게 내가 가진 “촉”을 믿고 본 “원더우먼 84”,
“WW84”로 짧게 쓰인 그 영화는 과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는 영화였고, 현시대의 미국의
상황을 시사적으로 담았으면서도 화려한 신화와
전설을 결합하는 데에도 성공한 수작이었다.

그렇다면, 왜 적지 않은 관객이 영화를 

욕했을까? 그 이유만큼은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쓰게 되었다.


1. ‘황수정’으로 ‘원더우먼’과 ‘치타’, ‘맥스웰’은
자신들이 욕망했던 것들을 일거에 성취한다.

그들은 일거에 자신의 소원을 이룬다.


2. 그 과정에서 ‘황수정’ 그 자체가 되기를 원한
‘맥스웰’의 영리한 ‘소원’은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쪽으로 급속하게 이동한다.

3. ‘황수정’은 ‘소원’ 성취를 바로 해주는 대신에
그 ‘소원’을 비는 사람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것을 뺐어가는 악한 ‘신’의 저주였기 때문이다.

스토리와 액션, 배우의 연기가 그런 극화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형상화했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지루함마저 줄인 상태로
잘 만들어진 품질이 나왔지만 적지 않은 관객의
‘분노’를 산 부분은 “왜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는

환상적인 내용을 그 소원을 원했던 사람들의

파국으로 가져갔는가?” 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로서의 미덕을 갖고 있었지만,

그 안에 관객의 거부감을 낳는 부분이 컸다.

주식 투자를 하던가 그 외의 재테크 등을 하는
사람들의 보다 나은 인생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
집중하여 욕망의 대상을 어떻게 성취할지
그런 내용을 열심히 이야기했던 사람들에겐
“그렇게만 살아서는 모두가 행복해지지도
않을뿐더러 멸망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와 진실을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물적인 욕망의 충족만으론 망한다.

이런 정론에 가까운 교훈이 짜증 났으리라.

하나 더, 첫 장면에서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취한 승리는 올바른 승리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도 올바른 진리로 들리기보다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익을 극대화해서 지금보다는

나은 삶을 살 방법을 찾아 행복을 쟁취하겠다고

다짐하고 살고 있는 사람에겐
힘 빠지는 잔소리처럼 들렸을 수 있었다.

부정한 방식으로 얻은 승리는 부정당한다.


미국인의 반 가까이는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미국을 우선시하여 더 위대하게 만들겠다”라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욕망을 부추긴 “트럼프”의

선동이 잘 먹혀 들어갔다.

그러나 그런 이기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수많은
지지자를 끌어들인 “트럼프”의 집권 기간 4년간
세계는 더 위험해졌고, 코로나 대응이 어떤
국가보다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미국인”들을

더 위험한 상황으로 속절없이 끌고 갔다.


다른 국가도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도록 영향을 끼치면서, 점점 더 세상은 
욕망을 드러내 놓고 추구하면서 험악해지고,
조화와 협력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를 처리하기 
어려운 쪽으로 나아갔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양진영으로 갈려 파멸의 핵 치킨 게임을 했던

시대보다도 더 위기를 향해 거의 모든 국가가

달리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맥스웰”은 “돈”, “명예”를 극대화하고,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는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중요한 것들을 빼앗아 오다가, 인류를 절멸시킬 
상황이 벌어지고, 사랑하는 “아시아 인종인
아들”의 생명이 위태해졌음을 깨달은 뒤에야, 
소원을 취소하는, 양심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자신과 타인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겐 실망스러운 모습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맥스웰”의 어린 시절 이민자로서의 설움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노력한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황수정”의 수단이 되어
인류를 절멸로 이끌어가는 모습에 비교해서,
자신의 진실을 보고 약한 아버지로 돌아온
것이 적지 않은 관객들에겐 “약해빠진 빌런”으로
밖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전작보다 약해진 빌런 때문에 기대했던 재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극 중에 평범한 우리를 대변하는 캐릭터인
“바바라 미네르바”는 직장에서 아웃사이더로서 
형편없는 취급을 당하고, 움츠린 태도와 

볼품없는 패션, 빈약한 외관으로 설움을 

겪다가 “원더우먼”의 위장된 신분인 “

다이애나 프린세스”처럼 강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기를 소원한다.


“황수정”을 얻고 그 소원을 빈 뒤에 순식간에
훨씬 더 매력적이고 강력한 존재로 변화하고,
나중에는 그러한 매력과 힘을 잃지 않기 위해 
“원더우먼”과 대등한 파워를 가진 모습으로
싸울 때, “원더우먼”보다 그에게 감정을 이입한
적지 않은 사람에겐 모든 ‘소원’이 취소되는 

결말부는 또한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강력한 “원더우먼”의 액션을 기대했을 관객에게
 “나는 오늘을 지킬 테니 당신은 인류를 

구해요”라고 말하며 희생하고 죽어갔던 

“스티브 트레버”가 다시 살아오는 소원을 

“원더우먼”이 “황수정”에게 빈 뒤에, 그가 다른 

사람의 몸으로 돌아오고, 그 때문에 자신의 

강력한 힘을 잃어가게 된 것은 또한 실망스러운 

"원더우먼"의 액션을 경험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그는 피를 흘리고 두드려 맞는다.

그 소원을 성취하지 않았다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악당과 싸웠을, 액션의 박력이 

“슈퍼맨”에 필적했던 “원더우먼”이 

일반인 "바바라"에서 “원더우먼”급이 된
“치타”보다도 강하지 않게 그려졌다는 것이

그들에게 실망스럽지 않았을 리가 없다.

치타가 훨씬 더 강해진 순간이 나온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영화가 수준급으로 잘 

만들어진 중요한 이유는 그 오밀조밀하면서도 

속도감 있고도 어색함 없이 잘 풀어 나간 

“우화에 까까운 스토리”에 있었다.

1. 이전의 전통적인 티브이와 코믹스 시리즈에서

원더우먼이 자주 탔던 투명 비행기가

등장했던 것도 백미였고, 힘을 잃었던 대신

이를 보강하기 위해서 입은 황금 갑옷의
비주얼이 화려하고도 매력적이었다.


2. “자기중심 주의의 비극”을 우화 같은 

단순화된 스토리로 쳐다볼 수 있는 훌륭한 

은유와 비유가 나왔다.

3. 미국의 물질적인 욕망과 이기심이 

극대화되었던 화려했던 시절인 “1984”년을 

배경으로 깔았지만, 배면의 긴장도 최고였던 

“냉전” 속의 핵 대결 시대도 떠올리게
해 줌으로써, 관객이 과연 그 시대가 우리가
꼭 돌아가야만 하는 이상적인 시대여야만 

하는가 하는 성찰을 떠올릴 수 있게 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지고
시대를 잘 반영하여 감동도 주는 명작이었다.

다만, 도덕적인 훈시를 담은 영화에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관객에겐 권하지 못할 작품이 됐다.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는 “황수정”이 엄청난
함정을 파고 소원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마야”
문명 같은 몇 개의 문명을 절멸시켰던 것처럼,
“이기적인 욕망”만을 성취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이 시대가 과연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는가라는 성찰을 조금이라도 하고
경계하는 관객이 아니라면,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의 팬이라면,

노골적으로 “트럼프”를 공격하고 있는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패티 젠킨스”와 더불어 적지 않은 스태프들이

분명히 “트럼프”를 적으로 삼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단점은 그 정치적인

공격이 풍자의 수준을 넘어 너무 진지한데 있다.


그러나 그런 진지한 목소리로 깨워도 듣지 않을

광기에 휩싸인 “트럼프 지지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코로나”를 퍼뜨리고, 증오와 분노를

합병증처럼 선사하는 미국의 현실에서

이 영화의 진지함은 이해가 되어야 하는

당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얼마 전에 "트럼프"의 선동에 의해

미 국회 의사당에 몰려가 쿠데타에 준하는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저 이성과는

별 상관없는 선동에 휩싸이는 그들을

누가 올바른 이성으로 이끌 수 있겠는가?


영화는 야심만만하게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왜

상업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 못할 히어로 무비의 적잖은 팬들에게

실망감이 일어났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실망할만한 요소.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알레르기를 떠나서 본다면 재미있다.


극 중의 빌런인 맥스웰보다 더 강력한 빌런이 현실에 있는데, 영화의 빌런이 강해 보일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에 잠시 등장한 “원더우먼”의 세속

세계 선배 “아스테리아”로 등장한

“린다 카터”의 모습은

웹을 검색하면 쉽게 볼 수 있지만,

굳이 여기에 붙이진 않으려 한다.

기품이 있게 연세를 드신 시들지 않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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