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reedom plus

<스케이트 보드와 글쓰기>

불현듯 아이가 타는 스케이트 보드와 내가 쓰는 글이 겹쳐 보였다.

by Roman
너무 강해서 부러지지 않아야 하고 동시에 너무 약해서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아이가 불쑥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일면 아쉽고도 뿌듯하고 기쁜 일이다. 수많은 아이 부모들과 다를 바 없이 나도 아이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꿈꾼다.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게 나의 첫째이자 외동인 아들은 그 나이 때의 나와 비교해서 아는 것도 훨씬 더 많고, 더 자기주장이 강하며, 더 귀엽고, 더 강인한 체력과 운동 신경을 갖고 있고, 키도 크고,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뭐라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감사할 수밖에 없게 자라나고 있다.


경이롭다. 물론,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 여러 기획이 적용되고 있고, 어느 정도는 아이가 잘 따라가고 있고, 어딘가는 아직 못 미친다. 그러나 그냥 내가 보기엔 나란 일반인에 비춰서는 슈퍼맨이 하나 자라나고 있는 것 같다.


윗몸일으키기 게임을 같이 했더니 30개 이상을 더하고, 메모리 카드 게임 같은 것을 하면 거의 지지 않는다. 블랙잭도 가르쳐 주고 나니 승률이 더 높고, 그 외의 다른 게임도 일단 이해하고 게임의 규칙만 습득하면 금세 뛰어넘는다. 태권 도장에 보냈더니 다른 아이에 비해서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다고 자랑도 한다.


봐주고 뭐고 없이 나와의 동등한 경쟁 상황에서 하는 게임이라면 전혀 밀리지 않는다. 다만, 아직 아이인 관계로 키와 힘에 관련해서는 아직 비교할 방법이 없지만, 이 녀석이 사춘기쯤에 이르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가 너무 뻔해서 기쁨이 가득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도 생긴다. 언젠가 이 혁명군이 체제를 전복하려고 반기를 들 순간이 내가 어렸을 때보다 분명히 빨리 올 거란 예감이 든다.


혁명군이 세력을 형성하길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기왕이면 제대로 된 혁명군을 맞이하고 싶은 게 솔직한 아빠의 심정이다. 적어도 오합지졸에게 정권을 뺏기고 싶진 않다. 귀여움으로 정권을 전복하는 것은 나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녀석의 미래에 대해서 조금씩 두려움이 생긴다.


이 번쩍거림이 무언가에 눌려서 사라지지 않을지, 내가 보기에야 훌륭한 녀석의 모습이 그저 더 나은 아이들에 비하면 별볼일 없는 것이라 여겨지게 되진 않을지, 아니면 정말 훌륭한 모습이라고 확신하고 그다음에 필요한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다가 오히려 더 뒤떨어진 모습이 되진 않을지, 그런 훌륭함 자체가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변하는 시대를 갑자기 맞게 되진 않을지 등등의 고민이 크다.


자만심에 빠져 자신이 이미 열심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큰 함정이 될 수 있다. 그 함정에 빠지면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물려받은 천재라고 해도 빛을 잃고 수년에 걸쳐서 천천히 희미한 존재로 변해간다.


학교 교육 과정에서 인정받거나 또래 집단, 넓게는 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라면 그런 능력은 가지지 않은 만 못한 능력이라 본인의 엄청난 고집이 더불고 부모까지도 그 고집에 열광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이상 더 나아질 가능성은 비좁은 공간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평생의 취미 같은 것이라면 의미가 있다.


자신이 최고라고 믿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더 뛰어난 다른 아이를 많이 만나면 그런 아집이 깨지고, 자신의 능력이 그 와중에도 더 나은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다른 것을 택해야 할지 아니면, 뛰어난 아이 중에 하나만이라도 되려고 하던지, 평범하더라도 의미 있게 사교성이 높은 사람이 되던지, 자신보다 나은 친구를 더 많이 사귀어서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겠다는 등등의 보다 현실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경제적으로 부모가 해 줄 수 없는 영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한 미련을 접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등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한계를 뛰어넘을 방안을 찾는 영리함도 같이 자라나야 이른바 균형 잡힌 성장이 가능해진다.


자신의 성공과 그 성공을 통해 거둘 행복의 총량을 잘 감잡을 수 있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와 머릿속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를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어느 것도 내가 어렸을 땐 잘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여늬 부모와 다름없이 자식은 자기보다 나은 존재가 되길 바라기 때문에 외우는 주문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언젠가는 부모라는 한계점을 넘어서서 보다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 이른바 나름의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처절하게 깨지고, 신념의 혼란을 느끼고, 질투와 시기를 경험하며, 모함과 모략을 마주하고, 따돌림도 잘 겪어내야 하고, 학교 폭력에 있어서도 그 어느 쪽에 속해서 일방적인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을만큼의 적정한 수준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져야 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분을 가질 수도 있어야 하고, 때때로는 위선적이거나 위악적이기도 해야 한다.


너무 강해서 부러지지 않아야 하고 동시에 너무 약해서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정의로운 명분을 잃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술수를 미리 알고 역으로 쓸 줄도 알아야 하고, 상대의 창에 맞춘 뚫리지 않는 방패와 상대의 방패에 맞춘 뚫을 수 있는 창을 미리 준비해서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진지한 문장을 진지하게 아이에게 불어넣고 있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는 정말로 불확실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 지혜로운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가끔씩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이 친구에게 지겨움과 피곤함을 무릅쓰고 답변을 하고 기운이 닿는 만큼 책을 읽어주고 살아왔다. 내가 어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복잡한 세상을 이 친구가 잘 살아가도록 만들고 싶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내겐 그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케이트 보드"를 열심히 타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다. 처음에 작은 플라스틱의 보드였지만, 조금씩 잘 타려고 연습하다가 어느새 그 작은 보드로는 더 진도가 나갈 수 없음을 알게 된 녀석은 좀 더 큰 나무 합판 같은 재질의 "스케이트 보드"로 갈아탔다.


"스케이트 보드"에는 제대로 발을 대본적이 없었던 내겐 아무리 넘어지고 실패해도 보다 나은 타는 법과 묘기를 익히기 위해 끊임없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끈질기게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일면 존경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스케이트 보드"는 공적으로 아주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스포츠 종목이 아니다. 여러 의미에서 약간 불량아들이나 사회를 약간 등진 비딱선을 탄 아이들의 하드 한 놀이 용품 정도로 느껴져 온 것이 극화나 영화 등에서 묘사된 "스케이트 보드"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태권도야 도장에 가서 배우면 되고, 피아노는 어플로, 춤은 티브이나 유튜브로, 바이올린과 바둑은 방과 후 수업으로 배우면 된다. 그러나 "스케이트 보드"는 아이의 친구가 즐겨하는 놀이도 아니고 홀로 열심히 해서 제대로 타기로 마음먹은 도구였다.


동네에선 아무도 같이 타면서 놀만한 친구가 없는 듯이 보여서, 근처의 서울 북 꿈의 숲으로 가서 봤더니 그쪽에도 그렇게 썩 잘 타거나 아이에게 자극을 줄만한 "스케이트 보더"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여의도 한강 시민 공원에 갔더니 소수의 한국인과 일본인, 동남아인, 백인 아이와 청년이 모여서 분수가 나오지 않는 분수 바닥 위에서 묘기를 연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 스승이 있거나 어떤 교본 같은 게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저 그 분수대 바닥에 놓여 있는 돌출된 몇 가지 요철 부분과 경사진 구조물 몇 가지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묘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추종하고 응원하는 팬들도 특별히 없었다. 그저 그들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정해진 것도 없는 묘기를 주어진 환경에서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시도하며 될 때까지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이는 앞 옆 뒤로 넘어지면서 그들을 무리하게 흉내내기 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끊임없이 시도했다. 내가 칭찬을 한 것도 없고, 용기를 북돋워준 것도 없고, 감탄한 것도 없다. 그저 자기가 목표를 부여하고 어떻게든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만들어 이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아이와 나와의 공통점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수많은 스케이트 보더"와 "글 쓰는 이"의 모습이 겹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스케이트 보더"중에도 유명한 이가 있을지 모르고 나머지를 압도하는 기술을 가진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글 쓰는 이"중에도 압도적으로 잘 쓰고 유명한 이가 있다.


그러나 "스케이트 보딩"이나 "글쓰기"나 잘하는 것, 높은 수준의 실력은 얼핏 보기에 이미 가 닿아야 할 목표가 뻔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하고 있는 모두에게 정해진 똑같은 방법으로 도달할 똑같은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들은 어쩌면 순수하고도 바보스럽게 소수가 되던 다수가 되던 쉽게 도달하지 못할 자기만의 연습으로 닿아야 할 목표를 찾아 뛰어오르고 넘어지고, 같은 패턴 속에 빠져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쳇바퀴도 돌면서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자신만의 속도를 가지고 가까이 다가간다.


다른 취미지만 이렇게 보고 있다 보니 녀석과 나는 어느샌가 이 세상에서 마이너 해져버린 취미를 하나씩 가지고 비슷한 방식으로 숙련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 동반자였던 거다. 물론 "스케이트 보드"나 "글쓰기"나 처음 시작은 쉬우나 가면 갈수록 어려움은 더 심해지고, 그 끝까지 나름의 궁극적인 기술의 영역에 이를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취미다.


다만, 넘어지고 까지고 주변의 인정이나 박수가 없어도 자기 자신만의 만족감을 갖지 않고서는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는 그런 "놀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도 이런 취미가 있다면 견딜 수 있다. 원래 인생의 대부분의 순간은 무조건 "목적 지향적"인 것이 아니고, 무조건 모두가 박수를 쳐주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한 보상만을 바라고 살고자 한다면 사람은 지치고 원하던 보상이 손에 떨어지지 않으면, 그저 허무함에 빠지게 될 뿐이다. 그러나 하고자 하는 어떤 행위에 걸고 있는 기대가 그 행위 자체를 함으로써 오는 순수한 기쁨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는 사실 타인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다. 그에 대한 평가는 우선 온전히 자기가 내린 것이 더 많은 무게 비중을 갖고 있다.


나는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 앞 서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 두려움은 때로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가 "스케이드 보드"를 즐기고 내가 "글쓰기"를 즐기고 있는 이상 두려움이 조금 가라앉게 되는 것을 느낀다.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닿아도 아이와 나는 그것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주는 좋은 취미를 갖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는 정말로 불확실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 지혜로운 방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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