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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Sep 21. 2021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

스포일러가 나와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설픈 정의나 비현실적인 정의로 범벅이 된 동화에 가까운 극화를 적는 것보다 현실의 정말로 옳고 그름 같은 것이 명확하지 않은 삶을 그나마 약간이라도 모사한 극화가 호평을 받는 경우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영화계 전체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것이 근 10여 년 이상 각광받았던 "정의"를 환상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그려낸 히어로물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영화 비평계의 일각에서 이 작품이 더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선적인 정의를 이야기 하기보단 ‘개인의 복수심과 집단 간의 경쟁을 이용한 질서의 회복’이라는 어찌보면 미국 공화당의 “매”파적인 이념을 강조하고 있다. “이이제이” 곧, “적을 (그 적의) 적으로 다스린다”란 병법의 이야기다. 손자병법이란 동서양을 초월한 고전에서 나온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건 누구도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다. 일종의 인수분해같은 공식의 개념이니까.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쓴 “학익진”을 일본 해군이 러일 전쟁 때 갖다 써서 러시아 해군을 쳐바르는 것과 같은 것이니까.


현실을 어느 정도 잘 그려내면서도 무조건 정의가 올바르다고 그리지 않는 것. 그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세계임을 깨닫게 하는 것도 극화가 갖고 있는 사회 정의 실현의 일부일 수도 있다.


영화의 끝에 사랑하는 자신의 멕시코 경찰 아버지가 불의에 가담한 부패한 경찰로 나오다 죽음을 당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 상황에서 그의 어린 아들이 어머니가 지켜보는 중에 축구를 하고 있다가 귀를 울리는 총성에 잠시 멈췄다가 다시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축구를 시작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페이드 아웃된다.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moviedash.com%2Feditorials%2F3471%2Fsicario-examin

우린 불의가 우리 주변에 넘치는 것을 잘 알고 누가 저지르는지도 심지어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확실히 우리 각각의 개인에게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피해를 끼치기 전까지는 무력감과 무관심으로 자신을 감싸고 일상을 진행시킨다.


강력한 불의와 싸울 힘도 도구도 없고, 에너지와 시간, 네트워크를 가지지 못한 수많은 개인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멕시코 같은 남미 국가에만 한정되어 있는 현실이 아님을 금세 관객은 깨달을 수 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된다.


너무나도 상세하고도 치밀하고도 사실적으로 그같이 처참한 현실을 다뤘다면 그로부터 얻는 스트레스는 저 먼 남미 국가의 현실로만 인식하고 지워버리겠지만, 군더더기 없이 극화에 집중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 스트레스의 범위를 전혀 다른 세계의 다른 구석에 살고 있는 관객에게로도 확장시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 도시는 사실, 우리가 아직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암살자의 도시"인 것은 혹시 아닐까? 란 의문으로 이끈다.


영화가 재미있게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서 이 영화의 메시지를 관객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인식할 수 있는가가 영화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액션 영화로만 평가받고 끝나지 않는다.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게 된다면, 우리란 관객은 그 같은 현실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자로 성장하여 그에 맞는 현실적인 행동을 언젠가는 직관적으로 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카리오는 우리가 익히 아는 미국의 법과 정의의 뒤편에서 벌어져온 보다 현실에 가까운 내용을 배경으로 허구를 그려내고 있으며, 극화의 품질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화면도 사족이 거의 없는 담백함을 가진 작품인 동시에 어중간한 정의의 문제에서 위선과 위악이 발생하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을 경우에 벌어지는 차악의 필요성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읽어낸 몇 가지 포인트를 제외하고 아래의 내용은 여기저기에서 더 세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 영화에 대한 내용이다. 꼭 내가 아니어도 더 잘 쓰여 있는 글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라 꼭 보시길 추천하지 않는다.


다만, 마치 쌓여 있는 데이터를 메모리부터 배출하고 버그를 찾아 수정하기 위한 작업을 위해서 쓰고 있는 글임을 솔직하게 깨닫고 이를 밝힌다.



어느 작품에서든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인 강력함을 드러내는 인물의 전형으로 불리거나 일종의 여전사의 이미지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서, 또는 권력 기관의 유능한 고위직의 이미지를 제대로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그 배역을 맡게 되는 배우 군이 있다.


"죠쉬 브롤린"과 "베니치오 델 토로"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의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CIA인지 아니면 미국 행정부의 선출직 수반 또는 대통령의 직속 명령을 수행하는 기관의 수장에 가까운 역할을 하는 배역에 어울리는 한 명과


저 멀리 어디에선가 확실하게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법망을 벗어난 조직에서 찾아온 무게감 있는 "암살자"의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한 명으로서의 짝을 명확하게 이루고 있다.


손발이 잘 맞는 콤비네이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2편에서도 그 둘이 나오는 이유가 충분히 되어준다.


이 두 명이라면 "패스트 앤 퓨리어스"에서의 "드웨인 존스"와 "반 디젤", "제이슨 스타뎀" 등이 돌아가면서 갖고 있는 난공불락의 강력한 콤비 이미지급에 도달할 정도의 에너지를 화면에서 구현할 수 있다.


더불어 마치 이 영화의 영향력 있는 여전사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포스터에 등장하고 있는 "에밀리 블런트"는 영화의 무거운 이미지를 벗어나 보다 많은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배역으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이 작품 속에서 "에밀리 블런트"는 "에지 오브 투마로우"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엄청난 무력을 뽐내는 존재로 그려지진 않고 보다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면서 강력한 두 남배우의 압도적인 에너지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주체적으로 적을 퇴치하는 입장에는 서보지 못한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일종의 희생자와도 같은 역할이자 자신의 본능이나 악덕으로부터도 헤어 나오지 못한다. 약간은 "에이바"라는 영화에서 그려진 "제시카 체스타인"을 떠올려주는 무력감에 비틀거리는 실력자로 나오고 있다. 담배와 술과 매력적인 남자에게 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실제로 "시카리오" 2편인 "데이 오브 솔다도”에서 그가 맡았던 배역은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죠쉬 브롤린"과 "베니치오 델 토로"의 콤비가 주도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영화의 초기 홍보 시점에 흥미로운 광고판 역할을 해주었던 "에밀리 블런트"는 1편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에서 이용당하고 뒤통수를 맞는 역할을 하고도 "시카리오 1편"의 흥행 성적의 중요한 이유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영화 외적으로도 본의 아니게 그 같은 역할을 하며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1편의 마케팅적으로는 중요한 존재였겠지만, 극화 속에선 보조 장치로만 나와서 안타까웠다.


'이곳은 늑대들의 도시'이니 보다 작은 동네에 가서 법과 정의를 실현하라는 말을 영화 속 대사로 듣게 되는데, 이 대사에 열 받을 수 있어야만 이른바 정의 수호자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관객은 나름 자기 자신에게는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사를 듣고도 "법의 심판"을 내릴 수 없는 무력감을 보여주고 이를 관객도 납득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도시의 거대한 악은 그저 법의 힘만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내가 멕시코에 들렀던 적은 십수 년 전의 휴가 때였다. "LA"에서 "티후아나"를 다녀오면서 국경을 넘어갔다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한번 했었는데, 미국 국경 내의 풍요로운 풍경과 멕시코 내의 자연 풍광은 훌륭해도 낙후된 도심 풍경을 보면서 두 나라 간의 정치 경제적인 큰 폭의 격차를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멕시코-미국 국경을 넘어가면서 벌어지는 도로에서의 총격전이 마치 그 현장에 같이 있었던 것만 같은 기시감까지 불러일으켜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지역인 "엘 페소"와 멕시코 지역인 "후아레즈"를 오가며 벌어지는 이 영화가 주는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미국에 살포되는 남미 국가에서 들어오는 마약의 수량과 그 마약을 취급하는 조직의 통제되지 않은 범죄 행위는 전쟁을 여러 국가에서 멕시코를 향해 선포해도 큰 변화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라 할 수 있다.


이들과 연관된 공인된 조직이나 기관, 경찰 등이 오랜 세월 동안 부패하며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남미 정부와 미국 정부가 아무리 공조를 해서 마약 조직을 박멸하기 위한 전쟁을 한다고 해도 일거에 이를 소멸할 방안은 없다시피 하다.


이 영화 속에서 FBI는 법과 정의의 원칙을 지키며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다루는 기관으로 그려진다.


이 기관 안에서 납치 범죄 전담팀원들로서 미국 내에서 마약 조직과도 마주하여 싸우고 있는 "케이트 메이서(에밀리 블런트)"와 "레지 웨인(데니얼 칼루아)"는 영화 초반에 남미 마약 조직인 "소노라 패밀리"의 범죄 소굴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조심스럽고도 민첩한 몸놀림으로 조직원을 사살하고 수많은 시체를 집의 벽과 수납공간에 은닉하고 있는 일당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임팩트 있게 등장한다.


수많은 시체(30구가 넘는 시체가 발견되고 하나 빠짐없이 얼굴에 비닐봉지가 써져 있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나온다)가 썩어 가고 있는 장소에서 역겨운 냄새에 토하기도 하고, 창고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팀원 2명이 폭사당하고 신체가 절단되어 팔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관객의 시선과 동일하게 당혹감을 느끼는 장면도 나온다.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www.imdb.com%2Ftitle%2Ftt3397884%2F&psig=AOvVaw35Z

이후에 사후 보고 미팅을 하는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기관에서 온 "멧 그레이버(죠쉬 브롤린)"이 FBI의 다른 고위직보다 추레한 옷을 입고 쪼리를 신고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것을 본 "케이트"와 "레지"는 이 수상한 인물이 "케이트"를 자신의 임무를 위해 차출하게 된 것에 영문모를 위협을 느낀다.


"멧"은 "케이트"가 기혼자임을 물어보고 이혼녀임을 안 뒤에 다시 아이가 있는지를 되묻는다. 아이가 없다는 상황까지 파악한 "멧"은 법학의 전문가이자 이라크 파병 경험까지 있는 "케이트"의 파트너인 "레지"를 배속하는 것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이 임무가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임을 느끼면서도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케이트"는 배속을 받아들인다.


중간에 해당 팀의 고위직인 "데이브 제닝스(빅터 가버)"와 다른 고위직은 차출이 된 이유가 "멧"이 선출직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조직에 있는 전방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실제로 이 마약 조직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된 진전과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임을 설명하며,


지난 오랜 기간 마약 범죄에 대한 기소는 계속 늘어났지만 실제적인 성과나 마약 조직의 축소나 색출, 박멸은 일어나지 않았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역설하여, 이를 듣고 "케이트"는 "멧"의 밑으로 배속되는 것을 다시 납득하게 된다.


그러나 "레지"는 분명히 뒤에 "멧"같은 이들이 뒤통수를 칠 것임을 간파하고 이를 "케이트"에게 이야기하면서도 같이 파트너로서 동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 내의 "엘 페소"로 전용기를 지원받은 "멧"과 함께 이동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정체불명의 남미인인 "알렉한드로(베네치오 델 토로)"를 비행기 안에서 만난 "케이트"는 "후아레즈"에 간 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가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선 공식적으로 미국 내에서의 작전과 수사에만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자신의 임무에 무언가 알지 못하는 별개의 목적이 포함되고 있음을 감잡게 된다.


"케이트"는 그들이 CIA가 아닌지 묻지만 그저 미국 정부에 고용된 "고문"이라고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알렉한드로"는 콜롬비아의 "카르테 하나"에서 왔다고 하며, 예전에는 "검사"도 했었던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멧"은 그를 "사냥개" 역할을 하는 자라고 소개했었다.


모든 것이 미국 내의 법이나 규정과는 상관없이 이뤄지는 것에 대해서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그저 끌려가고 있는 "케이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정보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 속에서 같이 끌려가고 있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해주고 있다.


비행기는 원래 알려졌던 행선지인 미국의 "엘 페소"가 아닌 멕시코의 "후아레즈"에 도착하게 되고, 이곳에서 델타 포스 팀원과 미연방 보안관들과 오리엔테이션을 듣던 "케이트"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임무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저항하지만 "멧"의 강권에 의해서 "알렉한드로"와 복장과 무기를 들고 같이 갈 수밖에 없게 된다.


멕시코 내에서 마약 조직인 "소노라 패밀리"의 두목인 "길예르모"를 잡아서 미국으로 호송해오는 일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쉐보레의 대형 SUV가 여러 대 나오고, 이를 호위하는 멕시코 경찰들의 기관총을 실은 여러 대의 지붕이 없는 차가 앞 뒤로 따라붙으면서 도로를 곳곳에서 통제하면서 이동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백미이고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붙는 차들을 서로의 무선을 통해서 포착하고, 각 건물의 옥상에 혹 저격수가 없는지도 확인하면서 이동하는 과정에서 "길예르모"를 잡아오기 위해 가는 길의 중간에 살해당한 후 나체로 교각 위에 여럿의 시체가 난도질당한 상태로 매달려 있는 장면이 나왔다. "멧"은 이 마약 조직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공포감을 주는 '영리한' 조직임을 설명한다.


차 안에서 "케이트"의 시선으로 도로의 여러 곳에서 움직이는 차량과 사람을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은 점차적으로 긴장에 휩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마약 조직 일당이 총격전을 벌이고자 하는 타이밍은 멕시코-미국 국경을 넘어간 뒤라는 설명을 듣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두대의 세단에 4명씩 타고 따라오고 있으며 그들이 모두 총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알렉한드로"를 포함한 모두는 차량으로부터 떠나지만 "케이트"는 엉겁결에 내리지 않고 차량 안에서 바로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으로 세단 두대에서 내린 총을 든 이들이 총격을 받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그전에 “알렉한드로”가 경고했던 것은 멕시코 경찰은 부패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였는데, 차량에서 내리려 하다가 본 사이드 미러의 뒤편에서 무장한 경찰로 보이는 이를 발견하고 그가 총을 쏘려고 하는 것을 본 "케이트"는 총을 응사해서 그를 죽인다.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www.moviepulp.be%2F49045%2Fsicario-blu-ray-recensi

그러고 나서 이 엉망진창의 상황에 대해서 욕지거리를 내뱉지만 관객과 함께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이 마약 조직은 정상적이고 원칙적인 프로세스를 갖춰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고, 그들에 대한 교전 수칙은 총기와 모든 것을 동원해서 포착하는 동시에 죽여야만 하는 상대라는 것을.


여기까지의 임팩트가 점차적으로 강화되고 확장되면서 관객의 주의를 일정하게 계속 끌고 가기 때문에 이 영화는 명불허전이라고 불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임을 제대로 증명해 낸다.


이 이후의 내용은 점차적으로 긴장감을 확대시키면서 "알렉한드로"의 정체가 밝혀지고, "케이트"가 단지 국내 작전을 위해서 초대된 명분상의 근거를 남기기 위한 허수아비였음을 깨닫게 되고,


"멧"과 미국 정부가 원하는 것이, 세계 인구의 20%에게 마약을 팔고 있는 "마약 카르텔 전체"의 불가능한 일망타진이 아니라, "메데인 카르텔"이라는 지배적인 세력을 하나 남겨두고 질서를 어지럽혀온 "소노라 패밀리"를 같이 박멸해서 다시금 "질서와 균형"을 바로 잡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알렉한드로"의 가족을 몰살한 "소노라 패밀리"의 또 다른 보스에게 복수하는 것을 미국 정부의 델타 포스의 위성 기기 등을 통해 도와주는 "멧"의 모습이 나오게 되고, 부패한 멕시코 경찰로서 "마약 운반"일을 하던 한 어린아이의 아버지였던 "실비오"와 중간 보스 격의 "마누엘"도 죽이며, 결국 마주하게 된 그 보스의 아내와 아이 둘도 죽이고 마지막으로 "보스"를 죽여서 자신의 복수를 마무리한다.


이 모든 것을 겪고 나서 "케이트"는 이 엉망진창의 작전을 공개하겠다고 하지만, 집으로 찾아온 "알렉산드로"로부터 "자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받으면서 목 아래에 바짝 붙은 자신의 총구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모든 작전이 공적으로 문제가 없이 이뤄졌다는 내용을 기재한 서류에 대한 서명"을 강요받고 결국 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https://www.google.com/url?sa=i&url=https%3A%2F%2Fwww.youtube.com%2Fwatch%3Fv%3Dqpo5Pf39B1U&psig=AOv

"알렉한드로"는 서명된 서류를 갖고 "케이트" 총을 분해하여 방안 여기저기에 흩뿌린 뒤에 "케이트"의 숙소를 떠나 등을 돌리고 걸어간다. 총을 결합하고선 발코니로 나와 "알렉한드로"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소리를 친 "케이트"에게 쏘란 듯이 몸을 돌려 쳐다보지만 결국 "케이트"는 총을 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게 된다.


"케이트"가 총을 쏘지 않은 것을 나는 아래와 같이 이해하게 되었다.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자 하나 결국에는 현실의 강고한 벽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알렉한드로"의 행위에도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 이 마약과의 전쟁을 완벽하게 이길 방안이 현실적으로 미국 정부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질서를 바로 잡고자 보다 통제 가능한 "메데인"과 미국 정부가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을 차악으로 받아들임.


2. 자신이 마약 조직에 가담한 경찰관의 정체를 모르고 원나잇 스탠드를 하려고 하다 정체를 알고 나서 몸싸움을 벌이다 제압당했을 때 숙소로 들어와 "케이트"를 "알렉한드로"가 구했음을 기억함.


3. "알렉한드로"가 자신을 증거 인멸 차원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분명 하나 검사 시절 자신의 아내와 딸을 "소노라 패밀리"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이를 복수하는 개인적인 정의를 실현했으며, 자신의 딸을 떠올리는 외양을 가진 "케이트"를 이 모든 과정에서 보호하려고 한 바가 있었음을 깨달음.


이 모든 과정에서 불필요한 설정은 거의 끼어들지 않았었고, 그것은 온전히 "드뉘 빌뇌브" 감독이 대중의 현실 인식이 그만큼이나 건조해진 세상이 현시대임을 민감하게 느끼는 감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감정의 토로와 구구절절한 설명이 만약 "알렉한드로"나 "케이트"의 대사나 머릿속 화면으로 나왔다면, 전체적인 극화의 스토리에 관객은 몰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액션과 짧은 대사, 화면으로 관객의 머릿속에서 흥미진진한 상상력을 극대화하면서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시키면서도 동시에 영화가 주어야 할 궁극의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실비오"라는 부패한 멕시코의 경찰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위해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가장으로 그려지고, 그저 피동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마약 운반을 하는 적극적이지 않은 피동적인 범죄자로 그려지지만, 그는 결국 "알렉한드로"의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자비를 구했음에도 살해당한다.


"알렉한드로"가 자신의 가정에 이 조직을 통해서 당한 것을 복수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상대적으로 선량하고도 평범한 인물처럼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축구 시합을 위해서 공터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있던 그의 아들은 잠시 울려 퍼진 총성에도 경기를 중단하지 않고 그대로 게임을 속행한다.   이야기했듯이  장면이 주는 여운이 오래갔다.


이 범죄에 대한 무력감과 무감각함,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방조하면서 가담하게 되는 관객을 포함한 모두에게 그 끝장면은 사실 제대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냥 이대로 자기 일 아니라고 계속 내버려 둘 것인가?”라고.


이 질문이 총격 액션 장면보다 더 둔중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 영화를 그저 재미만 추구한 작품으로 이해하고 감상을 끝내기가 어려워졌다.


이 같은 불의와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의 강력한 힘을 가진 기관이 아니라 바로 그 피해를 직접적으로 당하고 있는 그 국가나 지역뿐 아니라 그와 연대하는 다른 국가나 지역의 선량하고 정의로운 이들의 연대일 수도 있다. 이를 제대로 불의로 인식할 수 있는.


그러나 그런 말은 하기만 쉬울 뿐이다. 나 역시도 집 근처에서 총성이 들린다고 해서 어딘가에 신고하기보단 아마도 아이와 함께 가던 길을 그대로 가길 선택하는 소시민일 터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회의감이라도 떠올리게 했다면 영화는 메시지를 통해서도 성공한 것이다. 이 회의감이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의를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는 방향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기회를 준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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