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의 스파이에서 가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가장으로 변모하다
스포일러가 진하게 나옵니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서 이전에 보았던 작품을
복기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시리즈가 여럿 있다.
그래야 더 재미있어진다고 여럿이 이야기한다.
다른 작품도 아니고 007을 복기해서 보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감히 시도하긴 어렵다.
제목처럼 "시간이 없다(No Time)".
심지어 죽을 시간조차 없는 바쁜 스파이
불사에 가까운 액션으로 정평이 난 007,
제임스 본드가 결국에는 죽어야만 하기에,
비장감과 더불어 여러 가지 죽어야 할 이유가
장면 장면 잘 따라붙어야만 하는 영화였다.
일단, 적이 그냥 적이어서는 안 되고, 전편을
거쳐서 싸웠던 블로펠트의 "스펙터" 쯤은
가볍게 모두 없애는 강력한 파워를 갖고
있어야만 했고, "다니엘 크레이그"의 축적된
카리스마와 대적해서 눌리지 않을 이미지도
지녀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급의 배우로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를 열연했던 "라미 말렉"을
빌런으로 픽업한 이 영화는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 내기엔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었다.
극본을 촬영 중에 만들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쪽대본으로 만들었다는 흥행작 중에 유명한
"아이언맨"이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정도의
쾌거를 낳기에는 영화 제작사가 출연 배우의
마지막 작품임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찍은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위대하게
퇴장을 그려내는 것에는 안타깝게도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흥행이
세계를 뒤덮은 상황에서도 수위권 내에
진입한 쾌거를 무시할 수는 없다.
흥행 보증 수표를 자처하는 MCU 시리즈의
일부인 "샹치-텐 링즈의 전설"을 상회하는
글로벌 흥행 순위를 함부로 무시할 수 없고,
프랜차이즈 영화로서의 엄청난 저력이
있는 이 시리즈물은 지금까지 계속 누가
만들어도 그 해 흥행 10위권 밖으로는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기반을 갖고도, 시리즈물 최상의 흥행을
"스카이 폴"로 갱신한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출연으로 역대 시리즈물 사상 처음으로
007이 죽는다는 특별한 설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기대는 충족하지 못했다.
감독과 배우의 역량이 높고 낮고를 떠나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절체절명의
임무가 맡겨진다면,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반전적이고도 성공적인 결과가 기적처럼
나타나기엔 어렵다 싶었다. 제작사 MGM이
엄청난 지원을 보장해주고도 극화의 완전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워너 브로스"가 말아먹었던 여러 DC 코믹스
히어로물의 실패는 그런 상황의 반복이었는데,
이런 케이스에서 MGM은 유감스럽게도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위기에 처했을 때 절박감을 돌파할 만큼의
내구력이 있어야 하고,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해서
엔간한 위험은 여유롭게 헷징 하는 경험이
축적되어 있는 감독과 배역이 있었다면
더 준수한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아쉬웠다.
물론, 이 아쉬움은 중간에 "007-스펙터"를
보지 못한 입장에서 느껴진 것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찾아서 보겠지만 아쉬운 이야기를
더하게 될까 싶어 보지 않은 작품이어서
여전히 보기가 꺼려진다. "스카이 폴"이
절대적으로 우수한 품질로 나와서였겠고
배우의 매력도도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상황인 점도 무시할 순 없지만, 자기 자신을
넘지 못한 마무리로 끝난 것이 아쉽다.
단,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는 이 영화가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었음을 드러낸다.
그것만큼은 여기에 적어야겠다 싶었다.
1. 007은 과거가 불명인 '레아 세이두'가 연기한
"매들린"과 사랑에 빠져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해서 다시 흥행 부활시킨 "카지노 로열"에서
팜므파탈 연인 역할을 했던 '에바 그린'이 연기한
"베스퍼"의 묘소에 들러 그를 추모하던 중에
폭탄이 터지고 암살자들이 따라붙는 위기에
처한다.
2. 이 장면에서 초창기 007 시리즈 중
"골드 핑거"에서 나왔던 에쉬턴 마틴 DB5가
등장해서 의심이 가지만 같이 도망치며,
우수한 방탄 능력과 속도를 보여주다가
"매들린"이 적에게 자신의 이동 경로를 알려준
적인지 아니면 자신과 같은 편이 맞는지를
방탄유리가 뚫리기 직전까지 멈추어서
번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3. 인간적인 고뇌의 극단까지 멈추어 있다가,
결국 차량 속의 기관총을 헤드라이트 바깥으로
돌출시키며 적을 소탕하고, 기차를 태워
"매들린"을 보내면서 절교를 선언하는 "007"은
역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복잡한 심경을 가진
"제임스 본드"를 보여주었다. 의심하면서도
사랑하고, 믿고 싶으면서도 보내는 그런 심정은
겪어 보지 못하고선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다.
하지만 연출과 배우의 연기로 잘 표현했다.
4. 미스테리어스 한 "매들린"의 어린 시절이
처음 장면으로 나오고, 항상 집을 떠나 있는
아버지가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가족을 몰살당한 복수를 위해 찾아온
가면을 쓴 괴한에게 "어머니"가 죽고 나서,
이를 피하는 과정에서 그 괴한이 생명을
구해주는 복잡한 내용이 심플한 점프 컷으로
배역의 과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5. "라미 말렉"이 맡은 "사핀"이 그 괴한이었고,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블로펠드"를 포함한
"스펙터 일당"을 "제임스 본드"와 "매들린"을
이용해서 “나노 물질”을 침투시켜 죽였듯이,
MI6가 적을 효과적으로 섬멸하기 위해 만든
영구적인 "나노 물질 무기"로 "DNA" 정보를
인식한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의 신체에 투여하면
원거리에서 누구라도 정밀하게 선택하여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빼앗아 가진 적으로
등장시킨 일체의 과정을 나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킹스맨”의 휴대폰 장치를 사용한
뇌 폭파 내용이나 바이러스를 무기화하는
여러 영화로부터 약간 변종화된 수단이 나왔다.
6. 극 중에 "제임스 본드"가 은퇴한 이후에
007 번호를 받은 여성 흑인 요원 "노미"를
연기한 "랴샤냐 린치"는 내용 중에 가장
신선하고도 이질적이면서도 시리즈물의
정체성을 흔드는 듯한 요소이다. 끝까지
영화를 보게 만드는 신경이 계속 쓰이는
부분이 바로 그의 등장이었었다.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제임스 본드"
사후에 혹, 그가 후속 배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궁금함을 계속 남긴다.
물론, 그것은 시리즈물의 정체성을
고려했을 때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7. '에바 그린'의 이미지를 다시 젊게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아나 데 아르마스'가
연기한 신입 요원 "팔로마"도 여러 측면에서
시선을 끄는 부분을 주었다. 특히 액션 연기가
얼핏 '양자경'이 출연했던 "네버 다이" 수준에
근접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여전사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줬다. 눈부신 미모와는 별개로.
8. CIA의 파트너였던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한 "펠릭스 라이터"는 시리즈물 속에서
은근히 오갔던 "제임스"와 "펠릭스" 간의
이른바 "브로맨스"를 잘 보여주었다.
영화가 줄기 장창 보여주었던 미영 첩보기관
간의 유대감을 드러내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펠릭스"의 죽음에 대해서도 복수하는
"제임스"의 대사에서도 드러났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위의 커다란 줄기를
잘 정해서 매끄럽게 극화를 흘려 내려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마치, 잘 만든 케이크 빵
위에 마지막 데코레이션을 위한 생크림을
붙이는 과정에서 소금이라든가 다른 향신료가
배합이 잘못되어서 끼어들어 달콤함이
사라지고 맛에 있는 감동의 요소가
일부 사라진 것과도 같았다.
1. 따지고 보면 "클리셰" 수준의 갈등 구조인데,
제대로 된 변주나 약간이라도 비틀어 꼰 부분이
있어야 좀 색다르단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요소가 부족했다.
2. "매들린"이 "제임스 본드"의 딸을 낳아 키우고
처음엔 그의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결국
그의 딸이 맞다는 것을 적인 "사핀"에 의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런 과정이 뭔가 민숭맨숭했다.
단지 눈 색상이 같다는 것이 복선인데, 왜?
"매들린"은 007이 절교를 선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배'만 쓰다듬으며 아쉬운 제스처를
취하다가 말았던 것일까? 적어도, 눈치 빠른
"제임스"는 점프컷으로라도 그 장면을
떠올리며 스스로 깨달아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3. "사핀"의 기지 안에서 벌어지는 총격전과
그 기지로 유도한 미사일을 충분히 피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나노 물질"을 완전히 파괴하고
자신의 몸에 침투한 이 물질 때문에
자신의 연인과 딸을 죽일 수도 있는 상태가
된 것을 비관하여, 그 미사일을 그대로 맞아
죽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긴박감이 제목에
맞지 않게 전달되지 않고, 비장미라든가
슬프고도 안타까운 감정이, 뭐, 내 나이도
문제일 수는 있겠으나, 일어나지 않는다.
4. 허리춤에 딸이 흘리고 간 봉제 인형을
꽂고 악당 기지의 옥상으로 올라가 날아오는
폭탄을 맞아 사라지는 그 잠깐의 장면은
007 시리즈에서 정말로 처음 보는 놀라운
장면이어야만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살고자
하다가 그만 생명을 잃는 그런 아등바등
살고자 애쓰는 모습이 아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너무 급작스럽게 "아버지"가
되어버린 그 심경의 변화에 대한 개연성이,
너무 시간이 부족해서였는지 그려지지
않았다. 극화 내내 거의 "존 윅"급의 무력을
보여주었던 터라, 이미지의 격차가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컸다.
5. 일단,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로부터
은퇴하기로 했으니 이만, 이 정도 수준에서
포장해서 퇴장시키자라는 정도의 안이함을
느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6. "스펙터"란 조직이 거의 일망타진이란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어이없이 섬멸되고,
조직의 수장인 "블로펠드" 역시 취조실에서
"제임스"에게 속절없이 얻어맞다가,
"나노 물질"로 인해 죽는, 뚜렷한 존재감 없는
모습으로 스치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전 작품인 "스펙터"에서 그들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바,
이렇게까지 전체 시리즈물에서 "007"과
투쟁하고 괴롭혀 왔던 적을 너무 약하게
취급하는 바람에 무너졌을 영화 속의 긴장감은
이 시리즈물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감독이
이 작품에서 지휘봉을 쥐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란 의혹이 살짝 든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자" 이것이 "007"
시리즈물에 대한 나의 자세였다. 그리고,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냉전시대"를 기반으로 한 "선진국"에
대한 판타지를 전방위로 뿌리는데 일조한
이 영화는 사실, 앞 뒤로 영화 트렌드의
변화에 따라 복고와 최신을 반복되는
사이클로 타고 있는 주로 사춘기까지
팽창된 남성적 자아에 호응해온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나의 아이 세대가
봐야 할 작품이라 솔직히 생각한다.
'벤 위쇼'가 연기한 "Q"가 자신의
집에서 동성의 애인이 찾아오는
장면이 있었지만 이를 삭제했다고
들었는데, 그러한 세상의 변화와
파격을 시리즈의 내부로 담기엔
열광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고정관념의 벽은 너무 견고하다.
"강력한 여성"도 나오고, "부성애"와
"복잡한 번민”으로 헤매는 "007"도
나오고, 흑인 요원도 늘어나지만,
"아시아계"는 아직도 변방의 보조
인원들로 영화 속에서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정말로 위대한 작품이 되기엔 그런저런
것을 충분히 고려할 시간이 없는
프랜차이즈 시리즈물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