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man Jan 01. 2022

<A.I.>-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성이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있는가에 대한 상상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에겐 아래의 이야기를 보길 권하지 않습니다.


스텐리 큐브릭의 끝없이 꼬여 뻐쳐가는 듯한 상상력, 그리고 스필버그의 세련되고, 안정감 있으며, 몽환적인 영상구사력, 아이...Artificial Intelligence의 아이는 그 안에서 천천히 "인간"이란, 무엇때문에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왜 사는가?의 질문에 대한 아주 근접한 답변을 남겨준다.


"최고의 악은 최고의 선과 통한다."


스텐리 큐브릭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국 영화사의 대극을 이루면서 동시에 위대한 영상구사, 심연에 깃든 감동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건드리는 감독들로 보인다.


마치 천상과 도덕적인 것, 친 사회적 줄거리로 무난하고 안정된 구도를 자아내는 것처럼 보이는 스필버그에게 지옥과 비도덕적인 것, 반 사회적 줄거리로 난장판을 자아내는 것처럼 보이는 큐브릭이 이 작품을 인도하고, 완성을 바랬었다는 뒷 이야기는, 마치 천상과 지옥은 한가지로 통한다. 또는 양 극단에 이른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라는 등등의 표현들의 실제적인 현현인 것처럼 느껴져 온다.


둘은 영화사에서 확실히 같은 편은 아닌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처음부터 중반기에 이르기까지 난 이 작품이 큐브릭의 것이라고 천진난만하게 믿고 있었다. 나중에야 카피가 "스필버그 최후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이였지만, 그 동기와 시발, 설정, 전개는, 스필버그의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리고 스필버그만의 카리스마로서는 그런 영상과 줄거리가 진행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후반부에 이르러, 특수효과와 일련의 C.G 그리고, 외계인이 나타나는 장면에 맞물린, 영상에서, 아 마무리는 스필버그가 확실히 해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성향의 두 지휘자가 벌이는 전혀 다른 사조 음악의 맛갈진 조화라고 불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꼬여 올라가는 스토리"


아무리 스토리를 잘 알고 있어도, 영상의 이미지와 영상이 끌어들이는 마력을 경험하는 것은 그 스토리에 대한 이해와는 별도의 것이다. 앉아 보는 내내, 계속해서 약간의 지루한 부분들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 장면장면이 계속해서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경험토록 잡아당겨 끈다.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현대사회의 피폐함과 극도의 혼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영화가 아니다. 단지 "프로그램된 영혼이란..."것에 대해서 묻고 있다. 영혼이 진정으로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 현실에 대해서 어떤 답변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심리, 마음, 그리고 영혼, 유일자라는 감각을 내부에 지닌, 인간과도 똑같이 만들어진 "로봇"이라는 영화 속 도구를 빌어서, 인간이란, 바로 그 존재하는 그 한순간,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서 모든걸 걸어 생애 전부를 바칠 수 있는, 경이의 존재임을 감동적으로 체험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과장, 극단적 상상력"


전혀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이 대량으로 만들어져, 자신의 엄마라고 코드화된 존재에게 사랑을 바치는 존재로 만들어진, "DAVID"임을 깨닫고 오열하고, 모든것을 파괴하며 절규하는 그 모습은, 바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의 모습이다.


2,000년을 넘게 바닷 속의 파란 요정 동상에게 '내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비는 로봇의 모습은, 단순한 신화나 전설의 창조가 아니다.


뒤이어 나타나, 인류가 절멸한 뒤, 유일한 인간의 기억을, 가진,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의 생존은, 현실감있는 상상력이다. "그곳에"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생생하게 느껴져온다.


그리고 하늘거리며, 가느다랗고 투명한 몸체로 표현되는 외계인들은, "그럼직함"이라는 형상화를 보여준다. 실사 영화가 C.G를 넘어서는 경지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그것은 A.I가 한번에 보여주는 영상에서 나타난다. 실제와 근접한 그래픽이란, 실사와 함께 보여질 때, 더 그 효과를 뚜렷이 드러내 주는 법이다.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은 그저 단순한 기계?"


주인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 되어야 하지만, 인공지능은 사유하고 분노하고, "주인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진대로" 독자적인 방식으로 주인을 사랑하기 위해 행동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경이적인 "사랑"에 대한 섬세하고 철저한 프로그래밍, 마치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내부에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천부적인 성향" 그대로의 움직임과 사유를 끝까지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적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것을 잃지 않는 것"은 세기말적 현실에 이르러, 완전한 신화처럼,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게 된다.


우리는 어느새인가, 언제부턴가, 기계가 되기를 종용받고 있지 않던가. 얼굴에 손을 대서, 보다 예쁘고 잘생긴 모습이 되기를, 머리에 자극을 가해서, 보다 똑똑한 자신이 되기를, 자기뿐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똑같이 닮은 누군가를 창조해내기를, 감정을 일순에 끊어버리고 냉정히 누군가를 떠날 수 있기를, 감정과 마음의 움직임보다, 보다 냉철한 이성과 계산, 수치상의 진실을 더더욱 따라가기를...'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이 되기를...' (그것이 올바른 자신이건, 의당 그래야할 자신인지 아닌지, 그런 한가지의 생각이나 반성, 또는 모색과 탐색도 없이...)


이 로봇은 내가 말하고 있는 기계가 아니다. 왜냐면, 그 프로그래밍, 그 자체가 바로 그 로봇의 본질 자체이므로. 자신 안의 진정한 동인의 발현과 진행을 억누르고, 스스로 억압 당하며, 자신을 억지로 어딘가에 맞게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 존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안의 마음이 느끼고 있는 "사랑"을 향해 나아갔으므로, 그 사랑이 온전히 느껴진 그 순간을, 진심으로 "살았으므로".


인공지능을 가진...단순한 기계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DAVID'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어느 한 구석이 울리거나, 약간의 눈물이 시큼히 당겨오지 않는다면...한번, 자신의 감정과 마음의 프로그래밍이 뭔가 잘 못된 것은 아닌지 한번 정비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진심으로,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추함과 기괴함, 역겨움과 분노, 혼란과 소멸 속에서 피어올라, 상대적으로 나의 가슴 속에 아주 극소화된 결정체만 남아 전달되어 들어오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용서는 없다>-창작자의 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