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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an 01. 2022

<용서는 없다>-창작자의 권리

구미에 맞지 않는 작품이 나왔을 때 비판 가능한 영역에 대한 생각


용서는 없다 (2010)


용서는 없다를 보고 난 뒤에 한참 기분이 안 좋았었다. 이제 기분이 조금 풀리고 난 덕에 이 영화에 대한 한마디나마 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물론, 사람이 항상 해피엔드만 나오는 극화를 보아야만 하거나 만들어야 한다는 강제성이나 당위는 이 세상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출구가 없이 끝나는 스릴러를 보고 난 후에 찜찜함이 오래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이영화를 혹평하도록 나를 이끌 이유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이 영화는 스릴러로서는 실상 매우 잘 만들어진 작품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감히, 한국의 "세븐"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매우 꼼꼼하게 잘 만들어졌고, 빈틈도 잘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비극으로 끝나지만, 비극으로 향하는 필연성이 위태해 보이지는 않았다.


창작물이 항상 관객들 맘대로 만들어질 수는 없는 법이라, 보고 난 관객이 그 영화의 인물 중에 누군가에게 자신을 이입하거나 동일시했지만 이들이 죽었을 때, 이를 비통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해도, 지난번에 썼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대한 글처럼, 그 창작자를 창작물 때문에 재단하고 욕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유치한 일이기도 하고, 창작 의욕 자체를 꺾는 반 문화적인 태도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정확히 그 창작물이 얼마나 성실하게 창조적으로 꼼꼼히 잘 만들어졌는가, 성공적인 창조 행위를 잘 마쳤는가 등을 체크하고 평가하는 정도가 문화 산물 소비자나 해석자에게 주어지는 객관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비극을 그리고 싶다면 비극을 그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희극을 그리고자 하면 희극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해피앤딩을 원하면 해피앤딩을 그리고 새드 앤딩을 원하면 새드 앤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작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고 다양한 창작자들이 존재하도록 만들면서, 동시에 다양한 감성과 창조적인 능력, 광대한 인생에 대한 이해를 섬세하게 가진 문화 소비자들을 육성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1. 일단 드라마, 영화, 만화, 소설, 연극 등 모든 전통 비전통의 창작물에 있어서 주인공의 생과 사를 쥐고 있는 권리는 이 창작물을 소비하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쪽에 있다. 때로는 시청률에 지나치게 영합하는 몇몇의 드라마처럼 강력한 시청자들의 요구가 드라마 자체를 비틀어 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이미 드라마를 보게 만든 것도 창작자이며, 드라마를 종결하는 것도 창작자이다. 시대가 바뀌어 시청자나 소비자와의 양방향 생산을 모색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이 같은 권리를 이전과 다름없이 문화 생산자 쪽에 주지 않는다면 생산자의 상상력의 범위와 창작 동기, 의욕은 급격하게 시들지 않을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문화 소비자들에게 빈약한 산물들만이 나타나게 되는 비극을 잉태하는 길일 따름이다. 


2. 문화 산물 속에 나타난 인물들은 아무리 정밀하게 창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가공의 인물들일 따름이다. 작가가 이들을 혹 죽였다고 하더라도, 또한 보는 사람들이 제 아무리 그 죽음에 반발을 하더라도 가공을 시작한 이후 이에 대한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권리는 산물을 소비하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쪽에 있으며, 이는 권리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이 아무리 애정을 갖고 그 인물들이 마치 살아 생동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더라도 가공된 인물들의 생사는 이 인물들의 창조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3. 문화 소비자들이 자기의 기대 맞는 결론이 아닌 작품이 나왔을 때, 허용할 수 있는 저항의 최대치는 "재미없다, 다시는 이 작가의 작품을 보거나 사지 않겠다."라는 의견을 공유, 전파하고 정말로 그 창작가와 진심으로 결별하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의 영역과 결론이 그 결론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확고하다면, 그 창작 행위 자체에 영향을 끼치려는 노력은 이른바 월권행위, 또는 주제를 모르는 행위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화 생산자의 권리는 지난 시대 동안 많이도 무너졌고, 많이도 문화 소비자들에게로 넘어와있다. 하지만, 창작을 제어하는 공권력이 창궐했을 때의 빈약한 문화 산물들과 호흡해봤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정부건, 소비자들이건 창작 행위를 제어하고 억누르고 입맛에 맞는 것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힘이 강력할 때, 우리의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으로 변화하고 파괴되고 억눌려 버리는지.


게시판이나 블로그 등을 통해서 나타나는 강력한 창작자 제어 운동, 소비자들의 입맛대로 결론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을 볼 때면 문득, 유신정권, 5공, 6공을 관통하는 강력한 권력욕, 문화를 통제하고, 문화 산물들을 자기 취향에 맞춰 버리려는 권력의 습성과 지금의 문화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본질은 혹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들 정도가 된다. 


물론, 나도 내 입맛대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결론이 나고, 스토리가 짜이길 기대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수많은 키보드 워리어 중에 한 명이다. 다만, 그러한 기대를 지나치게 실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으로 바꾸려는 모습을 보면, 창작자도 제대로 아닌 주제에 두려움이 몰려들고는 한다. 팀 버튼을 욕해놓고도 사실은 그의 창작력이 멋대로 관객들에 의해서 제어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이른바 양가적인 감정이 내게 있는 것이다.


용서는 없다를 보면서 오버랩된 것은 유승범이 연기한 극악무도한 복수의 화신의 모습이 마치 그 같은 복수의 칼날을 들고 최근에 종영이 된 화젯거리 드라마의 PD를 향해서 강력한 항의를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청자들의 모습이었으며 이에 편승해서 그 드라마에 칼을 같이 들이대고 있는 일부 매체나 언론의 모습이었다. 


이른바 "막장 드라마"라 불리는 산물이 있다면, 이에 반해 소수의 마니아들만 만족하는 다소 고급화된 드라마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하고, 시트콤인 동시에 비극인 작품이 있을 수도 있고, 비극이지만 시트콤 못지않은 웃기는 결론을 가진 정극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에 살아있기 때문에 다양한 현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관용하는 다양함을 존중하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과도 같다. 


이 다양함 때문에 그나마 좀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가 조금씩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짐으로써 오히려 자기 취향에 맞는 결론을 가진 작품들이 생길 확률이 더 늘어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정한 소비자의 권리는 다양한 문화 산물 중에서 자기에게 가장 맞는 것을 자기 의지대로 고를 수 있다는 것이지 기존 문화 산물들의 창작을 보다 수월하게 자기 마음대로 제어하는 데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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