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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an 01. 2022

<고양이 대학살>-상징의 반전

중세 시대 유럽의 민중은 어리석지 않았다

"문학적 시도-->상징의 반전"


내 글에 항상 따라붙는 "나"적인 글쓰기의 방법론이 있다. 바로 "상징의 반전"이라는 것이다.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텍스트와는 왠지 거리가 먼, 설명문적이고, 논설조의 문장으로 읽혀지고 씌여지기 일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나의 자동적인 시도는 상징의 반전, 상징의 이질화, 일상적인 것의 비일상화, 비일상적인 것의 일상화이다.


거창하게 이렇게 말하지만, 그 내용은 기껏해야, 어둠을 빛보다 긍정적인 요소로 바꾸는 일, 심지가 곧고, 한 곳만을 쳐다보는 일편단심 민들레 타입보다, 유연하고 사기도 잘치고, 제멋대로 일 줄 아는 것을 보다 상위로 보는 등등...


이미 일상적으로 다들,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는 것들이기는 하다.


"때로 내 글 자체에 대한 공격을 한다"


"고양이"의 의미가 한 때 나의 글에서 긍정적인 상징 또는 비유로 쓰여졌다면, "고양이 대학살"은 갑자기 왜 튀어나왔단 말인가?


서점을 들어서는 순간, 그 동네 서점의 빈약한 저장고에서 눈에 확 띄였던 책의 제목은 다름아닌, "고양이 대학살", 담고 있는 내용이 혹 괴기물이나 엽기적 살인 행각, 동물학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선입견이 작용할만 하지만,


집어든 내용의 리더스 다이제스트는...(독자의 소화물? 직역하자면...) 불문학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다름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속의 내용에 참고할만한 하나의 자료였던 것이다.


이 책은, 불문학의 성장기에 이른바 지식인, 지성인이라는 유형의 인간들이 나타나기까지, 과연 어떤 경로로 지식이 조합되고, 엉성한 천부인권설의 계급 조직이 그 견고함을 파괴당하기 시작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고양이 대학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서, 견습공이라 불리우던 프랑스 내에서 천대받던, 계층의 일군들이, 주인을 때려 죽이지는 못하고, 대신, 게으르고, 제멋대로이고, 과잉된 관능을 즐기고, 사치스러운 털을 휘날리는 고양이의 "상징성"을 교묘하게 "주인"에게 덮어 씌워, "단지 시끄럽게 주인 내외의 잠자리를 방해한다"는 명목하에, 아주 유쾌하게, 주인집의 고양이를 비롯 동네의 모든 고양이들을 때려죽였던 데에서 비롯한다.


"인쇄기술과 출판 문화의 발달에 앞 서 있는 민중 계층의 문학적 기술"


주인 내외는 이 기막힌 상징적 공격을 당하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저항도 사실적으로 해내지 못한다. 이미 문자 맹에 가까운 그 계층이, 이런 상징 구사를 효과적으로 이루어내고 있다는 일례 등...


그 모든 시민혁명의 기운, 그리고 사회변혁, 유럽 사회의 소설 문화를 통한 의식적 개혁과 눈부신 문화적, 산업적 발전을 이뤄갈 수 있는 힘이 이미, 속박받는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일례들이 속속들이 등장한다.


"루소, 니체, 괴테, 칸트, 데카르트...위대한 사상가들의 텃밭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플라톤, 아르키메데스 등등의 귀족 출신의 사상가 또는 행동가, 위대한 인물들은 바로 귀족적 정신의 꽃다운 발현을 통해서 그들의 지적 성장과 영향력을 신장해온 종류의 위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중세기 이후의 유럽 문화의 급격한 발전, 의식과 창조력, 철학적, 인문학적, 산업, 국민 전체의 의식적 성장의 바닥의 흐름을 면밀히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이후 나타날 사상가들이나 발전의 엔진을 제공하고 갈 사람들의 씨앗을 바로 틔워올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이른바 대중, 억압받고, 소외받는 하층민, 중산계층이라 불리우는 상인들...그들이었던 것이다.


위대한 사상가가 혼자 지랄발광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일단 그들을 이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고, 위대한 사람들이 필요성과 필연, 무게를 가진 사상이나 행동에 접근한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하도록 이끄는 그 세계 속의 다수 인물들이 끌어올려주는 영양분 같은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한다.


"18세기의 교만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을 알지 못하는 것들...인간이 아닌 것들...'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 같다. '혼자 다 안 건줄 아는 것들...인간이 될 수 없는 것들...'


루소의 소설 "엘로이즈"가 담고 있는 "덕성에 의한 사랑"이라는 화두는 그 시대, 그 누구도 몰고올 수 없었던 생활 철학적 변혁을 몰고왔다. 그 소설 나부랭이들을 읽었던 사람들은 귀족들이 아니라, 그 사회의 저급하다 불리우던, 부녀자들을 비롯한 "하층, 중간 계급"무리들이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짹팟이 터지듯이 진행되는, 선후행하는 수많은 변혁들을 통해서 자본주의 경영과 인격적, 도덕적 고양을 이루었던 프랑스인, 그리고 영향권에 들어왔던 유럽인들은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고, 결국 중국을 때려부수고, 동양과 중동, 아프리카, 신대륙을 정복하면서, 백인 우월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이런 이야기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미안하지만, 인정하고 싸우는게 백번 낫다. 진줄 모르고 지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삶도 참 드문법이다. 물론, 지금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가 유럽과 미국과 맹렬히 경쟁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판데믹의 한복판에서 서로를 그나마 지킬 수 있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나 백신을 맞는 것을 "신념"과 "자유"에 입각해서 저항하는 어리석음을 그 백인 문명 사회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것을 보며, 얼마나 더 역사적으로나 문화, 문명적으로 그들이 후행해왔는가도 일부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방향을 잡아서 제대로 발달해온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역사는 우리의 것일 수도 있었다. 


"우리...이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우리 앞의 '고양이'들을 때려잡고, 우리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떠들고, 우리를 진정으로 깨닫게 만드는 사상이나 행위, 행동과 더불어, 터뜨려나오는 에너지와 함께 발전하는가... 아니면, 다시금 개처럼 끌려다니다, 흔적도 없이, 이 세계에서 늙어 죽었다더라...라는 인물이 되는가를 결정짓는 반환점 앞에 와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적으로 우린 또다른 선택을 해야할 시기에 와 있다.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아주 비관적이고도 절망적인 피폐감, 패배감, 그리고 요행을 바라는 바보스럽고도, 유치한 사행심. 이런 것들과는 별개의 내가 또 우리가 될 필요를 느낀다.


우리가 더이상 사회 지도층을 지도층이라는 이유만으로 믿을 수 있는가? 또는 이 시대의 지성이나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그저 그 지위와 권위만으로 믿을 수 있나? 시스템이 철저히 자기의 편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지금 이자리에서 당신이 눈 앞의 허접쓰레기 환영을 거둬내야 한다. 그것이 고양이들이라면, 빨리 몽둥이를 들고 잔인하게 때려잡아라. 그것만이 당신과 내가 이 비탈길을 굴러 가는 듯한 이 좁은 세계의 붕괴를 다른 길로 반전시킬 수 있는 희망의 순간이 될 것이다.


스스로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집념의 화두를 착실히 잡아가다보면, 우리는 아직 희망이라는 것을 진정한 즐거움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토양 위에서, 뭔가가 착실히 꽃 피워가고 역동적이며 다이내믹한 삶이 펼쳐져 갈 것이다. 서로간에 타인과 굳이 비교할 이유가 없는 행복과 기쁨, 활력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 보여주고 있는 면모라 생각한다.


돈도, 사랑도, 믿음, 희망, 쾌락, 번영, 자기실현 그 모든 것들이 그곳에 거하고 있다.


네트워크적 개혁과 발전, 체계적이고 시스템적인 변화의 물결...종류를 불사하는 전문적 지식을 통한 상호 모자이크적인 발전...그것들의 중심에는 언제고 떠나지 말아야 할 화두가 있다. 그건 "인간"이다. 그래서 난 인간을, 점점 희미해져가는 인간적 존재로서의 "나"를 붙잡고 있다. 돈버는 머신보단 돈으로 평가될만한 가치 또한 만들어내는 "인간"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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