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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Feb 27. 2022

<오징어 게임>-밀레니엄/X 세대가 잃어버린 것

지금 이 시점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잔인하게 그려내다

이 작품에 대한 수많은 스포일러를 남발하는 글 중에 하나입니다. 이 드라마를 보지 않으신 분에게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거의 대다수의 우리는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엄청나게 거둔 흥행 성적을 이야기하지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의미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부류는 일부 유튜버나 평론가, 감상문을 쓰고 있는 또한 수없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에서는 소수인 사람의 몫인 것 같다.


영상을 통해서 소개하자면 결과적으로 자극적이고 잔인하며, 이 극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쫓아 충분히 커다란 부와 권력을 충족하고도 모자라서 더 큰 재미를 추구하는 호스트와 VIP라는 "빌런"과 그 "빌런"의 하수인으로서 활동하는 "프런트맨"과 "딱지치기 따귀맨"이란 집단이 갖고 있는 상징성이라던가 실제성, 결국에는 그 "빌런"이 갖고 있는 동일한 욕망인 "재미"를 추구하고 있는 시청자 집단으로서의 우리에 대한 자성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출처: Guardian

이 "빌런" 집단은 극 중에서 가장 연기력이 떨어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원작자나 제작자, 스태프가 분명히 의도한 것이라면, 이 "빌런" 집단은 사실은 특별한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기보다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체성을 가리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이 게임에 돈을 걸며 서로 내기를 하고 있는 혐오스러운, "우리와 전혀 다른 인간들"이라기보다는 실제의 우리와 비교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게임판의 말"이었던 희생당한 수많은 게임의 일반적인 참가자보다오히려 더 시청자인 우리와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출처: Reason Magazine 등


그들은 게임을 연극판과 같은  앞의 공간에 가까이 다가가 보고 있는 "무인도" 실내 공간에서 동물 호피 무늬의 보디 페인팅 등을 하고 얼핏 전라같은 상태로 발판이나 소파 위아래에서 쿠션 역할을 제공하고 있는 많은 여자를 사물처럼 사용한다.


그 여자들은 극의 음란성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 최대한 뒷모습이나 등, 전체적인 실루엣 등으로만 나오고 있지만, 이 가면을 쓴 VIP들은 살이 찐 상태로 극 중의 걸음걸이도 일상 속의 우리가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배우답지 않게 건들거리고 있으며, 이들의 대사는 우리가 실제의 현실에서 남발하는 더더욱 일상적인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백인과 중국인(중국인 두보의 시가 언급되고 있어서 추정함) 등의 다채로운 구성으로 보인다.

출처: Guardian

아마도 무의식 중에 우린 우리가 이 "VIP"로 상징화되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죠커"라든가 "렉터" 등의 익히 유명한 "빌런"의 연기는 정말로 정밀하고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는 형식으로 이뤄진다. 이 극 속에서 제대로 된 전형적인 "빌런"을 연기해 낸 것은 "프런트맨"을 맡은 "이병현"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연기는 자로 잰 듯이 정밀했다.


그러나 "VIP"는 왜 그렇게 못하나 싶을 정도로 연기가 어설프고 찍고 있는 영상의 연출의 정도도 2~3류의 영상물 수준이 떠오를 정도다. 그럼으로써 일상 속의 우리를 오히려 잘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지 않은 시청자가 이를 "옥에 티"라고 비난하는데, 이게 만약 일상 속의 우리를 상징화하고 비유해서 드러낸 존재라면, 그것을 비난하는 목적은 "자기 방어"인지도 모른다.


얼마나 재미있었던 것인가? 성공의 이유는 무엇이었나? 떡밥은 어떻게 나왔고 어떻게 잘 회수되었는가? 다른 데스 게임류의 작품에 대한 표절작으로는 볼 수 없는가? 등의 이야기로 대다수의 글과 영상물, 미디어의 관점이 흐르고 있으며, 본격적인 담론 물의 성격을 지닌 내용을 찾기는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인터넷 서핑을 열심히 시도한다면 더 진지한 리뷰는 분명히 어딘가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이 작품은 이 시대에 글로벌 미디어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나라도 "넷플릭스"같은 OTT 서비스를 세워서 그들이 가져간 수익을 제대로 이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져야 한다는 매우 산업적인 방향으로 이 문화 상품의 성공의 효과를 해석하고 확장하는 리뷰가 훨씬 더 많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의 위대한 점이자 동시에 위험한 점은 "도덕성"과 "사회성"에 대한 고민을 불식시키며 잘 팔리는 흥행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든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그렇게 도덕성 유무를 가리지 않고 만들어 가는 작품 자체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작품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하면서 작품 자체로 작품 자체가 가진 위험성이나 메시지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징어 게임"이 무서운 것은 그 작품 안에서 잔인하게 게임판의 말로써 무가치한 죽음을 당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게임을 그만두고 나갔다가, 자신이 그 전에도 처해 있었던 암담한 현실을 깨닫고 다시 게임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장면이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 작품이 출구가 전혀 없이 살육판에서 서로 죽이는 것에만 몰입했던 다른 작품에 대한 차별성을 갖게 한 부분이다"까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현재까지 내겐 도드라지게 드러난, 눈이 가는 평이었다.


엄청난 흥행 성공이라는 후광이 생기지 않았다면 원래 이 작품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위험성 때문에 사회 각계 계층의 비난을 포화처럼 맞고 침몰할 수도 있는 작품이었지만, 일단, 성공했기 때문에 더 이상 왈가왈부할 것은 없고, 그보다 더 사회도덕적으로는 많이 벗어난 가상 디스토피아 세계에서의  "베틀 로열"이나 "큐브" 같은 일본과 미국의 작품에 비하자면 또한 그 정도가 많이 심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시대가 받아들이고 환호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왜 다른 데스 게임류의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의 극화와는 차별성을 가졌을까를 좀 더 극을 보는 내내 중점을 두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한국의, 또는, 전 세계의 이른바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을 벗어난 일종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문화/문명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간 "밀레니엄 세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 제대로 포착해서 드러냈기 때문이란 결론과 마주했다.

출처: Sportskeeda

적지 않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겐 낯선 게임이었겠지만 어느 나라에나 일부 일맥상통하는 "노는 것"이 상당수 부족했던 과거의 시대에 아이들이 대대로 전수하면서 놀았던 각각의 민족 전통적인 게임이 있다. 일부는 비슷한 게임의 규칙을 갖고 있고, 일부는 전혀 다르기도 하지만, 놀 것이 부족했던 시대에 아이로서 "밀레니엄 세대와 X세대"가 놀았던 극 중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꼰대들이 하는 게임"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넷과 모바일 문명, 산업화에 따라 나타난 수많은 장난감과 게임 기기 등을 무수히 갖게 된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오징어 게임"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구슬 게임", "줄 다리기" 등의 게임은 이젠 저 멀리의 역사적인 유물로 느껴질 수 있다. 그것과 동시에 잃어버린 게임을 하면서도 서로 간의 관계를 중시하여 적어도 같은 편이라면 "깐부"를 맺어서 놀이를 통해 딴 전리품을 공유하는 관계도 그 수십 년 전의 옛날에는 있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런 관계를 맺고자 해도, 사소한 갈등으로 벌어지는 소송관계로 점철된 첨단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쟁 소지의 여파를 걱정하고 있는 부모에 의해서 "주지도 받지도 않는 관계"가 되게끔 교육받고 길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상징적이고도 비유적으로만 나와서 그냥 실제의 현실과는 다소 다른 것으로 느끼고 넘어가지만 내가 더한 이익을 얻거나 직업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익을 기반으로 사회적 동맹 관계를 맺고,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빈 공간에서 무자비하게 경쟁 집단을 물리적으로나 비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사실 그냥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 치열한 경쟁 사회 속의 현실이다.


그 경쟁은 사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지만 이른바 그곳에는 최소한 같은 편끼리라면 통하는 원초적인 "인간 간의 끈끈한 신뢰"로 맺어진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오징어 게임"속의 극 중 현실에서는 그런 관계가 가루가 되도록 무너져 버린다. 돈과 권력을 지닌 이에게는 그런 관계를 게임 속에서나마 체험하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부부, 친구, 직장 동료, 학연 및 지연 관계라는 전통적인 인간의 관계는 시청자가 속한 실제의 현실 속에서는 맹렬하게 무너지고 있다. "승리호"같은 영화에서도 그려지듯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애플이나 구글, 테슬라, 삼성, 알리바바, 바이두, 네이버, 카카오 등등"의 첨단 정보를 활용한 제품을 팔며 경쟁자가 따라오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의 일부가 되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시대 변화 속에서 어떤 먹거리를 가지고 살아나갈 것인가가 막막한 직업인은 이 세계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고, 그런 첨단 대형 기업 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경쟁 속에서는 그런 "진실하고도 진정한 인간 간의 관계"라는 것은 필요 없는 것으로 그 구성원 안에서 사라져 있을 것이다. 단지, 전략적 제휴 개념의 사회적 협력 관계가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런 관계를 중시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자신의 생존에 위험한 사회로 이른바 진화하고 있는 것이 이 세계의 모습임을 글로벌 시청자 대부분이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오징어 게임"은 이를 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우화 속에서 그리고 있으며, 그것을 실제 하는 것으로 깨닫는 과정에서 극의 각 부분에서 나오는 갈등의 심화와 변화, 결말까지의 우여곡절을 경험하는 시청자들은 끝까지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56억 원"의 상금이란 가치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인류 전체가 잃었고, 앞으로 더 잃어갈 것이 뻔한 이 세상에서 이제 인류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를 묻는 진지한 질문이 자극적이고 잔인한 스토리와 영상의 배면에 있었다.


일면 순진하고 오지랖 넓게 이런저런 사람의 안위를 살피고 배려하던 극 중 주인공 "홍기훈(이정재)"의 모습이 계속 시청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그런 비현실적이고 극 중의 현실은 물론이고 극 밖의 현실에서도 별 필요 없어 보이는 "인간성"의 일부분인 신뢰와 믿음, 배려, 선행 같은 가치가 아직 시청자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킨 큰 이유라고 느꼈다. 다른 "데스게임류"는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그리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부분이 없거나 중요하게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같은 이 대회의 우승자 중에 하나로서의 "프런트맨"은 자신의 동생을 쏴서 바닷속으로 떨어뜨리는 존재로서 비인간화된 상태로 등장하지만, "홍기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비인간적인 집단과 싸우기 위한 시도를 하는 존재로 그려지면서 시즌 1이 마무리되었기에, 시청자는 스스럼없이 시즌 2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즌 2의 성공의 가능성은 어찌 될지 낙관적인 기대만을 품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다.

출처: Daily Express

그것은 적지 않은 시청자가 "VIP"라는 존재와 자신 간에 흐르는 유사성을 무의식 중에 느끼고 이를 알게 모르게 불편해하고 있는 점이다. 이런 흥행에 장벽이 될 수 있는 장애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다시 높은 흥행 성적과 더불은 사회적 반향을 이 드라마의 후속 편이 누릴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다. 이 극이 이미 무너지고 사라지고 있는 것을 돌려놓기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렸는지는 앞 뒤 세대에 잘 알려줄 수 있는 작품으로써 살아남으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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