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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Feb 20. 2022

<나일강의 죽음>-영화의 본질에 보다 더 충실하다

짜릿하게 순간순간 자극을 선사하지 않는 영화라도 재미있게 보는 법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에겐 추천하지 않는 글입니다.


아무리 책 보는 것을 즐기는 텍스트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라도 어린 시절부터 보았던 모든 책의 세부까지 기억해서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감정이나 여러 환경 상의 계기와 맞물린 기억으로 남아서 세부가 떠오르는 것이 어렵지 않거나 여러 번 보았던 서적이 아닌 이상 핵심을 떠난 세부까지 모두 기억하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리메이크 작을 보게 되거나 심지어 이전에 봤던 영화나 책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적지 않은 인생을 대략 반세기 가량 살아온 사람이라면 마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만나게 되기도 하는 법이다. 이것은 사람을 대할 때에도 비슷한 것이라, 먼 기억 속의 사람을 현재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존재를 만나게 되면서 기억에 균열이 오게 될 경우도 있다.


감독이자 "주연 배우로서 "명탐정 에르퀼 포와로"를 연기한 "케네스 브레너"가 과연 이 오래 전의 현대 고전 추리물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심지어 내용 속의 트릭과 결말까지 익히 알고 있을 관객과 어떤 머리싸움을 기획하고 있었을까를 추리하면서 영화를 본다면, 그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기억"과 실제 상영 시간 동안 벌어지는 "내용"을 경험하는 시간은 좀 더 흥미진진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방법론을 그렇게 정하고 보니 역시나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끝나는 시간까지 자리에서 거의 미동 없이 계속 스크린을 마주할 수 있었다.


원작의 스토리를 익히 알고 있는 분에게 권장하는 영화 보기의 방법 중에 하나일 수 있고, 내겐 성공적이었다.


일단, "디즈니"로부터 소정의 비용을 받아 기대평을 쓰면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썼었기 때문에 내게는 부채감 비슷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런 기대평을 보고 영화를 봤을 사람에게 실제의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는지 쓰는 것은 내겐 분명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기대평을 쓰고 난 뒤에 2월 9일 개봉일부터 어떤 흥행이 이뤄지고 있는지 하루하루 기사를 살펴보고, 관객들이 남겨 놓은 평도 보았다. 대략 반반 정도로 호불호가 나뉘고 있었는데, 대략 받은 인상은 느릿느릿한 전개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반면 스토리와 연기에 대해서는 나름 호평이 많이 나와 있었다. 흥행 1위의 자리를 차지한 기간도 있었지만, 이번 주말에는 예매율로는 6위권 정도에 와 있다.


오늘, 대학로의 CGV로 영화를 보러 가서 예매도 없이 현장에서 표를 산 뒤에 나만 입장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가 "럭셔리하게 플렉스"하는 기분으로 혼자 영화관을 전세라도 낸 양 스크린을 쳐다보다가, 상영 직전에야 여러 명의 관객이 들어오면서 "마스크"를 쓰라는 직원의 요청을 받고서야 마스크를 썼다.


잠시 흑백 화면이 나오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쟁터를 다룬 영상이 올라와서 처음엔 혹시 다른 영화를 보는 관에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잠시 생겼었다. 나가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엉덩이를 들썩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야 젊은 군인인 "에르큘 포와로"가 전쟁터에서 적군을 어떻게 기습할 것인가를 묻는 중대장에게 하늘에 떠 있는 새를 관찰하여 바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설명한 뒤에 지금 바로 가스를 뿌리고 기습을 해야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감으로 아군을 설득해서 방독면을 쓴 채로 가스를 뿌리고 적진에 진입한 뒤에 기습에 성공하지만, 중대장이 부비트랩을 건드리는 바람에 폭사하고 자신은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된다.


간호사 중에 "에르퀼 포와로"를 사랑하는 간호사가 있어 그를 찾아왔을 때, 결혼을 약속했었지만 얼굴이 이같이 망가졌으니 그래도 결혼하겠는지 묻자 그런 것 상관없이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짝 눈가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이 냉정한 명탐정의 이미지를 어떻게 "케네스" 감독이 변화시키기로 결정한 것인지를 단숨에 알 수가 있었다. 이 포인트부터 "감정적인 연기"를 자유자재로 발산하는 "에르퀼"을 관객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원작의 조연을 상당수 없애거나 중요 인물에게 병합시켜서 스토리를 훨씬 더 직선적이고도 단순하게 만들었다. 복잡성을 줄이고 추리의 엄밀함과 정밀함을 드러낼 장치를 대폭 없애면서 사실 원작을 보았다면 자세히 나왔을 과정과 인물 간의 갈등의 요소를 대폭 줄였고 극 진행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면서 나오는 인물 간의 "사랑" 스토리를 더 강화하면서 "에르퀼"도 그 "사랑"이란 것 때문에 평생을 후회하고 번민하며 살아온 존재이자, 다소 우스꽝스럽게 길러낸 수염조차도 진지하게 자신의 흉터를 숨긴 충분한 이유를 가진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진지한 사랑꾼으로 변형시켰다.


그럼으로써 사랑 관계이자 사건의 메인 스트림이라 할 수 있는 "리넷 릿지웨이 도일+사이먼 도일+재클린 드 벨포르"라인에 교차되는 "로잘린 오터번(고모가 살로메 오터번)+부크(어머니인 유피미아와의 갈등 관계)"의 사랑 도피를 꿈꾸는 내용, "메리 벤 슈일러+바워즈 부인"의 여성 동성애 관계에 "에르큘 포와로+샬로메 오터번"의 "썸"을 타는 관계를 추가함으로써, 관계 간의 교차를 다루는 극화로 "나일강의 죽음" 원작의 내용을 대폭 각색했고, 관객의 이성보다 감성에 보다 더 접근하는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이런 각색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흥행은 잘 되지 않았겠지만, 일단, 국내 개봉 시에 1위까지도 치고 올라갔던 적이 있었고, 홀로 영화관에 잠시 앉아 보던 중에도 어느 정도의 이상의 흥행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다고 느꼈다.


1. 첫 장면에서 만들어진 "에르퀼 포와로"의 이미지가 나름 이 시대에 다시 명탐정인 그의 이미지를 새롭게 변모시켜서 제시하겠다는 것을 확고하게 만들어 냈고, "셜록 홈즈"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에 의해서 최근 수년간 원형을 떠올리기 쉽지 않을 정도로 변모했다는 것을 떠올렸을 때, 나름 방향을 잘 잡았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2.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아부 심벨을 촬영한 부분을 보거나 나일강을 가로지르는 "카르낙 호"를 보는 장면은 전반적으로 극장까지 와서 이 작품을 보기로 결정한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로 잘 만들어져 있고, 극의 초반에 "재클린"과 "사이먼"이 같이 춤을 추는 클럽에 "에르퀼 포와로"와 "리넷 리지웨이"가 각각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진입하는 장면은 두 사람이 가진 나름의 유명세와 무게감을 현장감과 더불어 느낄 수 있도록 찍혀 있었다. 이 또한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면 쉽게 느낄 수 없는 이 영화의 장점이다.


3. "샬로메 오터번"을 연기한 흑인 여배우 "소피 오코네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은 여러 번 반복되면서 그 시대의 분위기를 현대로 가져오는 장치로써 잘 작동하고 있으며, 극의 마지막에 "썸"을 제대로 해보려 극장에 오면서 수염을 밀고 와서 훙터를 드러낸채 진실한 자신을 사랑할 사람이 그인지 확인해보고자 하는 "에르퀼"을 보는 장면은 나름의 감동을 관객에게 던진다.


4. 유피미아 역을 맡은 "아네트 베닝"은 오랜 시간 그의 연기를 지켜봤었던 바, 가장 수준급의 연기력을 선보였다고 느꼈다. 사랑에 대해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아들인 "부크"와 흑인 여성인 "로잘린"의 결혼을 절대 반대하는 고집 세고도 나름 성실하게 자신의 그림을 계속 그려가고 있는 모습, 이후에 아들이 죽고 나서도 슬픔과 분노 속에서도 사건의 해결까지 버티면서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 모습을 잘 연기해냈다.


5. 영화 속의 밀실인 "카르낙 호"에서 총 5명의 인물이 죽은 뒤에 각각의 시신을 미라처럼 싸매서 내리는 장면이 마지막에 나오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도 일종의 의식처럼 잘 정리되면서 극이 둔중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 나게끔 구성되어 있다.


6. 장면 장면이 형식적으로 잘 완결되어 있고, 군더더기를 최소화하고, 언급되거나 보여주었던 내용이 다른 곳으로 그저 사라지지 않고 극 내에서 온전히 소화되고 있다. 이것이 심심해 보일 수는 있지만, 깔끔하게 마감이 잘된 자동차를 하나 받는 느낌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감을 적지 않은 관객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을 수 있다.


1.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의 장대한 이집트 여행의 장면과 "리넷"과 "사이먼", "재클린"간의 갈등 장면이 점차적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단계적인 사건의 전개가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따라서 떼내고 축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디테일이 하나씩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관계가 포인트를 잃은 채 연결만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2. 인터넷을 뒤져보면 "사이먼 도일"을 배역으로 맡은 인물이 성폭력과 식인 발언 등의 문제로 언론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었고, 그가 나온 장면도 일부 편집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노력해서 만든 일부 "사이먼 도일"이 나온 장면이 삭제됨으로써 극적 긴장감에 손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3. 고전미와 극의 완결성에 더 치중하면서 현대의 "아가사 크리스티"란 작가의 후광 효과를 잃어버린 관객에게 어필하기 위해 "로맨스 라인"을 강화하고, "에르퀼 포와로"라는 명탐정에게 고질적으로 발견되었던 단점을 극 중의 "로잘린"의 대사로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뒤에, 이를 벗어나 더 호감 가는 캐릭터로 그를 변형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원작의 "에르퀼 포와로"의 팬과 "에르퀼 포와로"를 잘 알지 못했던 관객 양쪽에 어필하는 바가 기대만큼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출처:  rogerebert.com

4. 극의 내용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재클린"이 가진 원작 캐릭터 속에서의 복잡성과 주도성 등의 나름 매력적일 수 있는 포인트가 증발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그냥 직선적이고 단순한 캐릭터가 되면서 추리의 결론에서 강력한 임펙트를 선사하지는 못한다.

출처: The New York Times

5. 감정적인 긴장감을 좀 더 극대화 시키는데 노력하는 동시에 흑인의 인권 개선도 신경쓰고, 레즈비언 관계도 언급하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 자식의 선택권 등을 신경 써서 나열했지만, 그런 것에 배분한 시간만큼 추리의 긴장감과 밀도를 높이는 것에 배분하기에는 유감스럽게도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관객은 이런 극 중의 인물과의 두뇌 싸움 영역은 크게 부담으로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은 사실 장점이기도 하지만, 기대 수준이 높은 관객에겐 단점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평론가들이 까기 좋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을 같이 나열하면서도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의 이 부분을 이렇게 만들고 관객이 예상했던 내용과는 다른 장치를 펼쳐서 나름 신선한 느낌을 받는 장면을 보도록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면서 보다 보면, 나름 재미있게 흘러간다.


하나하나의 주요 인물을 용의자로서 취조하면서 때론 협박도 하고, 혐의점을 압박하기도 하며, 총을 들고서 분위기를 잡은 다음 남아 있는 모든 인물을 배안에서 취조하면서 압축된 추리를 진행하는 장면 등에서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로서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것을 올드한 영화 스타일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물론, 더 이상 옹호할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흥행 성적이 연속적으로 높은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런"같은 이가 시도했다면 분명히 영화의 본질에 더 치중한 작품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연출 방향을 잡았던 것이라고 여러 영화 평론가들이 말했을 거라고 느꼈다.


"필름 영화로서의 미덕"인 실사 스케일이 큰 장면 장면을 화면에 남기면서 오랜 필름 영화 역사의 고전적인 본질인 영상미에 제대로 집중해서 촬영을 했고, 배우 각각의 연기도 디테일이 살아 있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그냥 "MCU 나 DCEU" 같이 너무 재미있고, 관객의 시선을 알아서 멱살 잡고 끌고 가듯이 만들어 온 흥미진진한 히어로 무비나 긴장감의 중첩이 지속적으로 잘 이뤄졌던 "시카리오"같은 작품과 동일한 기준점에서 본다면 이 영화를 평가할 점수는 한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최신작"으로서의 빠른 장면 전환과 기발한 "추리물", 원작을 최대한 복원한 작품을 기대하면서 보고자 한다면 필히 실망할 수밖에 없다. 감독이 이 현대 고전 추리물을 현시점의 영화판에 가져오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마치 감독의 의도를 발견해내는 것과도 같은 두뇌 싸움을 해야 영화 속에서 긴장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나처럼 이 영화에 대한 기대평을 작성한 바가 있는 사람에게는 의무와도 같이 해야 할 일이 된 것 같지만, 그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의무"가 아닌 그저 "선택 사항"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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