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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May 01. 2022

<베네데타>-노장의 대중에 대한 깨달음이 담기다

"가장 대중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 예제, 폴 버호벤에 대해

스포일러는 역사에도 남아 있고, 수많은 글 속에 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글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에겐 권하지 않습니다.


"폴 버호벤" 감독은 현재 83세의 노장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이고, 장사꾼의 나라로도 유명하고, 히딩크를 통해서도 더 친근하게 우리에게 다가온 그 나라의 생명력이 무척 긴 유명인 중에 하나다.


아직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될 정도로 그가 만든 영화는 사춘기부터 지금까지 일정 수준 이상의 대중적인 즐거움을 주지 않은 영화가 없었다.


물론, 블록버스터 작품 몇 개에 불과하여 오히려 보지 않은 작품이 더 많긴 하지만 1990년작 "토털 리콜"부터 오늘 본 2021년작 "베네데타"까지의 몇 작품 모두가 보는 내내 관심을 다른 곳에 기울이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었다.


"로보캅"과 "원초적 본능", "스타쉽 트루퍼스" 그리고 이번 감상문 전에 올린 글의 "쇼걸"까지 실망스러움을 내게 준 적은 없었다. 이제까지 놓쳤던 다른 작품도 찾아서 봐야겠다.


33년 동안 틈틈이 홈런을 날리고 있는 강타자로, "매드 맥스" 시리즈를 40년을 건너뛰어 다시 만들어도 최고 흥행을 기록한 "조지 밀러" 감독 정도가 그와 비교할 수 있는 감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최근에 한국어로 외국어 발음을 작성하는 방식이 바뀌어 오면서 보다 원어 발음에 가깝게 "파울 베르후번"으로 바뀌어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오늘 검색을 하다가 처음 알게 되었는데, 꼭 다른 사람 같은 이미지가 들어서 그렇게 적고 싶지 않았다.


마치 수십 년 알아온 친구나 지인을 전혀 다른 존재처럼 대해야 하는 낯섦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한국어로 표기된 이름과 작품에 대한 인상은 내게 확고하게 동기화되어 있다.


"토털 리콜"이란 영화가 "폴 버호벤"이 만든 원본을 그 이후에 아무리 대단한 영상 기술을 접목하고 밀도 높은 스토리와 훌륭한 배우의 연기력으로 강화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원본에 대한 감동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시대에 맞춘 작품이 만들어졌어도 "폴 버호벤"의 작품이 더 나은 평가를 받은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폴" 감독만큼의 대중의 관심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본질"같은 것을 깨닫고 있는 감독이 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고유의 존재 썰" 하나 더 추가다.


그는 대중의 "몸"에 흥행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음을 알고 있는 여러 센슈얼함과 관능성, 에로티시즘 등등을 구사하고 있는 이른바 "에로물 감독"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의 "성애" 장면을 스토리 상에 적절하게 끼워 넣는 감독이다. 예전의 다소 위선적인 교양 우월주의의 지구에는 다소 과도해 보였지만, 지금은 적절해 보인다,


영화의 끝까지 인간의 "몸"에 관련된 욕망이 미치는 요소와 파급되고 연결되는 상황에 대해서 대중이라고 불리는 관객이 관심을 잃지 않고 끌려갈 수밖에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파악하면서도 냉철하게 생각해서 표현하는 감독으로서 위대하다.


이전에는 이런 방식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속물"이나 "흥행"에 영합하는 수준 낮은 감독으로만 해석할 수 있었고, 아직도 검열을 의식하는 단어를 구사하는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조심조심 글을 쓰며 그런 것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짐짓 거리를 둬야 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고, 나 또한 그러하다.


그런 살색을 훤히 내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감독이라는 분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고 이 용기가 살아 있는 내내 넘치고 대중성의 화신과도 같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성"의 핵심이 "몸"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작품을 제작하는데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라는 문장에 어울리는 몇 안 되는 감독 중에 하나로서 그 본질을 지난 수십 년간 잃지 않았다. "베네데타"를 젊은 신진 감독이 만들었다고 누군가 우기더라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부터가 "스포일러"의 영역이다. 그런데, 솔직히 양심에 꺼릴만한 "스포일러"가 아니라, 이번에는 오히려 읽기를 유혹하는 듯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을 정도다.


왜냐면, 그 "스포일러"를 알고 본다고 해서 재미가 줄어들만한 영화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스포일러"를 보고 나서 궁금증이 더 일어나서 봤고, 그 결과 더 재미있었다.


실화를 근거로 한 이 작품은 대략 20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면 1995년도에 만들어졌던 "쇼걸"이 "교양 우월주의"의 가면을 쓴 "지식인"인척 하는 양식을 가진 수많은 평론가와 사회적 인사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던 것 이상으로 "신성모독"이니 "포르노"에 가까운 작품이니 "레즈비언"을 옹호하니 하는 포화를 집중적으로 받았을만한 작품이다.


80세나 된 노장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신선함을 불러일으키는 바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이 시대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력한 국가의 언어와 문화권 영역에서 만들어졌다면 그 사회 안으로부터 극심한 반발 세력이 생겼을만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가 그런 포화를 맞기를 회피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할리우드에서 그가 "블록버스터 감독"으로서의 충분한 쓸모를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이 영화는 나오는 배우들이 할리우드 영화에도 영어를 하면서 나오기도 하는 중량급의 배우도 포함하고 있긴 했지만, "불어"만을 써서 만들어졌다.


그 실화가 벌어진 장소인 중세 유럽의 가톨릭이 가장 부패했던 17세기 프랑스의 "페샤"의 현장감과 현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나름대로 고증을 철저히 걸친 장소에서 "불어"로 연기를 했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만든 작품보다 더한 작품성이 느껴진다.


"네덜란드 인"이 "프랑스 배우"로 "프랑스"에서 어느 정도 "할리우드 방식"을 접목해서 극적 긴장감을 높이면서 만든 영화다라는 것이 내내 보면서 드는 이 영화의 정서다. 디테일은 강화되었고, 대중성과 상업성의 영역은 높아진 디테일에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오로지 권력적으로 상승코자 하는 경향에 과몰입해있는 "베네데타"처럼.



17세기의 유럽은 이른바 암흑시대로 불린다. 그 시기의 정치, 사회, 종교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구 기독교, 즉, 가톨릭이라 불리는 종교는 부패의 최정점에 달해 있었다. 그런 시대상의 일부를 보여주듯이 당시의 여자로서 "수녀"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인 계급의 상향을 의미했고, 그러기 위해서 "수녀원"에 딸을 보내려고 하는 부모는 지참금을 준비해서 같이 주어야만 했다.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 어린 "베네데타"의 가족 일행은 수도원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서 도적떼를 만나게 된다. "베네데타"의 어머니로부터 금 목걸이를 창에 꿰어 뺐던 도적들은 그런 이유에서 이 가족들이 수녀원으로 "베네데타"를 보내기 위해서 가는 길임을 알고 "지참금을 많이 가지고 갈 테니 뺐어야겠다"라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어린 "베네데타"가 자신의 기도와 요청을 "하느님"이 들어주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를 끼치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당찬 이야기를 비웃으면서 듣는데, 우연찮게도 새가 도적 중의 하나의 눈에 새똥을 떨어뜨리고, 이에 찜찜함을 느낀 도둑들은 뺐었던 목걸이마저 다시 돌려주고 도망가 버린다.


이 장면에서 이미 그전부터 앞으로도 "베네데타"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방향과 메시지가 관객에게 전달되었고, 이전의 "폴"의 몇몇 편의 영화와도 달리, "베네데타"는 "자신은 "성령"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을 지닌 채로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초지일관 달려간다.


이 영화에서 "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정체성을 가진 존재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 모든 각각의 과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왜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는 종교를 믿었건 처음부터 믿지 않았건, 다른 것을 믿었건 간에 이 "베네데타"라는 인물은 확고한 자기중심을 잡고 움직이는 인물의 아주 대표적인 예제로 어찌 보면 굉장히 전형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수녀원에서 벌어진 "레즈비언" 성행위와 "성모상"을 깎아서 자위기구 대신으로 사용한 것, 예수의 몸에 난 것과 같은 상흔이 나타나는 기적(또는 조작), "흑사병, 페스트"의 전 유럽적인 확산 속에서도 안전했던 "페샤"의 역사 등의 내용이 에피소드처럼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종류의 자기 확신을 가진 자기중심적인 이들을 일상 속에서 종종 경험하고 있기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그 대단한 "꼰대" 그룹일 수도 있을 터고, 종교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과학을 포함한 학문, 예술, 경제 등 그 모든 것에 임해서 자기 확신을 기반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초지일관되게 성공과 상승을 위해서 모든 것을 기울인 사람 부류를 나로 하여금 떠올리게끔 만든다.


그들에게 "정의"는 하고자 하는 일에 부합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에게 "불의"는 하고자 하는 일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그"가 있다. 그 자신이 아닌 것에 있는 의미는 거의 영향력이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영화의 첫 기적인 수도원에 들어온 첫 밤에 자신 앞으로 쓰러진 거대한 성모상의 밑에 깔려서도 멀쩡했던 아역 배우가 연기한 "베네데타"는 그 아래에서도 성모상의 한쪽 벗겨져 있는 가슴에 있는 젖꼭지에 입을 갖다 대고 빤다. 이 장면이 그의 성적 지향성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을 이임을 드러내 준다.


그 과정에서 "원장 수녀 펠리시타"와 어린 "수녀 크리스티나" 두 사람은 이 같은 기적의 의미에 대해서 사건 이후에 잠시 단둘이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작스럽게 짧은 순간에 일어난 기적"은 "불길하고 좋지 않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 두 사람은 알고 보니 어머니와 딸의 관계였다.


원장 수녀, "펠리시타" 역할을 맡고 있는 "샬럿 템플링"은 차가운 이성을 지니고 최초에 "베네데타"의 가족이 방문했을 때, 그의 아버지와 지참금에 대한 흥정을 하는 장면에서부터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사실 "성령의 기적"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의구심을 갖고 있는 수도원 권력의 상층을 점유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베네데타"와의 대결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여가는 내용 속에서 일부분은 "깊은 신앙심과 정의감"을 지닌 인물로도 그려지며, 이후에 딸인 "크리스티나"가 "베네데타"의 자해에 대한 공개 고해를 하는 과정에서 딸의 편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신념과 솔직함"을 선택함으로써 비극을 초래 하기도 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스스로 파국 속에서 극단을 선택하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가장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이의 모습을 제대로 연기해냈다.


그 외의 인물들이 대부분 단선적인 성격을 연기해냈다면 오로지 그만이 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일상 속의 인간다운 면을 제대로 연기해냈기 때문에, 사실 이 영화의 극적 긴장감과 반전, 극의 전개에 가장 비중이 높고 공헌도가 높은 역할을 한 인물을 꼽자면, 이 배우를 꼽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국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자란 경험을 기반으로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불어"를 구사했다. 깊이와 너비를 지닌 내공이 높은 배우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베네데타"는 첫 기적 이후에 긴 세월이 지나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하고 나서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생생하게 양을 몰고 다니는 "예수"를 영접하고 스스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고 믿게 되고, 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확고하게 자신이 "예수"와 직접 연결된 존재라고 믿고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환상을 평범한 실사 화면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자칫 유지해질 수도 있을 내용을 오히려 더 생동감 있게 그 시대에 있어서 그와 같이 "신"과 연결되었다는 자신의 확고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중세 유럽의 "수녀"와도 같은 실제 했던 사람의 의식의 일부를 현대인이 다시금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본다.


그런 그의 믿음은 사실 그대로만 남아 있었다면 독실한 성직자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수준에서의 "베네데타"의 일면 평범한 스토리로 진행되었겠지만,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수도원에서 원장 수녀와 함께 모여있던 때, 수도원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자신의 아버지를 피해 양들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뛰어든 산발의 소녀, 그리스 배우인 "다프네 파타키아"가 연기한 "바르톨로메아"가 뛰어들면서 중세 종교사에 특이점을 선사한 "수도원 스캔들"이라는 "논픽션"으로도 그려진 실화 스토리에 그려진 파국이 그 시작을 알리게 된다.


아직 이 시기까지 인간 본연의 동정심과 연민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뛰어든 "바르톨로메아"의 미모에 바로 혹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네데타"는 수도원이 "바르톨로메아"를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지참금"을 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펠리시타 원장 수녀"의 이야기에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해서 그 돈을 내도록 만들고, "바르톨로메아"의 아버지가 자신의 소유물인 딸을 주는 것이므로 돈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자마자 "베네데타"의 아버지는 그 돈도 내겠다고 한다.


하층민이었던 상층민이었던 그 시대에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전반적인 분위기와 적절한 대가만 지불될 수 있다면 정상적인 가정에서도 자식에 대한 매매가 벌어질 수 있었던 그 암흑세계의 분위기를 일순 빨아들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 시대의 아둔함과 어두움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장면은 그 이후에 수녀원에 들어와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바르톨로메아"와 “베네데타”가 수녀원 내의 화장실을 찾아 어두운 복도를 지나 일자로 된 벽에 붙은 판자 위의 뚜껑 두 개를 열고 나란히 앉아 용변을 같이 보면서 "바르톨로메아"가 익살스럽게 방귀를 뀐 뒤에, 벽 사이에 끼워 있는 풀들을 뜯어서 닦으라고 "베네데타"가 한 줌 건네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그전에 "바르톨로메아"가 자신은 원래 사육하고 방목하던 동물들과 함께 배설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함으로써 이 시대의 암울함을 더 강조한다.


그 이후에 "바르톨로메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소유물로서, 그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아버지의 성욕 배설 대상으로 사용되고, 자신의 오빠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 끔찍한 중세 암흑기의 일상이 살짝 와닿게 느껴지도록 만든 것은 "노장"의 노련한 연출의 효과였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베네데타"는 그런 비극이 있었던 이유가 "바르톨로메아"의 "미모" 때문이었다고 이야기하고, 거울을 본 적이 없어 자신이 이쁜지도 몰랐다고 하는 "바르톨로메아"에게 자신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보라고 하며 가까이 오도록 하면서 용변을 보던 곳에서 첫 성적인 접촉이 일어나려 했으나 다른 수녀, "크리스티나"의 감시에 의해서 중단된다.



그 이후에 "바르톨로메아"의 유혹을 경험하게 되는 프랑스 영주권을 가진 벨기에 배우 "비르지니 에피라"가 연기하는 "베네데타"는 조금씩 노출을 화면 속에서 펼치기 시작한다.


지금의 시대에야 이미 어떤 경로로든 노출 사진이나 영상 등을 경험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20  전이었다면 충격적인 수준이었을 노출이 그저 평범느낌으로 이뤄진다. 물론 연소자에겐 다소 충격적일  있는 수준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장면 바로 전에 "바르톨로메아"가 얇은 천에 가려진 상태로 목욕을 하던 중에 넘어질뻔하면서 드러나 보이는 가슴에 "베네데타"의 손이 닿게 되고 당혹감에 휩싸인 채로 잠시 멈춰진 상태의 "베네데타"가 성적인 감흥을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연기를 말끔하게 소화하고 있는 배우의 능력도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그와 같이 평범하지 않게끔  영화를 만드는 장면은 "예수" 결혼한 자라고 믿고 있는 그에게 다가온 "바르톨로메아" 유혹을 "여러 마리의 " 머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것으로 수도원의 연주  합창 중에 환상으로 경험한 "베네데타"에게 "예수" 나타나 칼로 뱀을 모두 베어 버리는  뻔하지 않은 변주로 나타나는 영상이다.


그 이후에 "바르톨로메아"와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서 "크리스티나"와 부딪쳐 뜨거운 물속에 그가 운반하던 "실패"들을 떨어뜨린 "바르톨로메아"에게 뜨거운 물에 손을 넣어 당장 모두를 건져내야 한다고 강요하며, 그러지 않으면 수도원 밖으로 쫓아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에서 "베네데타"의 본질이 "자신의 환상 중심"에 빠진 독선임을 드러낸 장면이 보다 더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 억분에 빠진 채로 뜨거운 물에서 "실패"들을 건져 낸 뒤에 손이 망가지는 "바르톨로메아"의 흥분된 모습의 연기도 굉장히 표현이 잘 되었다.


그렇게 다친 뒤에 "펠리시타"에게 왜 그렇게 했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은 "베네데타"는 차분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잘못한 일에 대한 처벌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펠리시타"로부터 "바르톨로메아"를 바로 옆에서 돌보도록 조치를 당하는 장면에서 "베네데타"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었는지가 모호하게나마 드러나게 된다.


둘은 얇은 천으로 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나신을 바라보게 되고, "바르톨로메아"는 "베네데타"의 육체에 매혹되게 되어 그러한 자신을 솔직하게 말한다.



"폴 버호벤"은 이런 관계의 증폭, 성적인 에너지의 상호 교환, 서로에게 점점 매혹되어가는 때로는 점진적이고 과격하기도 한 "동성애"와 "이성애" 관계의 교차를 자연스럽고도 흥분되게 연출하는 데 있어 이미 수십 년의 경험을 쌓은 "장인"과도 같은 기법을 가진 감독이다.


그에게 이 실화가 어떤 인상으로 다가왔을지를 조금 상상해보면, 결국 이 실화에 대한 에로티시즘이 제대로 접목된 스토리와 장면을 구상하는데 얼마나 열정적이고도 깊고도 넓게 사고를 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해볼 수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욕을 먹거나 폄하당하는 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일상과도 같았다. 그런 오해야, 아니, 그런 오해가 아닌 드러난 수많은 관객의 "속물근성"을 제대로 포착하고 드러냈다는 사실에 대한 비난이야 하나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러한 감독의 "페르소나"라도 된 듯이, 역사적으로 예견된 파국으로 가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와도 같은 "성흔"이 몸에 나타나도록 만들게 된 계기로써, 몸이 아픈 나이 많은 수녀 한 사람을 간호하게 된 장면이 사실 "바르톨로메아"와의 밀접한 관계가 심화되기 전에 하나 드러났다.


그 수녀는 자신을 간호하러 온 "베네데타"에게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겪었던 설움과 "예수"를 죽인 민족의 하나로서의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하면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가슴에  상처와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로 물들어져 있는 침상의 이불과   "베네데타"에게 이후의 장면들은 그곳에서 "자해" 함으로써 얻을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착상을 그가 얻었으리란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어느 날 "바르톨로메아"의 유혹을 받았다가 잠에 들었던 "베네데타"에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나타나며 옷을 모두 벗고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이야기를 들은 "베네데타"는 송두리째 모든 것을 벗은 상태로 십자가에 올라가 온몸을 "예수"에게 밀착시키면서 고통에 겨운 비명을 수도원 전체에 울린다.


양손과 허리, 양 발목에 구멍이 뚫린 채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성흔"이 나타난 상태의 "베네데타"는 수도원의 고위 남자 성직자와 많은 수녀로부터 "성령"이 나타난 기적으로 인식되게 되지만, "펠리시타"는 "성흔"이 나타나서 "성인"이 된 사람들의 특징은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나타났지, 잠에 든 상태에서 벌어진 적이 없으며, "가시 면류관"이 쓰였던 이마에서도 피가 났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베네데타"의 기적은 "예수"의 "성흔"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반론을 펼친다.


"성흔"을 1차적으로 보여주고 난 밤에 "바르톨로메아"가 "베네데타"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나온 신음 소리 때문에, 수녀원의 밤에 논란이 일어나는 장면이 잠시 나오면서, 기대한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두 여자의 흐드러진 육욕의 향연은 수도원에서 벌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상황이 이해되는 밤이 하루 더 지난다.   


그런데, "성흔"이라는 기적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성모상 앞에서 혼자 기도하던 "베네데타"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며 이번에는 반론의 대상이었던 이마에서마저 피를 흘린다.


이를 보고 달려갔던 "바르톨로메아"는 그의 주변에 깨진 유리가 있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장면은 전환되면서 자해의 증거를 누군가 발견한 스토리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펠리시타"와 그의 딸 "크리스티나"는 단 둘이 모여, 이것이 명백하게 "베네데타"가 자해를 통해서 벌이고 있는 사기라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나, 직접 그 자신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기는 한다.


'정말로 예수로부터 "성흔"을 받았던, "예수"로부터 몸에 성흔을 남기라는 명령을 받고 이 때문에 스스로 몸에 성흔을 냈던,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는 거짓말쟁이가 몸에 상처를 내고 하는 헛소리이던 진실은 밝혀지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펠리시타"는 자못 냉철해 보이기도 한다.



몸에 "성흔"이 있는 수녀가 나타남으로 해서 사실 이 수도원은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변방의 시골 수도원에서 일면 격상된 지위를 갖는 곳으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될 수 있다.


그 때문이겠지만, "페샤"의 이 수도원의 남자 고위 성직자들은 이 기적을 기정 사실화하며, 기존의 "원장 수녀 펠리시타"의 지위를 빼앗아 "베네데타"에게 준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고통이나 자신의 반대 세력이나 반론을 접하게 될 때마다 "베네데타"가 "예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로 외치는 장면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 다른 수녀나 기타 출연자로부터 그 목소리가 정말로 "예수"의 목소리처럼 들린다라는 직설적인 대사나 반응은 없지만, 영화 속의 좌중이 압도되고 있음을 관객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펠리시타"는 원장수녀실을 비우면서 바깥으로부터 안을 볼 수 있는 벽의 구멍 앞을 막고 있던 그릇을 치우고 나가며, 그런 것이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베네데타"와 "바르톨로메아"는 웃음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수도원 내의 폐쇄되고도 자유로운 공간인 "원장 수녀실"에서 바로 "성교"를 시작한다. 그 둘 사이에는 모자란 것이 하나 더 있다.


그 대사와 움직임, 노출 모두가 수위가 매우 높은 수준이지만, 이미 그런 장면이 사회적인 논란을 낳기에는 너무 평범해진 이 시대에 역사적인 사실 하나가 더 극적 긴장감을 높이도록 등장한다.


그것은 최초에 "베네데타"가 수녀원에 들어올 때 가지고 들어왔던 두꺼운 원통형의 모습을 가진 "나무 성모상"의 밑부분을 "바르톨로메아"가 깎아서 "자위 기구 형태"로 만들어 둘 간의 유희에 사용하는 "신성모독"적인 장면이다.


다시 말하지만, 10~20년 전에 이 작품을 "폴 버호벤"이 연출해서 세상에 나왔다면 "쇼걸"에 대한 논란보다 훨씬 증폭된 비난 때문에, 영화는 금지된 작품이나 저주받은 작품의 대열에 틀림없이 끼어들었을 것 같다.


아직도 청교도 국가로서의 면모가 사라지지 않은 미국이나 일부 남미 국가, 러시아 정교회가 버젓이 살아 있는 지역에서는 어쩌면 영화에 대해서 보이콧을 하는 움직임이 벌어졌거나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 중에 "크리스티나"는 심증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인 "펠리시타"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는 "성흔"을 만들기 위해 "베네데타"가 자해를 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고해성사"를 남성 성직자에게 하면서 자신이 직접 "베네데타"가 이마에 자해를 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이 이후에 그 남성 성직자로부터 수도원의 모두가 모여 있는 시간에 공개적으로 다시 이야기를 하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또 했는가를 묻는 장면에서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편일 것이 분명한 "펠리시타"에게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신중하고, 냉정하며, 현실적이고, 세속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사실에 입각한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 "펠리시타"는 직접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이 때문에 거짓 고해성사를 한 셈이 된 "크리스티나"는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형벌을 직접 하게 되며, 수치심에 휩싸인 채로 어느 날 유성이 지나가는 것을 모두가 보고 있는 밤에 수도원 건물의 높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어머니인 "펠리시타"가 달려 올라가서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도 소용없는 상태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이 장면에서 소름 끼치는 부분은 "자신의 확신"에 빠진 "베네데타"가 일말의 가책도 없이 그저 죽어가는 "크리스티나"에게 "원장 수녀"로서 형식적인 기도를 하려고 하는 모습이며, 그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막으며 "베네데타"를 저주하는 "펠리시타"의 오열과 마주하게 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폴 버호벤"은 인간에겐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고, 정의와 불의, 신앙과 불신앙, 사기와 정직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자신이 믿기로 작정한 것을 추구하는 능력"의 우수성만이 인간의 세계에서 확실하게 기능한다라는 매우 회의적이고도 실제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속물 중의 속물"의 이기적이기 그지 없는 투쟁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래지 않아, "펠리시타"는 이 사기극을 교황청에 알리기 위해서 "피렌체"를 향해 떠나고, 그런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네데타"는 "바르톨로메아"와의 유희를 즐기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르톨로메아"는 그런 "베네데타"에게 환멸을 느끼고, 자해를 하면서 성흔을 만들어 출세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까지 죽게 만든 그를 비난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 "베네데타"는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그의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의식 속에서 "예수"의 성흔이 자신에게 나타난 것은 "예수"의 뜻이며, 그것이 초자연적으로 온 것이든 자신이 자해를 해서 벌어진 것이든 그것은 이미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베네데타"가 가진 진실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일부 평론에서는 영화가 끝장면까지 결국 진실의 여부를 밝히지 않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으나, "폴 버호벤"은 이미 하고 싶은 자신이 가진 인간 세계의 진실이자 대중성의 핵심을 꿰뚫은 이야기를 여기쯤에서 다 마무리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이나 스토리는 사실 극적 긴장감을 높이고 완성도 높은 마무리로 영화를 끝내기 위한 사족 인지도 모른다.



"매트릭스 2,3,4"에서 "메로빈지언" 역할을 했던 배우 "랑베르 윌슨"이 "눈쵸" 교황 대사 역할을 맡은 것은 적절함 이상의 기시감 비슷한 것을 가져왔다.


"매트릭스"에서 일종의 절대자인 "네오"와도 같은 역할을 했었다가 구획 중의 일부의 절대자 같은 존재가 되어서 자신의 배우자가 좋아하던 말든 자신의 능력으로 성적인 유희를 추구하는 타락한 절대 권력자로서 그만큼 동기화가 잘될만한 배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펠리시타"가 찾아가 얘기하는 장면에서 "눈쵸"의 옆에서 차를 따르는 동시에 내연녀인 것처럼 등장하는 여배우가 (교황 대사)의 아이를 낳았고, 젖도 나오고 있다고 유세를 하면서 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잠시 나오는데, 권력을 이용해서 하고 싶은 일은 다하고 있는 자로서의 오만함과 독선을 드러내는 것을 그 이상 적합하게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로서도 명확하게 드러내 주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처단하는가 싶을 정도로 타락과 불의의 정점에 올라 있는자가 사기범을 처단하겠다고 앞장 서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권력자에게 자신의 권력에 대해서 누를 끼치는 "사기범"을 찾아 처단하는 것은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증거가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보고된 상황에 맞춰 "베네데타"를 처단하기 위해서 "페샤"로 떠나기로 작정하는 과정에는 교차 확인이나 수사, 탐문, 제대로 된 취조에 대한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페샤"에서 "피렌체"를 오가는 동안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뒤덮었던 "흑사병", 곧, "페스트"가 창궐하여 마차가 달려가는 길가와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방역 대책이나 과학적인 의료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모두가 지은 죄에 대해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책감을 느끼는 이들이 헐벗은 채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며 길을 걸어가는 고행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세 유럽의 무지몽매함과 비참을 지리멸렬하게 그리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폴 버호벤"의 정말로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한 유럽 역사에 대한 직시는 그가 그저 자극적인 것만을 그리고 추구하는 저급한 감독이 아닌 자신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어쩌면 이 시대의 베네데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은 감정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페샤"로 오기 전에 막대한 수도원 권력을 지닌 "베네데타"는 "페샤"에는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예수"의 은총을 받아 "페스트"가 번지고 있지 않고 있으며, "예수"의 뜻이 외부에서 "페샤"로 오는 모든 외부 출입자를 막으라는 것임을 역설하며, "폐샤"는 일치단결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자 한다.


그와 동시에 "베네데타"는 갑자기 쓰러지며 죽음을 맞이하며, 그 이후에 도착한 "교황 대사"일행은 자신의 출입을 막고자 하는 경비병들과 대치하다가 "교황"의 권능을 대리하는 입장임을 설명하고, 이미 "베네데타"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장례 의식에 참여하겠다고 하며 "페샤"에 진입한다.


관 속에 누워 있던 "베네데타"에게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눈에 점액질의 물질을 바르는 순간 "실소"가 나오는 장면이, 갑자기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고 주장하며 그가 일어나는 것이다.


어두운 중세 시대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순간 바보가 되고 사기죄나 내란죄, 공무집행 방해죄 등으로 처벌받았을 것이 그였겠지만, "교황 대사"는 "펠리시타"를 통해서 보고받은 내용을 기정사실화 하는 취조 과정을 진행한다.


둘이 동성애 관계를 맺은 것이 분명한가를 묻는 동안 "바르톨로메아"는 계속 부정하고, "교황 대사"는 동시에 원장 수녀실을 수색해서 "성모상"을 깎아 만든 기구를 찾으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지하실로 취조하기 위해 끌려간 "바르톨로메아" 앞에 여성기를 고문하는 무지막지한 기구를 들이밀며 "교황 사제"가 한 대사는 이 모든 중세 난맥상의 가장 커다란 악이 무엇이었는가를 적절하게 드러낸다.


이 이야기 속의 "악"은 사실 "베네데타"도 "바르톨로메아"도 "펠리시타"도 그 누구도 아니었던 것이다. 신의 사제 역할을 자처하며,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권력과 명예, 돈,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떤 술수나 고문, 살인, 죄악도 마다하지 않았던 가톨릭 남성 권력의 최고층이 자행한 그 모든 죄악이 이 더럽고 음침한 암흑기를 가져왔던 악이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 기구를 눈앞에 보여주며, "그 용감한 잔다르크도 이 기구를 보자마자 자신의 모든 죄를 실토했지"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베네데타"의 사기는 상대적으로 귀엽고도 코믹스러운 애교였던 것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과정에서 "펠리시타"는 피를 토하며 자신의 몸에 "페스트의 증상"이 번지고 있음을 알게 되며, "교황 대사"에 의해서 격리된다. 그 이후 "교황 대사"는 자신의 몸에도 그 증상이 있음을 알게 되지만, 이를 숨긴다.


유일하게 이 고문의 시간 동안 "베네데타"는 괴로워하며 벽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다, "바르톨로메아"를 구하기 위해 "교황 대사"를 찾아가 성적으로 유혹하려 하지만, 이미 "바르톨로메아"는 고문 과정에서 동성애를 했음을 실토했고, "베네데타"를 저주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건진다.



이를 증거로 하여 "베네데타"에게 화형이란 처벌이 확정된 다음, "펠리시타"를 찾아간 "베네데타"는 그동안 대립각을 세우고 살았던 그에게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제안하며, 그때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펠리시타"는 그 제안을 열심히 듣는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는 그 누구라도 막연히 미웠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별 필요 없는 감정이었는지를 대부분 깨닫는다는 것이 내 인생의 여러 경험이었기 때문에 이 장면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실로 느껴졌다. 이제 동업자로서 다시 뭉치게 된 그 두 사람은 마지막의 반전적인 반격을 "교황 대사"에게 가하게 된다.


"화형장"으로 향하는 수레로 다가간 "바르톨로메아"는 자신이 배신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하며, 수레 가까이에 매달리지만, 이미 "예수"라고 자신을 신격화하고 동기화시킨 "베네데타"는 그가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고 이야기하며 호기롭게 화형장을 향해 이동한다.


"화형"이 벌어지는 광장에 이르러 "베네데타"에게 몰려들었던 군중이 "성흔을 가진 이”가 왜 화형을 당해야 하는지 항의하는 웅성거림을 만들어 내자, 위기의식을 느낀 "교황 사제"는 순순히 동성애를 했다는 사실을 군중 앞에서 지금이라도 인정하면 "화형"은 면하게 해 주고 "교살"로 끝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를 받아들인척하던 "베네데타"는 두 손을 모아서 잠시 있다가 다시 양손을 들어 올려 두 손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예수"의 버전으로 남자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보호로 페샤에는 페스트가 번지지 않았으나 외부에서 죽음의 천사가 들어와서 이곳에 페스트가 번질 판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며 대중을 선동한다.


그와 동시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하나 깊이 눌러쓴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펠리시타"였고, 상체의 일부분을 벗어 "페스트"의 증상이 번져 있음을 보여주며, "교황 대사" 일행이 "페스트"를 이곳에 가져왔다고 외친다.


그와 동시에 군중들은 "베네데타"를 서둘러 화형 시키고자 하는 "교황 대사"일행에 대해서 폭동을 일으키며, 군인들을 폭행하고, 화형대에 묶인 "베네데타"의 줄을 끊어낸 "바르톨로메아"는 그 과정에서 깨진 채로 피가 묻은 유리 조각이 "베네데타"의 옷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비규환 속에서 도망가던 "교황 대사"는 따라온 "펠리시타"에게 선물이라며 키스와 포옹을 억지로 받게 되며, 군중에게 들려져 길바닥에 던져졌다가 칼을 든 여자에게 찔려 죽게 된다.


바로 이 장면이 중세 유럽의 종교적 암흑기에 대한 "폴 버호벤" 식의 처절한 복수 씬이었고, 이곳에는 "페미니즘"까지 갈 것도 없이 그가 영화 속에서 내내 이야기해온 "남성적인 수직 체계 서열의 폭력성"이 단절되어야 한다는 반세기에 가까이 전혀 물러섬 없이 그가 그린 주제가 한번 더 반복되는 순간이라고 느꼈다.


“펠리시타”는 그 이후에 바로 불이 붙어 있는 화형대에 몸을 던져 자신을 불살라 버리는데, 어머니로서 딸을 죽게 했다는 자책감과 “페스트” 감염자로서의 출구없는 자괴감이 컸으리란 느낌을 주었다.


가장 시대 상식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인물이었을 수 있었기에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벌거벗은 채로 또 한 번의 사랑을 나눈 이후에 "페샤"밖의 외진 헛간에서 서로 알몸으로 일어난 "베네데타"와 "바르톨로메아"는 각각 다시 페샤의 수도원으로 돌아가겠다와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언쟁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바르톨로메아"는 한번 더 "베네데타"가 자해를 한 증거인 유리조각을 들이밀고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고 공박하지만, "베네데타"는 초지일관 그것이 자신이 자해를 한 것이 아니고 "예수"와 일치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지속하며, "페샤"를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몸이라도 팔아서 살아야 하는 것은 싫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살더라도 사는 것이 다행 아닌가라고 밑바닥의 삶을 경험했던 "바르톨로메아"는 이야기하지만, 삶 전체에서 오직 상향된 삶만을 추구했던 "베네데타"에게 사랑을 위한 도피와 삶의 추락은 죽음보다도 싫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둘은 헤어지게 되고, 영화의 끝에 "페샤"로 돌아가 수도원에 간 "베네데타"는 장수해서 고령에 죽게 되었고, 수도원 내에서 죽는 날까지 항상 바닥에서 식사를 했으며, 그가 살아 있던 동안 "페샤"에는 유럽에 창궐했던 "페스트"가 전혀 번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자막 설명으로 추가되어 있다.



"폴 버호벤"은 이 실화에 있었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해설하지 않고 이해한바 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 해석이나 "베네데타"의 삶에 대한 평가나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해석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열려있는 과제이다.


그 과제를 받는 과정이 내내 흥미로웠고 즐거웠으며, 대중성의 핵심을 꿰뚫어 만들어졌기에 1990년대에 혹 만들어져 봤었든 지금 만들어 보았든 간에 대중의 1인으로서의 내겐 같은 수준의 감동이 있었을 거라고 느낀다.


앞 서도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동안 보지 않고 지나쳤었던 그의 다른 작품들을 당분간 찾아볼 셈이다. 혹 재미없는 게 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마치 "베네데타"처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운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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