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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Apr 25. 2022

<자기 자신을 찾은 “쇼걸”>-저주받은 걸작 찾기

그 시대엔 버려졌지만 다시 해석된 영화

스포일러 없인   없는 글을 썼습니다.


엘리자베스 버클리, 그리고 지나거손...


쇼걸은 상영 연도 1995년, 바로 그해, 최악의 영화로써 평론가들로부터 몰매를 맞았던 작품이다. 폴 버호벤은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욕먹으면서, 동시에 관심을 끄는 방식에 이골이 난 감독처럼 보인다. 그런 인물이 바로 나의 관심을 끈다. 상업영화에다. 담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는 하나(Anti-violence), 그 메시지와는 다른 주변의 것들이 오히려 더 호응받게 만드는 참으로, '쾌락주의'의 화신 같은 감독이다라고 생각한다.


"안티테제"라고 말하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는 것일까?


쇼걸은, 다름 아닌, 한 여자의 자기 정체성 찾기의 여정이다. 시골에서 막 상경한 여자가, 춤에 하나 목숨 걸고 올라와서, 최초에는 싸구려 술집의 스트립 댄서로 일하다가, 좀 더 큰 무대에 등장해서는, 권력과 명예의 암투를 겪는 와중에,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로 가는 길을 선택하고선, 그 길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간다는 스토리이다.


지나 거손의 춤솜씨가 그렇게 상당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버클리의 그 음헐하고, 퇴폐적인 이미지가 건강하고 강한 여자의 이미지로 바뀌어 가는 것이 이 작품의 백미이다.


승부의 세계 속에 거하는 여자의 모습은, 남자들의 폭력적 세계의 모습을 능가해버린다. "여인천하" 능가하는 임팩트로 가득한 여성 세계의 조명이다. 그 영화 안에서 분명히 여성은 성적 상품화가 되어 있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그 상품화에 달짝지근하게 달아올랐던 남자들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게 된다. 사정없이, 자신을 노리개로 삼고,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뭉게 놓고, 자신이 남성적 폭력 세계의 암투에서 개처럼 분투하도록 유도했던 남자들을


잔인하고도 아름답게, 또한 잔혹하게 뭉게 놓는다.

아마도 대다수 남자일 게 분명한 이 영화의 평론가들은 그게 기분 나빴는데도, 영화의 저급성과 음란성을 더 따졌을 것이 분명하다 싶어 진다.


여성분들에게, 또한, 이해심 깊고, 이 미국 문화, 포르노 문화에 찌들어 뭉개진 젊은 남자들에게도 추천하는 작품이다. 두 가지 자극이 함께 한다. 그리고, 그건, 스타쉽 트루퍼스보다는 설득력이 강한 "안티테제"를 선사한다.


춤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춤추는 사람의 바로 그 춤추는 순간의 의도와 욕망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몸짓을 내어놓는 것을 통해서, 바로 타인에게도 있는 그 무엇을 건져내어 보고 느끼고, 그 몸짓의 이입을 체험케 하는 데 있는 것일 수 있다.


춤만큼 감각적이고, 또한 관능적인 면을 가득히 담은 인간의 문화에 대한 보다 수용적이고, 솔직한 시선은, 벗은 몸을 통해서 보다, 그 감각과 관능을 표현하고자 애쓰는 것에 대해 보다 깊은 공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스트립티즈"라는 영화의 시선이 성적 욕망 그 자체의 시선에 앞에 선 유명 여배우, 데미 무어의 몸짓만을 강조하며, 그 안에 있는 인물이 그 여배우를 바라보는 그 관음적이고 충동적인 시선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몰아갔다고 한다면, "쇼걸"은 오히려 "물랑 루주"나 뮤지컬류의 영화와도 같이 바로 춤 자체에 대해서 몰입하는 관객의 시선을 더 원하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춤은, 정확히 배워진 것이 아니다는 설정, 그리고, 그녀의 성격 속에 숨어 있는 묘한 순진함과 때가 금방 타버리는 순수성이라는 캐릭터는 물론, 극화화 되는 장르의 작품들에서는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체험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그녀의 욕망이 맞게 되는 장애물은, 그저 그 춤이라는 대상을 그 자체로 느끼거나 보지 못하고, 그 춤이라는 대상 아래 거하고 있는 상품화된 여성성만을 탐하는 남성의 권력적인 시선이다.


이 시선에 대해서, 엘리자베스가 맞서게 되는 방식은 바로 결국에는 남성적 폭력 그 자체이다. 한계를 맞는 것인가? 여자여...


하지만, 버클리와 그를 재워주고 먹여준 흑인 여자 친구, 그리고 결국에는 그에 의해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는 백전노장, 그리고, 영화 속 세계에서 여성권력의 정점에 달해있었던 지나거손은, 마지막 귀결에 와서는, 서로의 관능과 서로의 아름답고 여성적인 마음씨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 화해한다.


버클리의 정체성은, 레즈비언으로, 여성 그 자체의 모습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향해 날아 돌아간다. 같은 공간으로 돌아가지만,


1. 자신의 사랑이 : 여성 그자체와 춤 그 자체에 있는 것을 깨닫고.


2. 폭력에 의해서 얻는 권력과 인기, 그리고 그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자신을 잃어가는 삶을 살 수는 없다.라는 다짐을


가진 채로인, 처음 시작과는 다른 곳으로 명확히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폴 버호벤 감독이 만든 영화의 문법치고 이것이 더욱 세련되어 보이고, 보다 명확한 메세지의 전달로 보였다는 것은.


그 문을 열고 닫아가는 순간이, 상당히 전형적인 스토리를 다루었음에도, 독창적이고, 그리고, 상업적 성공 그 자체에 대한 자기 자조를 내부에 깔고 있는 구조를 이루면서 하나둘씩 연결되어, 결말을 향해 자연스럽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영화를 레즈비언 영화라고, 또는 여성의 정체성을 찾는 메세지를 담은 영화였다고 말하기를 거부한다. 그냥 몇 마디로 그 안에 남은 메세지 전부를 일소시킨다. 찾을 수 있는 것이 한 두개 정도는 있었음에도, 화려한 오락성 저편에서, 보다 나은 메세지를 던지고 있었음에도...


'흥. 거지같은 영화'...우습지만, 그래도 건져낼 조각 몇 개는 있는 영화였던 것이다.


또한, 상업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어느정도 괄목할만큼의 성과는 가져온 영화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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