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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Nov 03. 2022

<엘비스>-최초의 아이돌을 잠시 살려내다

꽃처럼 산화한 로큰롤의 제왕의 삶과 무대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룻밤 새에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코로나의 긴긴 통제의 시간을 견디어 내던 젊은이들이 이태원으로 모였고 이들이 밀집된 가운데 협소한 골목길에서 밀림과 넘어짐이 일어나면서 적지 않은 10~20대의 꽃다운이라는 표현으로도 이루 다 이야기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길고도 긴 미래를 경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물론 3~40대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의 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나이대다. 앞이 창창한 이들이 숨이 막힌 채로 죽음의 이유도 제대로 모른 체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다.


기사를 읽을수록 마음이 답답해질 뿐이고 이제 자라고 있는 나의 아이에게도 사람이 많이 몰릴만한 곳에 가게 되면 조심하라는 이야길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좀 더 가벼운 톤으로 할 수 없는 시대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 같다.


언제 누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안전한 나라라고 했었던가? 그건 불과 한주 전에 나와 여러 사람이 공감하며 했던 이야기였다. 단 며칠 만에 입 속으로 다시 쓸어 담고 싶은 말이 되었지만.



그 밤에 이태원의 색다르고 약간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젊은, 최소한 나보다는 젊은, 그들이 느꼈을 해방감과 들뜬 분위기, 행복감은 이런 참사가 벌어지기 직전까지는 그들의 인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한 순간이었을 거라고 상상해본다.


"왜 그런 곳에 가서 바보같이 죽음을 맞이했는가?" 같은 냉정한 글귀들이 사건을 다룬 기사 밑에 무신경하게 붙어 있어서 읽는 동안 참으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것은 싹 말라버린, 껍질만 사람일 뿐인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누가 죽던지 그들은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심지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것 같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싹 말라붙게 만들었을까?


한국 영화 속 신물 나는 신파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드라이함 정도를 떠나서 복어나 오징어처럼 말라붙어서 비비 꼬인 그들의 내부에는 과연 1%의 수분이라도 남아 있기는 한 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이 참사에 대해서 비극이라고 느끼고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그런 느낌 하나 겪지 않는 이가 적지 않게 이 사회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충분히 괴로웠고, 적지 않은 그런 이들과 더불어 안전하지 않은 이곳에 정체를 모른 체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험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깨닫는다.


이태원의 좁은 골목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동정심과 연민을 잃은 채 냉정하고 차갑게 말라버린 사람이 이 사회에 엄청나게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도덕적인 사회의 비도덕적인 개인", "비도덕적인 사회의 도덕적인 개인" 같은 문구가 있는 것처럼 한 사회의 성격은 그 개개인의 성품이 결국에는 결정짓는 것일 텐데, "옳고 그름을 가리자는 정의나 도덕 문제를 따지는 사람"이 훨씬 더 소수가 되어가는 사회라면 위험은 그저 가만히만 있어도 서로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삼국지"의 현실주의자이자 철저하게 이성적이고도 냉혹한 전략가 "조조"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할 때 참고한 우아한 냉혹함을 가진 "체사레 보르자"같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죽던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던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올바른 정의"의 "기준점"을 "높은 수준의 효율성"과 "고수익" 정도의 범위에만 두는 이들이 이 고도화된 사회 속에서는 강자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대로 깨우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들은 사회가 어설프게나마 도덕과 정의를 외칠 때는 목소리를 낮추고 숨어 있다가 그런 것 다 필요 없이 오로지 권력과 명예, 돈만이 말을 하게 해 준다는 분위기로 덮인 공간이 있는 곳에서는 목청을 높일 것이다.  


그들은 언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것이다. 그 위험 때문에 다치거나 죽은 자들을 비웃을 것이고 그런 위험 상황에 처한 어리석음만을 탓할 것이다. 자신은 그런 위험이 닥칠 일이 전혀 없도록 항상 운 좋고 이성적이며 지혜롭다는 절대적인 신념을 가진 권력자처럼.



공연이나 이벤트에 가서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경험하고 다시 그 회복된 에너지로 힘차게 일상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갖는 것은 그것이 꼭 젊음에만 있는 특권은 아니고 인간인 이상 거의 대부분에게 필요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핼러윈 축제"라는 이식된 문화에 대한 왈가왈부를 떠나서 그런 자발적인 축제 분위기를 만나는 기회를 때때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사회가 제공하는 순기능이다. 그곳에 깃들은 상업성 등의 이야기를 잠시 떠나서.


그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안전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이미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서 그 어떤 사회라고 해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살아가고자 했던 이들이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일단은 비극이다. 평온하고 안전했어야 했을 일상에 벌어진 예상치 못한 말 그대로 참사인 것이다.


이런 스트레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찾아본 영화가 "엘비스"였다는 것은 우연찮게도 이 비극적인 상황에 어느 정도 연결되는 일이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나름 내게는 의미심장했다.



화려한 공연이 이어지는 과정에 이미 예견되어 있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42세에 요절)과도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 더 큰 비극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교차했기 때문이다.


근엄한 청교도 정신과 흑인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만연했던 미국의 과거, 1935년생인 그는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유년기를 시작했다. 그는 "흑인 음악"인 "가스펠" 등을 "백인 음악"인 "컨트리"와 결합한 그 시대에는 새롭고도 독특하기 그지없는 그만의 스타일을 열정적으로 구사했다.


공연 영상에서도 생생하게 그려지지만 그를 연기한 "오스틴 버틀러"나 실제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 장면들은 하나 빠짐없이 그 시대에 가서 그 앞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열과 성의를 다해서 땀을 뻘뻘 흘리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과 더불어 생생한 현실감을 전달한다.


죽음 직전 수주 전의 공연에서조차 "Unchained Melody"를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많은 각색이 있고, 실제와는 다른 가공된 극화가 군데군데 접붙이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비스"라는 존재의 본질 같은 것을 잘 살려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혼한 아내 "프리실라 프레슬리"와 딸인 "리사 프레슬리"도 이 영화에 대해서 극찬을 했다고 하니, 그만큼 이 영화는 그의 사후(1977년)로부터 45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열광적인 "엘비스"에 대한 반응을 제대로 이 시대로 가져왔던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과 비견될만한 작품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또 하나의 걸작이다. “프레디 머큐리”의 외모부터 싱크로율 높게 만들고자 했고 거의 같은 수준의 공연 영상을 재현해내려 했던 그 영화와 비교해서 그런 정도의 ”엘비스“와 흡사한 외모를 지니고 있진 않지만


이 작품의 주연 배우가 제대로 드러낸 것은 흑인 음악에 마치 신들린 듯이 감응하면서 열정적으로 거의 일체화된 것처럼 살려낸 “엘비스”가 수많은 이들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이끌어낸 내부의 열정이다. 그의 젊음을 불태우게 만들었던 내적인 힘을 영화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출처: BuzzFeed

"엘비스"의 무명 시절에 그를 발견한 뒤에 픽업하고 자신의 유랑 극단의 공연 무대에 출연시키면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불합리한 계약을 진행했던, 신분을 위조하고 “대령”을 사칭하고 다닌 탐욕스러운 사기꾼이자 프로모터의 역할을 “톰 행크스”가 제대로 연기해냈다. 덕지덕지 살이 찐 모습은 분장이었겠지만, 그 분장에 걸맞은 행동과 말을 하는 그는 또 한 번 제대로 된 연기 변신을 해냈다.


그가 연기하지 않았다면 “앨비스”를 뜨도록 만드는 수완과 더불어 막대한 이익을 위해 약과 절제 없는 삶 속에 빠뜨리고 “자신답게 살 수 없도록 하는 동시에 더 큰 세계를 향해 나가지 못하게 만든 악행”마저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 그가 수많은 공연을 소화하기 위해 수없이 먹었던 "약"과 "주사" 팬들의 사랑에 중독되어 일삼았던 "외도", 죽기 전에 관리하지 않았던 비만에 가깝게 순식간에 늘어났던 체중과 살 때문에 죽어가는 모습도 설득력 있게 잘 그려진다.


이 영화의 독특한 부분은 후반부에 가서는 연기를 하던 배우가 아닌 실제 "엘비스"가 공연 중에 부르는 노래와 퍼포먼스가 등장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럼으로써 가공의 인물처럼 그려지던 "엘비스"와 실제의 그가 제대로 오버랩되게끔 만들고 현실성을 강화하고 있다.

출처 : History vs. Hollywood

그의 이른 죽음이 마지막에 나오게 될 때쯤, 나의 아버지 세대 정도에서나 열광했었을 그에게 결국에는 인간적으로 매료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가 대단한 가창과 쇼 퍼포먼스 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누구나 스치고 지나왔거나 앞으로 지나가게 될 왕성한 에너지로 가득 찬 젊음이 약동하는 시기를 잘 드러내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란 이유가 더 컸다.


저 멀리에 있는 완전히 나와 다른 스타라기보다는 그의 젊음과 나의 젊음이 동기화되고 서로 교감하는 의식을 보는 내내 치렀기 때문이란 표현이 더 맞겠다. 영화의 테크닉이나 상징성, 카메라 워크 같은 요소보다 한 인간의 젊은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서 이해한 것을 다시 관객 또는 시청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며 가슴속이 뜨거웠던 젊음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그 전날 자신의 젊음을 조금이라도 태워보려 한 장소를 찾아온 수많은 젊은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심지어 "엘비스"가 죽어 사라지는 끝의 영상까지 그들과 겹치는 것만 같았다. "엘비스"에 대한 애도는 전이가 되는 것처럼 남녀 구분없이 그들에 대한 애도로 번져갔다. 끝난 뒤 올라가는 타이틀 롤을 보면서.



안전불감증과 생명의 소중함과 더 많은 사람의 행복을 소수의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을 때마다 우리 주변에서 "이태원 참사"와 유사한 일은 언제라도 또 벌어질 것 같다.


팝스타의 이른 죽음은 그런 인기라는 명예와 부를 누리다가 불꽃같은 삶을 태우고 일찍 사라진 전설과도 같은 휘광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더 애달프게 느껴지지만, 이태원에 모였던 젊은이들이 가졌던 미래의 가능성과 터질 것 같았던 "흥과 끼"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며 교훈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으며 성장하는 것은 그렇게까지나 드라마틱하지 않으니 그들에 대한 애도감은 더 줄어들고 작은 것이 되어야만 할까?


그 수많은 젊은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장소에 우연히도 그 시간에 있었을 뿐이다. 젊은 나였을 수도 있고 또한 젊은 당신일 수도 있었다. "엘비스"같이 불꽃같은 삶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젊은이들이 죽은 것인데. 그것이 아무런 동정이나 연민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되는 일일까?


그들 하나하나의 스토리만 다시 상상력을 기울여 돌아보자면 수많은 엘비스와 같은 인생의 스토리를 이제 막 꽃 피우거나 정리해가는 이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의 피해도 컸기에 그나마 그들의 죽음은 전 세계적인 언론을 통해 다행히도 좀 더 빨리 조명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권력을 가진 이들이 군중 밀집 현장의 안전을 돌보지 않았던 것을 며칠이 지난 뒤에 사과하는 시늉이나마 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해외 언론이 우리의 "안전 관리"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은 그저 멍청한 이들로 모욕을 당했을 것만 같고 수많은 일상적인 죽음으로 덮어가려는 경우에 맞지 않는 언론 기사와 책임 소재를 문 닫은 가게 몇 개와 벽 중축을 한 호텔, 오르막 윗길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리려 했다는 일련의 사람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몰아갔을 것 같다.


마치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폭력 종교 집단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방치하다가 이 집단이 독가스를 지하철에 살포한 뒤에야 우왕좌왕 독가스를 들이마신 피해자에게 스포트 라이트를 들이대고 그제야 뒤늦게 교주를 잡아 사형 선고를 내리고선 일본 국민의 안전을 등한시해왔던 정부의 허술함을 은폐하려 했었고, 핵원전의 안전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다가 쓰나미가 들이닥친 뒤에 방사능 유출로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건강을 잃은 뒤에도 제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얼마 전의 일본 정부처럼.


그런데 그런 일본조차도 이번의 자국의 “핼러윈 축제” 때 군중의 도로 이동을 안전을 위해서 통제했다고 한다. 앞 선 재난 속에서 무언가 배웠던 국가와 배웠던 것을 까먹은 국가의 엇갈림이 잠시 보이는 것 같다.


불과 1년여 전에 무대책과 은폐에 가까운 코로나 감염 통제로 수많은 확진자의 죽음을 방치하다시피 했던 이웃 나라가 갑자기 좀 더 안전해 보이는 것이 낯선 이유다. 도대체 우리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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