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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Dec 11. 2022

<드라이브 마이 카>-상호 이해를 위한 자아성찰 이야기

상대방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커닝이라도 하듯이 남의 글을 읽는 것은 지양하려고 한다. 왜냐면 남의 글은 어찌 되었든 남의 경험이 만들어낸 문장일 뿐 내 생각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를 이해한 방식은 그가 겪어온 삶 자체와 몸에 배어 있는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쓰기 전에 몸에 없던 것을 찾아 군데군데 덧붙이는 것은 왠지 사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아무리 더 올바르고 좋고 잘 쓰였다고 느껴지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먼저 보고 나서 내가 본 영화의 평을 쓰게 된다면 그 순간 내 삶과 몸에 배어 있는 역사는 일순간 무시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본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제대로 잘 갖추기 전 상태의 몸으로부터 먼저 나만의 글을 적어야 한다가 올바른 영화 감상문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수준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안 쓸 거면 인공지능에게 글쓰기를 지금부터라도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주기적인 업데이트도 상시 가능하고.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본 영화에 대해서 이해한 내용에 대한 미심쩍은 감정이 생기거나 배우의 이름, 감독의 필모그래피 등등을 내가 쓰는 글에 넣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다 보면 다른 글을 스스럼없이 찾아보게 된다.


그렇게 본 내용을 토대로 이런저런 짜깁기가 어느 정도 이뤄지고 나면 나쁜 경우에는 내가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의견이라는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이 이 넷에 연결되어 어디서든 알지 못했던 정보를 상당수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만큼은 그렇게 인터넷 서핑을 열심히 하면서 찾아낸 정보를 토대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상대적으로 크게 일어나게 만들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그만큼 영화 자체를 열심히 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잘 기억나지 않아도 한 번쯤은 읽었던 단편인 "드라이브 마이 카"가 이 영화의 원작이며, 한국어(와 한국어 수어)가 20% 정도는 대사로 나오는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했다면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당신 본연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글을 쓰거나 말을 하게끔 이끌어주는 중력을 발휘한다.

출처 : 나무위키

배역상으로 재미있는 부분은 2010년 베트남계 프랑스 영화감독인 "쩐아인홍"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인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로 만든 영화에서 주인공인 젊은 "와타나베"를 위로하는 중년의 "레이코" 여사 역을 맡았던 "키리시마 레이카"가 이 작품에서는 남편인 "가후쿠 유스케"를 깊이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의문의 심리"를 가진 "가후쿠 오토" 역으로 나와서 "미스테리어스함과 더불은 중년의 관능미"를 12년 여의 세월을 건너뛰어서도 보여줬다는 것이다.  


좌: 상실의 시대 , 우: 드라이브 마이 카




짧은 단편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자신의 차를 몰게 된 “”여자 운전 기사“와 이야기를 하게된 한 남자가 자신과 죽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중에 죽기 전까지 자신의 아내가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여자 운전 기사"에게 늘어놓는 것이 그 단편의 내용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었지만, 영화는 각색을 하면서 보다 풍부한 내용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글이 조금만 길어도 도망갈 것이 뻔한 여러분에게 간단히 이 영화의 주제를 축약해서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이것만 보고 가셔도 어디 가서 영화를 다 본 것처럼 이야기해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상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상대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 "연애 소설"의 성격이 강한 작품에서는 위의 주제가 수없이 되풀이되고 변주된다.


이제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외치고 그의 독자들이 공감하기 전까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난감함과 두려움, 막막함을 그만큼 제대로 그려낸 작가는 드물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렇다면 그 주제를 충실히 보여주고 말끔하게 마무리를 한 작품이라고 설명을 하고 끝을 맺으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원작인 단편 소설에서 상당수 일부러 결락되도록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다 개연성 있게 다듬어 설득력 있는 현실의 스토리로 만들었고, 존재감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던 "여자 운전 기사"도 풍부한 자신만의 스토리를 가진 존재로 질감이 느껴지도록 그려냈다. 그럼으로써 원작 이상의 존재가 된 작품이다.


소설과는 달리 연극제의 연출가로 초청된 주인공 “가후쿠”에게 주최 측이 꼭 자신들이 제공하는 운전기사가 연출가의 차량을 운전해야만 한다고 강권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이 부분이 자연스럽게 필연성을 더하게 되었다.


이에 (아내와 자신의 추억이 오롯이 담긴) 차를 꼭 자신이 몰아야만 한다고 저항하지만 이전 행사에서 행사 기간 중에 운전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이가 있었기 때문에 꼭 운전을 기사에게 맡겨야만 한다고 밀어붙이자 운전 실력을 본 뒤에 결정하겠다고 한 뒤에 “중력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기가 막히게 운전을 잘하는“, ”와타리 미사키“에게 운전을 맡기게 되고, 그렇게 운전을 잘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도 듣게 된다. 치밀하고도 자연스러운 설정이었다.


각색을 이렇게까지 한 내용을 "하루키"에게 전했던 바 거의 아무런 이의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그 단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원작 자체를 뛰어넘는 각색 포인트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이 영화화되기까지 그가 깐깐하게 각본을 따지며 시간을 보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물론 이 이전에 "이창동"감독의 "버닝"이 "헛간을 태우다"라는 그의 단편을 토대로 확장되어 만들어졌던 일례가 있기는 하다.


거기에 소통의 단절이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는 "한국"과 "일본" 간의 관계를 영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무게감 있게 다룸으로써 보다 현실에 대한 질문을 제대로 던지고 있기 때문에 야심 또한 큰 작품이기도 하다.


"볼보"의 아주 오래전 모델인 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신의 슬프고 충격적인 과거를 다시 복기하면서 자신의 재생뿐만 아니라 연극제의 주최 측에서 운전 사고 방지를 위해 제공한 "여자 기사"와의 소통을 통한 재생, 다국적의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채호프"의 작품으로 만든 연극에 참여한 배우와의 이해를 넓혀가는 동안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 이를 다국어 자막으로 띄우며 진행하는 연극의 의미는 영화가 갖고 있는 주제와 일관성 있게 일치한다.


충격적인 치정 스토리가 나오고는 있으나 부부간에 태어났던 아이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게 되어 온, 부부간에 커다란 간극을 가지게 된 충격적인 가정사나 부부 관계 중에 아내의 드라마 각본을 만들어 내는 영감이 나오고 이를 통해서 드라마 각본을 서로 만들어 내는 장면이 다른 관계에서도 진행되었으리란 상황이 나오면서 나름의 필연성을 보충했다.


"여자 기사"인 "와타리 미사키"의 입을 빌어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수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에요"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단편에서의 모자란 부분을 적극적으로 보충한 것도 어색하지 않게 성공했다.


"미우라 토코"가 연기한 "와타리 미사키" 여자 기사의 스토리는 좀 더 그가 "가후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능동적으로 반응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주기에 영화가 원작 소설을 뛰어넘었다는 느낌을 배가해준다. 장편 소설이 아니었기에 이것이 가능해진 것이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상실의 시대"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둘러싼 모험", "댄스 댄스 댄스", "태양의 서쪽, 국경의 남쪽", "태엽 감는 새", "해변의 카프카", "1Q84",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기사단장 죽이기" 등의 "하루키"의 장편 소설이 잔뜩 쌓여 있지만 "상실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아직 제대로 만들어져서 봐야겠다 싶은 정도 수준의 영화는 개봉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라면 원작자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도 충분히 더 수준이 높은 작품을 잘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생긴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조금이라도 긴 글이라면 당연히라도 읽지 않는 나를 포함한 동시대인들에게 "하루키" 작품의 정수를 전달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생긴다. 그의 팬으로서 이런 기대는 당연히 생길만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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