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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Sep 22. 2015

<1Q84>-3권 감상 (2)

나머지 페이지를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다.

선구의 교주 이미지가 생생하게 담긴 삽화를 찾아냈다, 그는 혹시 덴고와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었을까?

3권은 완전하게
1.2권의 스토리에
병합된 소설로
탈바꿈하게 된다


다 읽고 나니 이제 더 읽을만한 재미있는 소설이 더 나올 수 있을까라는 우려 아닌 우려와 더불어 일종의 상실감이 남는다.


결말은 이미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결말 같지 않은 열린 결말.


다음 편을 기대하세요라는 말조차 필요 없다.

달이 하나만 있는 세계를 향해 가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선구에 대한 이야기가 400여 페이지 이후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오마메, 덴고, 우시카와 그리고 다마루, 곁들여 선구의 스킨 헤드와 포니테일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지면서


드디어 이 3권은 완전하게 1.2권의 스토리에 병합된 소설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전히 논리적인 부분을 뛰어넘는 아오마메의 처녀 수태는 그대로이고,


후카에리가 천기누설처럼 퍼뜨린 '공기 번데기' 이야기는 여러 번 반복된다.


(420페이지까지의 이야기는 https://brunch.co.kr/@rpyatoo/45에 나온다, 여기까지 보았을 때의 선입견이 이후 300여 페이지를 읽으면서 완전히 깨지기 때문에 상당히 장문을 썼음에도 소설을 제대로 설명 못했다).


이러한 논리적인 연결이나 리얼리즘을 벗어난 스토리가 다시 우리의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이유 중 하나는 두 남녀의 끝 간데없는 서로에 대한 갈구였으며,

아오마메가 실사판 배역을 정한다면 이런 여배우가 맡게 되지 않을까?

이 갈구가 매우 육체적이고도 감정적이고 대단히 강렬한 것이 이 소설이 현실의 세계와 연결고리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게 만든 장치 같았다.

둘의 관계는 매우 복합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럼에도 현실감이 생생하다

물론, '사랑'이란, 그것도 결정화되어 남는 아주 순수한 감정으로서의 '사랑'이란 문학에서 언제든지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보통 이러한 사랑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문학이나 소설 속 내용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지곤 하는데

1Q84에서는 흐드러진 육욕의 향연과 더불어 오히려 현실적인 이야기로 느껴지게끔 만드는 것이 여타 소설류와 하루키 소설류가 다른 작법 중에 하나인  듯하다.


서로에 대한 20여 년을 건너뛴 감정이 다시 불붙고 그것은 마치 서로가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서로에 대한 육체적인 갈구가 해소되는 부분은 여간한 야설이나 야동 못지않은 매우 직설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예전에 읽었던 20대가 20대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라는 이유로 상을 받은 소설을 평한 20대 평론가의 글을 읽어보면


군대에 갇혀있는 군인들이 야동 대신 읽는 책으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이 책이 논술 참고 도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스토리를 제하고서 하루키가 남녀 관계를 다루는 방법은 매우 야동스럽다는데 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야동과 다른 점은 이 장면에 이르기 전까지의 스토리가 매우 합당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맥락에 어긋나게 시도되는 것 같아도 다 이유가 따르고 적절함이 넘칠 정도의 개연성이 만들어지니까......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다시피 이것은 하루키 스타일의 작법이다.


현실 너머로 날던 새가 잠시 지상으로 떨어져 걷는 순간이라고 할만하다.


덴고의 친부가 혹 이 선구의 교주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이미 덴고와 아오마메는 후카에리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성적인 교합을 이루어낸 상황이다.


아오마메의 내부에는 덴고의 아이가 자라고 있고 이 덴고의 아이는 마치 이미 아오마메에게 (자신이 바라던) 죽음을 맞이한 선구의 교주의 피와 무관하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


덴고의 친부가 혹 이 선구의 교주가 아닐까라는 의혹을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스토리는 어떻게 되든 완결성이 있는 결말을 향해 가주어야만 한다.


우시카와는 꽤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그리고 이 죽음의 방법이 독자들 중 누군가에 의해서 도용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간단하고 매우 치밀한 방법으로 그려졌다.

이전에 보았던 영화 '데이비드 게일'에서 데이비드 게일이 사형제도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캠코더에 나와서 여자(이 여자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자신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상태에서)를 죽이는 방법으로 나왔던


비닐봉지를 얼굴에 씌우고 공기를 막아버리는 내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집요하게 아오마메를 감시하던 그는 어이없는 최후를 맞았다

"바닷속을 여행한다"라는 표현을 단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자층은 한국에서는 18세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였다(물론, 이 책은 성적인 표현의 강도 측면에서, 이른바 한국의 청소년 관람가 등급을 이미 한참을 지나쳤다).



4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암시를
강력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4권이 나오지 않는 것이 3권을 읽고 나니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1.2권을 지은 뒤에 어물쩍 3권을 쓴 게 아니냐라는 비판이 무색해질 정도가 되어버리고 만다.


2편 이후에 추가적으로 더 스토리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쩌면 과잉이 될 정도로 나열하고 4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암시를 강력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에 하루키는 다시 한번 3권을 어물쩡 써서 남긴 일에 대해서 자조하는 또는  자기 합리화하는 듯한 이야기를 한 부분 남긴다.


이런 부분은 하루키가 농담도 좋아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 너무너무 진지한 작가일 거라고 '이상화'하거나 '영웅화'시킨 사람들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되지도 않는다.


1. 1-2권의 어디쯤에서 다마루는 아오마메에게 아주 유명한 작가의 소설론을 하나 설명한다.


2. "소설 속에 나온 모든 것들은 결국 그 소설 속에서 써져야만 한다." 이를테면 못이 한번 나왔다면 주인공이 그 못에 찔려 죽기라도 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매우 엄격한 소설 작법 이론이라 할 수 있으며, 아오마메가 다마루로부터 권총 한 자루를 받는 순간 그 총이 결국에는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암시를 남겨준다.


이 작법 이론에 충실히 따르기로 한 작가가 하루키였다면 아오마메든 누가 되든지 이 소설 속에서 총에 맞거나, 총을 사용하거나 했어야만 한다.


3. 2편에서 사용되지 않은 총을 갖고 아오마메는 덴고와 재회해서 달이 1개뿐인 세계로 가는 비상구를 향해 가게 되는데,


이 와중에 앞서 설명되었던 소설 작법은 아주 직설적으로 부정된다.


소설 작법도 변화하기 때문에 꼭 그런 작법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는 부연이 아주 멋들어지게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하루키가 소설 속에 꼭 써넣어야 했을 부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키는 다만 유쾌하게 독자들에게 농지거리를 걸고 있는 것이다.


"아오마메가 죽지 않고 덴고와 재회하는 3권의 결말은 2권만 봤을 때 좀 웃기지만 그래도 이해할 만하지 않아?"라고 애교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하루키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론, 매우 진지한 독자분들은 이런 부분이 자세히 보이지도 않으며 이 부분이 소설의 핵심을 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킬러 중에 가장
고상한 모습이었다


다마루라는 인물도 과묵함을 벗어던지고 우시카와와 재기에 넘치는 대화를 나누기까지 한다.

나름 지적인 이야기를 우시카와를 향해 던지는 다마루의 모습은 이 직전까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칼 융이 자기의 집을 자신 스스로 지었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차갑던지 차갑지 않던지 신은 여기에 있다'라는 말을 집을 만드느라 쌓은 벽돌에 일일이 새겨 넣었다는 말을 하고


모호한 암시를 남긴 뒤에 그대로 우시카와의 머리에 비닐을 씌우고 목에 공기를 막는 고무줄을 감는 모습은


역대 극화 속에 나타난 그 모든 킬러 중에 가장 고상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 소설이 하루키 내부에 있는
인간성의 여러 측면들을
샅샅이 분해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이 소설이 하루키 내부에 있는 인간성의 여러 측면 들을 샅샅이 분해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단단히 분해하고 자기의 욕망과 독자의 욕망과의 공통분모를 찾아서 이를 형상화해주는 이 기술이 너무도 경이로운 이유는


그 부분 부분들이 하루키와 더불어 너무나도 오래 같이 자라 온 부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여러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감을 유지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하루키의 종래의 소설들과 크게 다름없이


시스템화 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 또는 종교) 조직 안의 인간들 또는 영물(양이라든가 리틀피플 같은)과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지만 서로 간의 교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간의 사투이다.


결국 하루키와 연대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회 조직에 철저히 매몰되고 그 논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여러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감을 유지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써 내려가던 그때만 해도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회가 결국에는 어느 정도 탈 사회화되어 있는 사람들의 창조력을 원하는 사회로 바뀌어 가기에 이제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늘어나고 있다.


 하루키의 책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의 소설이  변화하였다기보다는 세상  하루키 원하고 바라는 대로 (실은 원했던지 원치 않았던지) 변해왔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도 출판계라는 조직에 어느 정도 사회화 과정을 겪고 나름대로 안착해버린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그의 주제는 탈 사회화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이 주는 자유라는 공기를 마시고 숨 쉬는 듯한 중독감을 맛보는 게 아닐까?


우리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바로 이
인간적인 우리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하루키처럼 국제적인 작가가 되어 현시대에 어깨를 나란히 했을만한 소설가로 '무진기행'을 쓴 김승옥 씨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쓴 이문열 씨를 꼽고 있다.


그러나 두 작가가 하루키와는 달리 범국제적인 소설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이러하다.


1. 김승옥(70)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무자비한 진압을 한 정권에 반대하여 절필을 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에 오랫동안 말과 글을 잃고 계신 상황이다.

2016.05.02

이분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 말과 글을 잃으신 지 오래되셨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6551


2. 이문열(62)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월북을 했기 때문에 오는 출신 성분에 대한 세간의 비난에 의해서

일류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극우에 가까운 발언을 남발하며 우파 정당의 인물로 정치계 쪽의 사회화 과정에 깊이 접어드시면서


더 이상은 눈부신 창작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치적인 변론의 힘을 보여주는 쪽으로 선회하신 것 같다.


결과적으로 지나친 사회화 과정은 창작력의 쇠퇴를 낳는다고 본다.


심지어는 예술을 신봉하는 분위기의 문단에 사회화된 작가들은 그 해당 문단에서 적극 통용되는 작품들만을 남기다 사라져 가곤 한다.


하루키(61)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문단에 매장당한 작가도 아니고, 그가 좋아하는 미국 문단에 매장된 작가도 아니며,


그가 교수로 가있던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생활에도 매장당하지 않았기에 아직 왕성하고


여러 곳에 미치는 바가 많은 작품들을 써내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이러한 탈 사회적 인격은(범죄자적인 인격과는 다른 의미라고 이야기하고 싶으나, 사실 범죄자와 소설가가 다른 점은 일간지에 그들을 다룬 사건이 나올 뉴스가 사회적으로 비교적 긍정적이냐 아니면 부정적이냐의  차이뿐일 수 있다)


'공기 번데기'라는 작품을 쓴 후카에리가 덴고에게 대필을 요청해서 출판한 뒤에 문학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과정에서,


고마쓰가 일본 문단을 비웃고 조소하는 내용에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바로 당신의  시스템화 되지 않고 조직화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감성과 만나는 작품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바로 이 인간적인 우리의 어떤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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