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화가가 의미를 부여하고 부여당하고 사라지기까지의 여정을 담다
2가지 방향으로 감상하도록 만든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달리를 다룬 이 작품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제대로 "달리의 작품"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화면에는 띄워지지 않았다. 그것이 다 본 뒤에 감상문을 쓸 때쯤에야 이 작품의 캐나다 여류 감독인 "메리 헤런"이 관객과 시청자로 하여금 2가지 방향으로 감상하도록 만든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어졌다.
첫 번째는 이미 "달리의 팬"이야 그의 작품을 다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미술관 관람 등의 보다 제대로 된 방식으로 봤을 "원화"나 "복사된 작품"을 작품 속에서 다시 촬영된 형태로 보기보단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스토리와 연결해서 떠올리기를 원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으로써 그 기억이 재생되고 강화된다.
두 번째는 "달리"를 잘 모르거나 어설피 듣거나 보아서 알고 있는 사람에게 나름의 깊이가 있고 독창성이 넘실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서 잠시 보여준 것만으론 제대로 "달리"가 살아서 활동을 했던 시기에 주고자 했던 느낌을 줄 가능성이 많이 떨어진다. AI로 기상천외한 그래픽도 만드는 이 시대엔 줄 신비감도 이젠 없다. 작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음으로써 이 시대에도 각광받는 비주얼 예술가의 위상에 맞는 작품을 상상하게 만든다.
팝계의 스타나 음악사의 위대한 작곡자 등을 다룬 영화를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선 그들이 부르고 연주하고 공연한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필수적이겠지만, "달리"의 보다 당시의 상업적인 대중성과도 잘 결합되었던 대중문화적인 가치까지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선 "작품을 보여 주는 것보다 주변을 이야기하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이다.
"달리"에 대해서 떠오르는 기억대로 이야기하다 보면 초중고대학교 때 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내용이 여러 과목에서 그의 이름과 더불어 나왔던 "기억의 지속"이란 그림이 등장한다. 미술 아닌 과목에서도 그의 이름이 그림과 같이 언급되는 것은 신기했다. 철학, 세계사, 디자인, 마케팅, 홍보, 광고, 영화 등에서 나왔다.
지금에야 더 노골적인 것이 너무 많아 튈만한 것이 되긴 어렵겠지만 그가 보여준 그만의 에로티시즘이라고 불릴만한 "초현실주의"와 결합된 성적인 그림과 사진, 포르노 그래피에 준할만한 영상 등이 그에 의해 만들어지고 촬영되고 연출되었다. 끝을 얇게 꼬아서 양쪽으로 올린 "변태스러움"을 상징하는 수염도 독창적이다.
이런 이미지를 담은 작품만을 떠올려서야 "달리랜드"를 제대로 감상하기는 어렵다. 이미 이 시대까지 오면서 수없이 만들어진 말초적인 자극을 끊임없이 제공하는 수없이 많은 비주얼과 짧은 동영상과 그래픽 파일로 매분 매초 길들여진 팝콘이 되어버린 우리의 뇌에게 "달리"는 더 이상 충격적이거나 별나지 않다.
그의 실제와 똑같은 배우가 필요하기보다는 그란 존재의 본질을 담으면서 둔중하고도 실제의 그가 이 시대에의 대중에게 전달할만한 실제 살았던 그의 이미지를 제대로 가져온 그럴듯한 존재감을 극 내내 유지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벤 킹슬리"라고 생각하고 캐스팅한 것은 꽤 성공적으로 보였다.
이 작품을 "달리"가 이 시대에 와서는 잃어버린 독창적이고도 별난 괴짜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관객에겐 그가 누구였는지를 찾아보게 만드는 효과를 낳고, 조금이라도 알고 기억하는 관객에겐 그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는 동시에 잘 알지 못했던 "예술 활동"의 뒤에선 취약하고도 미성숙했던 그를 알게 되는 기회를 준다.
나는 "잘알못"과 "잘알" 중에 어느 위치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일까? 솔직하게 우선 떠올려볼 필요가 있었다. 양적으로 "잘알못" 쪽에 가까운 것은 분명했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실제의 인물과 비교해서 제대로 다뤘다 못 다뤘다 같은 내용으로 비평할 선입견 같은 게 사라졌다. (찔러 보기 과제 1. 선입견 청소 끝)
"달리"의 시종처럼 충성을
다하는 이가 된 이야기를 그려냈다
"달리"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된 것은 이 영화가 끝난 뒤에 찾아본 여러 웹상의 자료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잘 몰랐으면서도 마치 뭔가 좀 아는 척해왔던 "허세"의 역사의 한 귀퉁이가 속 시원하게 무너졌다. 그럼으로써 봤던 영화를 다시 기억 속애서 되돌아보고 할 말이 생겨났다. 그것이 찔러볼 수 있는 영역이다.
이 작품은 가공의 인물인 것으로 추정되는 "제임스(크리스토퍼 브리니)"가 미술품 갤러리와 관련된 회사에서 일하다 "달리와 갈라"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달리의 세계"속에 들어가서 지낸 수주 동안 매혹 당하여 "달리"의 시종처럼 충성을 다하는 이가 된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에 대해서 찔러보기만 하기로 했다.
* 달리 랜드, 찔러 보기
* 달리 랜드, 찔러 보기
"달리"를 "유럽 문화"영역의 측면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달리"는 양성애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에게 매료된 적지 않은 이는 그의 이 양성적인 기질로부터 뻗어 나온 작품에 매력을 깊이 느꼈는지도 모른다. 같은 코드라고 해야 할까? 그런 관점에서 작중의 현실 속의 "달리랜드"로 진입하는 "달리와 갈라"를 제외한 제삼자인 "제임스"는 중성적인 생김새를 지닌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이고, "몽상가들"이란 예전의 영화 속의 "매튜"란 중성적인 인물을 떠올리게 했다.
눈을 가리고 자신 앞의 유명인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답변을 토대로 누구인지를 알아맞히는 미국의 오래전 퀴즈 프로그램 화면에 나오는 유명인이 최초에는 실제의 "달리"의 얼굴이었다가 "벤 킹슬리"가 연기한 "달리"로 변화할 때 이 양쪽에 동일하게 매혹당한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하며 "제임스"가 등장했다. 영리하게 이 지점에서 실제와 가상을 중첩했고, 그에게 매료된 젊은 미남자의 시선에 관객의 시선을 동기화시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달리"를 보는 관객에게 필터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작품을 즐겁고도 위화감 없이 볼 수 있는 관객의 범위를 좁혀놓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과 비슷하단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몰입감은 더 강해졌을 것이다. 이성애자에겐 반대 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양성애자이건 아니건 간에 호기심 왕성한 이는 궁금함에 이끌리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달리랜드"에 "제임스"와 함께 입성한 관객은 극의 끝까지 "달리"가 과연 자신의 위대한 "독창적인 예술"의 제국을 어떻게 더 유지하고 지속시킬 것인가? 또는 그가 왜 그런 창조가가 되었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부분이나마 주워 갖게 된다.
"제임스"가 "달리와 갈라"의 파티에 첫 입장할 때 방의 중간에서 한 여자에게 술 같은 음료를 따라주는 남자가 "제임스"와 생김새가 매우 유사한 배우인 것에 시선이 갔다. 그것이 "달리"의 아내인 “갈라”가 끝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취향에 맞는 젊은 남자를 주변에 두고자 파티에 불러들이고 있음을 드러냈고, 그 취향이 무엇인가도 알려줬다. 이후에 “갈라”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뮤지컬의 주연배우이자 가수인 "제프 팬홀프"에게 막대한 부를 주기도 했다.
"달리" 또한 그런 "갈라"의 방종함에 못지않게 자신의 취향대로 "양성적인 매력"을 지닌 "트랜스 젠더" 애인을 옆에 두고 즐기는 것 같은 이미지를 뿌리지만 극의 후반부에 가서는 "갈라"만을 사랑하고 욕망할 뿐 그 외의 다른 이와의 성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또한 하지 못하는 결벽증과 건강 염려증을 지닌 이임이 밝혀진다. "갈라"의 성적 방종을 방치했음에도 "제프"에게 퍼부은 돈에 대해선 화를 냈지만, "갈라"없인 그는 "애"였다.
그 둘의 젊은 시절 유명한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던 "갈라"를 유혹하기 위해 역시나 "양성적이고도 중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면서 퇴폐미를 풍기는 배우 "에즈라 밀러"가 연기한 "젊은 시절"의 "달리"가 젊으면서도 선 굵은 남성적인 골격을 가진 "갈라"의 앞에서 웃으며 넘어지는 오버를 하는 장면은 적어도 그 당시의 둘 간의 사랑은 타오르듯이 뜨거운 것이었음을 감잡을 수 있게 만든다.
왜 "벤 킹슬리"가 노년의 "달리"의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이었을까?를 다시 떠올려 보자면, 위대한 연기력을 지닌 그가 "아이언맨 3편"에서 테러리스트 집단인 "텐링즈"의 두목인 공포스러운 존재인 "만다린"을 극 중에서 연기했던, 사실은 위압적인 "카리스마"따위 실제로 갖지 않은 그저 목소리 좋고 경박한 진짜 3류 배우였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달리"는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을 추구하는 당대의 혁명적인 예술가인 동시에 "피카소"와의 교류를 통해 그로부터 예술적인 영향까지 받은 일류의 고차원적인 예술가이자 당시 대중문화의 최고 인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의 측면에서는 드러내고 있던 천재의 이미지와는 다른 "텅 비어 있는 미성숙한 존재"로서 무능력했다고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도 그를 캐스팅한 것은 적절했다.
하지만 "아메리칸 사이코"를 뛰어난 연출력으로 만들어 호평을 받았던 "메리 헤론" 감독은 그 작품 속의 시대의 고급인력인 "월 스트리트"의 엘리트인 "여피족"의 화려하고 고상하게 돈으로 처발라 만들어진 금융 거품 시대의 허위와 허상을 까발리는 작법에는 충실하게 "미국 문화"영역에 있는 "달리"의 한 측면을 바라보는 부분에선 일부 성공한 것 같지만 "스페인"태생의 "달리"를 "유럽 문화"영역의 측면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안달루시아의 개"란 영화에 참여해서 기괴함과 단절된 영상으로 연결되는, 기승전결이 부드러이 연결되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 속의 한 장면에서 나온 뚫어진 손바닥으로 수없이 나오는 "개미"를 포함한 내용으로 만든 (디즈니가 발굴해서 2003년에 완성한)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 나온 그의 독창적인 예술의 깊이와 너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기를 포기한 면모도 있었다. 마치, 놀이동산처럼 보고 나갈 정도만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영화의 초반부부터 파고든 부분은 실제 원작과 인쇄해서 만든 위변조 작품을 구분하지 않고 판매하여 “갈라”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미리 종이에 각기 다른 모양의 "달리"가 직접 쓴 수많은 서명을 써넣고, 업자가 그 종이 위에 "달리"의 진품을 인쇄해서 판매한 역사를 찾아낸 "고발"이다.
화려하고 노출로 범벅이 된 파티와 코카인 흡입, 일부 난교, "달리"가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장면, 젊고 이쁜 남자라면 일단 들이대는 "갈라"의 모습, "달리"의 아이디어로 수많은 모델의 둔부 탁본을 찍는 씬 등등이 작품 속의 자극적인 부분으로 관객의 시선을 조금씩 끌어간다. 클리셰라 불릴 만큼 천재적인 괴짜 예술가의 사생활 이야기에서 쉽게 상상이 되는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긴 하지만 그것이 다행히 지루하진 않다.
결말부에서 "달리"의 생의 끝나는 시점에도 찾아와 그를 경외하는 "제임스"의 시선으로 끝맺음을 하려고 하는데, 그 시선에 대한 공감이, 사실 영화가 끝난 뒤에 "달리"에 관련된 자료와 영화감독인 "메리 헤론"의 필모그래피와 성공작인 "아메리칸 사이코"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까지는 아득하게 있었는데, 사라졌다. 놀이동산에 돈을 내고 들어간 뒤에 놀 기구를 모두 타고 나온 "아이"가 논 기억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처럼.
* 달리(Dali)“의 몽환적인 그래픽을 수없이 매초마다 그려내고도 더 넘쳐날 챗지피티 4.0과 연결된 "달리(Dall.E)"에게 요청했던 것은 "달리"와 그의 작품 "기억의 지속"과 연결된 그림을 그려줘였다. 몇 십초도 지나지 않아 나온 그림중에 하나다. 이 시대에 "달리"가 화가로서 그림을 그렸다면 과연 어떻게 그에 의해서 달리 그림이 그려졌을까? 아니, 그가 과연 "화가"라는 직업을 택하기는 했을까?란 생각이 순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