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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Dec 25.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 찔러 보기

재난 영화 속의 작은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날 것 같은 이야기

(그림 출처: 이로운 리뷰)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글을 쓰지 않고 있었다. 내 안에서 좀 더 숙성하고 오모가리 김치찌개를 만들 수준의 김치처럼 확 삭아 버려야만 더 리뷰다운 것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가 있었다. 작품 속의 인물 중의 하나는 김치 냉장고 속에서 누구도 모르게 부패해 갔지만, 이 리뷰는 의미 있는 숙성의 결과이길.


1. 버려야 했던 선입견

2. 콘크리트 유토피아, 찔러 보기

3. 영화 끝 이후의 이곳은 살만한 곳인가?



1. 버려야 했던 선입견

가드를 좀 내린 상태에서 봐야
좀 더 재미있다


"이병헌 배우"의 작품을 볼 때마다 그의 연기력에는 매번 감탄했다. "내 마음의 풍금"에서의 순수하고도 순진한 시골마을 선생님 역할은 단선적으로 보였으면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낳으며, 시골 소녀인 "전도연 배우"에게로 마음이 가는 장면은 그가 아니었다면 현실처럼 느껴지기 어려웠다.

(출처: 알라딘)

이번 작품 전의 그의 재난 영화는 "백두산"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병헌 배우"와 "전도연 배우"가 이 작품에서 다시 만나서 깊은 인상을 주게끔 만드는 이야기를 "내 마음의 풍금"과는 다른 양상으로 해냈다. "전도연 배우"의 아내역 카메오 연기는 짧았지만, 남편역 "이병헌 배우"가 내린 희생 결정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인만-영화 자투리)

한반도 전체가 "백두산"의 화산분출로 지진 위기를 겪게 된 기시감을 떠올리게 하는 캐스팅이다. 이 전작을 본 관객이라면 이곳에서 또 그와 유사한 캐릭터를 보여줄 것 같다는 기시감 같은 것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 전작이 이 작품에 이 배우를 선정한 이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과는 다르게 나온다.


반면에 이 작품이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고 하면서 이 과정에서 "빌런"으로서의 그의 활약을 미리 재단하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미리 알고 보더라도 예상되는 수준으로 평이하게 스토리가 진행되지만은 않고, 단순히 각 캐릭터와 각 신을 돌아보면서 자로 잰 듯이 똑 떨어지는 해석이 나오는 작품인 것은 아니다.


하염없이 착하고 수세에 몰려 있던 "박보영 배우"가 맡은 "주명화"가 극에서 반전적인 역공을 개시할 때의 임팩트는 "전도연 배우"가 "백두산"과 "내 마음의 풍금"에서 보여준 커다란 에너지를 대신 차지하고 극의 긴장감을 최대화하는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가드를 좀 내린 상태에서 봐야 좀 더 재미있다.




2. 콘크리트 유토피아, 찔러 보기 


서로 욕하면서 닮는 법을 이야기한다.


왜 이런 재난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유가 사실 작품 내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 사건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거나 이를 예방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재난 앞에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이를 극복하려는 어드벤처 성격의 극을 그려가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 같다.


"매드맥스 시리즈"영화가 그리듯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지구에서 벌어지는 인간 간의 투쟁을 다룸으로써, 인간 사회 속에 있는 여러 복잡함을 거둬들인 상태에서 마치 우화처럼 현시대의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직시할 수 있도록 만든 설정이 재난이라서였을 것이다.

(출처: The Film Magazine)

자고 일어나 보니 살고 있던 "황궁아파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건물 등이 다 무너져 있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인 데다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 흐리고 어둠침침하여 더 추워진 날씨에 그 아파트의 주변으로 나간 이들은 얼어 죽거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그려진다.


여기에서 이 "황궁아파트"가 마치 유일무이한 "파라다이스"라도 되는 것처럼 아파트 주민이 인식하는 상황에서 "외부인을 축출해야만 한다"는 여론이 반상회와도 같은 회의에서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한 인물이 보다 확고한 결단력과 더불어 필요시 강력한 폭력을 쓰거나 주민을 위해서 희생을 무릅쓰는 이미지를 획득한다.


처음엔 어눌한 말투와 순진한 행동, 우직함을 보여주던 이 인물이 외부인을 축출하고, 아파트의 질서를 지키며, 주민을 규합하여 외부로 나가 식량을 구하는 활동을 지도자로서 진행하면서 점차적으로 자신 위주의 판단을 하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수신제국치국천하태평"으로 읊는 평균 이하의 상식과 폭력성을 보인다.


이 인물이 복잡다단한 연기를 복합적인 감정을 싣고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김영탁"의 면모이고, 이를 둘러싼 "황궁아파트"의 사람과 이 인물과의 관계 변화가 바로 우리가 꼭 우리나라가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인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적 영웅의 탄생과 권력의 부패 및 횡포, 권력 누수 등의 과정을 보여주는 면모도 있다.


그러나 인물이 살아남아 있는 공간을 "아파트"로 함으로써 보다 한국적 현실에 중점을 둔 내용으로 만들었음을 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출처: 조선일보)

"아파트"의 내외부에 있는 "아파트" 거주민이 아닌 이를 "바퀴벌레"로 부르면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치부하고 무자비하게 축출하거나 처단하는 내용은 "독일의 나치가 부른 유대인"과 "일본의 신민주의가 부른 비신민", "공산국가들이 부른 반동분자", "자본주의 국가가 부른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고 처단하는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인류사 보편의 전통적이고 폭력적인 프레임을 떠오르게 만든다. 극한 상황에선 더 또렷해지는.


그렇지만 이 극화를 보는 대다수의 한국인 중에 하나인 나는 주로 "아파트"인 자기 집을 소유한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를 나눠서 인간을 차등하기 일쑤인 이곳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요즘같이 자산 값어치가 폭락하는 시대엔 "아파트"를 갖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그러했다.


자신의 부모가 아파트 한 채를 사서 살고 있는데 건너편의 같은 아파트 브랜드의 임대아파트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예전의 한 지인이 내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판단 기준은 그 부모를 따라서 계속 일관되게 “아파트 같은 소유물"을 가진 이하고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대부분의 주민은 재난 속에서의 한정된 자원과 안전한 주거를 보장받기 위해 맹렬하게 "아파트"를 소유하지 않은 이를 자신과 다른 존재로 취급하고, 설사 나갔다 돌아온, 거주민이 분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같이 나누어 주는 것에 심한 아까움을 느낀다. 이들에겐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그것은 그들에게 한정적인 시간에 한정적인 자원을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겠지만, 결국 그렇게 "아파트"의 내부와 외부를 분리했던 것이, 외부로부터의 적개심을 낳게 되고, 내부가 외부의 존재를 차별하면서 만들어낸 "미신과 곡해, 모함"이 그대로 다시 내부의 그들에게 복수와 더불은 파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파트"라는 특권층의 공간에 소유자로서의 자신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 이와 그곳에 들어가 특권을 누리고 싶어 하는 종류의 사람에게 이 작품은 눈과 귀를 막은 채로 대해야만 하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프레이밍"은 결국 "역프레이밍"으로 돌아와 "프레이밍"한 자를 내리친다는 이야기를 하는 "오펜하이머"와 유사한 "프레이밍 무용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의와 더불어 정의의 기치"를 보여주는 "박보영 배우"의 "주명화"가 "빌런"인 "김영탁"의 대극에서 투쟁하면서 "새로운 종류의 악"에 대해 "선"이 살아남으로써 승리하는 작품이 아니다. "서로 욕하면서 닮는 법"을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아파트"같은 부동산이나 기타 소유물을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로 나눠서 차별하고 프레이밍 하는 사회 분위기에 이성이 압살 되어 무리하게 "황성아파트"에 대한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가 사기당해 자신의 돈을 모두 날리고 그 아파트의 매물에 사기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 인물을 이성을 잃고 죽이게 된 한 인간이 맞은 비극이 오히려 이 현실 속의 보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비극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에게 공감하게 될 가능성은 극을 그저 보기만 하는 동안에는 생기지 않는다. 본 시간이 한참이 지난 뒤에 떠올려 보려고 하니 그제야 생기는 것 같다. 거의 죽을 무렵에 자신의 집이어야 했었을 아파트의 호실에 들어가서 마치 자신의 안락한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죽어갈 때 나도 모를 애달픔이 일어났던 기억이 이제야 또렷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물론, "살인자"로서의 악행은 이의 없이 응징당해 마땅했던 부분이다.



3. 영화 끝 이후의 이곳은 살만한 곳인가?


 오랜 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끔 하는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아직도 폐허 그대로인 "이곳" 한국은 그대로인 상태로 극 중 여러 파국을 거쳐서 살아남은 이 하나가 끝에 역설적으로 쓰러진 "황궁아파트"보다 훨씬 큰 평수의 "아파트"가 가로로 무너진 상태로 살고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서로 살려고 하는 이는 당연히 같이 살게끔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모여 있는 곳이다.


다른 아파트가 있는 곳이나 이른바 "모든 바퀴벌레"가 사는 곳은 "식인"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황궁아파트"사람이나 "바퀴벌레"나 "또 다른 무너진 아파트에 사는 이" 모두가 상대편의 세계에 대해서 붙여놓은 공통적인 꼬리표다. 마치 각자가 속한 인터넷의 여러 공동체 공간에서 서로가 원하는 얘기만 하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꼬리표 붙이기 놀음처럼.


영화 속의 모든 인물과 사실 현실의 인물은 저마다 마치 재난을 만나 서로 얼굴을 제대로 보고 이야기할 기회가 극단적으로 적어진 여기저기 흩어진 섬처럼 실제의 상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퀴벌레"라고 이름 붙이던지 "식인종"이라고 한다. 세계의 분열은 영화 속 재난이 드러내는 이상으로 이미 일어나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작고도 깊은 우물 아래 갇혀서 보이는 좁은 하늘이 전부인양 이야기하고, 그 바깥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하기 편한 대로 낙인찍는다". 이것이 반복되는 이상 재난이 없는 한국이나 그 어떤 국가도 재난이 벌어진 것만도 못한 위험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이를 벗어나야 할 100% 확실한 답은 없다. 다만 더 온건하고 서로 다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보다 관대하고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는 이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당위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당장에는 손해를 보는 이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더 많이 살아남아 있는 것은 "그들" 때문이고, "그들"도 올바른 사고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생존을 더 안전하게 보장해갈 수 있는 것이다.


인류가 이런 오랜 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끔 하는 영화가 상영되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들"이 적잖이 있을 것이란 희망과 기대로 인해 영화 속 세계나 이쪽 현실의 세계엔 아직 살 길이 남아 있으리란 "기분"이 든다. 그게 나와 더 많은 사람의 "생각"이 되고 "행동"이 된다면 더 좋겠지만.


하지만 살아남은 "황궁아파트"의 생존자 중에 하나는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가 묻는 "그들"의 질문에 "평범한 곳"이었다고 우선은 벌어진 투쟁과 반목, 차별, 폭력의 역사를 숨긴다. 어찌 되었든 "인간"의 본능에는 "나"와 다른 타인을 경계하고 의심하고 멀리하는 경향이 거의 빠짐없이 있으니. 교육과 올바름을 따지는 매스컴이나 언론, 치안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영화 속 상황에서 어느 곳에서든 "뭔가 다른 존재로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


문과 마음을 열어 놓고 같이 살고자 한 이들이 오히려 피해 없이 생존할 확률이 높다는 지혜를 남길뿐이다. 그것이 아래와 같은 풍경은 아니었을지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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