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자로 낙인찍힌 것만으로는 승부가 끝나지 않는다
(사진 출처: Wikipedia)
이런 지적 게으름은
인간성을 잃어가게
하기에 딱이다
연휴의 복판 무엇을 보면 좋을까 잠시 고민을 했다. AI에게 이걸 물어봤다간 앞으로도 계속 계산이 잘 되고 정밀하게 선택된 일정한 방향의 취향만 갖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지금의 내가 뭘 좋아하는가로 내 미래가 이미 정해진다는 건 비인간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MBTI 같은 1900년대 초기에 "칼융"이 만든 내용으로 열광하는 지금의 사회가 결코 더 발전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인간을 이리저리 낙인찍어서 N이나 T가 아니니 지능 떨어지는 계층으로 몰아가는 듯한 프로나 대담이 판을 친다.
보다 보면 외치고 싶다. '이 바보 같은 것들아 그런 통계를 구미에 맞게 만들어서 예능 하라고 MBTI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사람이란 것이 그만큼 여러 다른 양태를 지니고 살아가니,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란 이야기이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깊고 넓게 이해할 단서를 주는 것이기도 하고(참조 링크: 4 reasons Why MBTI sucks ).
그런데 뭣에 그것을 쓰고 있는가? 사람을 나누고 차별을 강화하고 신분을 메기는 방법 중에 하나로 사용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모아서. 이것이 변화하는 분류라는 것도 까먹는다.
혈액형과 별자리, 사주 등으로 사람군을 정하고 쉽고 편하게 판단하는 사회와 비교해서 더 나을 것도 없는 곳이 되어간다는 회의감이, AI의 시대에는 더 커졌고, 이걸로 내 미래를 정하는 건 더 끔찍하다.
일단 "넷플릭스"의 추천 %가 아무리 99% 가까이 나와도 그걸 가능하면 보지 않기로 했다. 계속 그것만 보다간 좁은 우물에 갇힌 이전의 시대보다 더 생각 좁은 꼰대가 되어갈 것이 너무도 뻔해 보였다.
SNS와 같은 전략으로 사용자가 머무는 시간을 더 길게 만들기 위한 동일한 "중독" 전략에 계속 넘어가고 싶지 않아서다. 각국의 내전에 가까운 상황과 인종차별, 파시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가 강화되기 딱 좋다.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다 보니 쉽게 판단을 내릴 근거를 사람은 맹렬하게 찾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버튼 하나로 결정을 내리는 세계란 정말로 얼마나 편안한가. 이런 지적 게으름은 인간성을 잃어가게 하기에 딱이다.
공부할 이유도 지식을 쌓을 이유도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저 한 줌도 안 되는 자신의 관심사만 갖고 살면 된다. 이미 죽은 이와 다름없는 손쉬운 인생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낙오자로 분류된 이를 모아서
"잡일"을 느릿하게 시키는
소외된 팀이다
그런 사회적 신분 나누기 절차의 모형과도 같은 내용이 이 "슬로 호시스"에는 나온다. 좀 더 내가 받았던 영어 교육상에 나왔던 발음이자 영문의 구문 표기 원칙에 맞춰 써보자면 "슬로우 호올시스"로 쓸 수도 있다.
"Slow Horses"라는 원제를 봐야 좀 더 제목이 뜻하는 바가 제대로 전달된다. 그냥 국문으로 쓰인 제목을 보면 이게 무슨 이집트 심령 호러물인지 뭔지 감이 잡히지가 않는다.
"느리게 달리는 말들", 곧, 능력 떨어지고 낙오한 이로 분류된 자들을 어느 조직에선가 이름 붙인 게 아닐까라는 추리가 그나마 가능해진다.
얼마 전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대한 내용을 "존 르카레"를 다룬 다큐멘터리 "첩보물의 제왕"에서 리뷰 중에 쓴 적이 있었다. 그후에 "애플 TV"를 보니 이 작품의 "스마일리"였던 "게리 올드만"이 보였다.
"슬로 호시스"에서 제멋대로 길어버린 머리와 추레한 옷차림에 배도 사정없이 나와버린 모습으로 나와 있었다. 가만 보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의 "스마일리"이미지를 재활용한 "MI5"의 스파이물이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가 팀장으로 있는 MI5 에는 소속되어 있지만 별도의 조직인 "슬로 호시스"는 낙오자로 분류된 이를 모아서 "잡일"을 느릿하게 시키는 소외된 팀이다.
"리버"는 총을 들어 제지하지만
폭탄버튼이 눌린다
첫 장면에서 등장한 젊은 MI5의 나름 유능해 보이지만 인상은 어딘가 살짝 모자란 구석이 있는 "리버 카트라이트"를 연기한 "잭 로던"이 드라마의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적역으로 보인다.
도입부에서 그는 영국의 공항에 침투한 중동계 폭탄 테러리스트를 막기 위해 뛰어다닌다. 자신에게 정보를 준 다른 요원이 테러리스트의 복장에 대한 상하의 색상 정보를 다르게 주었지만 이를 믿고 다른 이를 덮쳤다.
당연히 인물의 가방 등에는 폭탄 같은 것은 들어 있지 않았고, "리버"는 순간 자신이 받은 의상 색상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음을 파악한 본부의 정보로 공항의 먼 곳에서 입국 중인 이를 발견하고 맹렬히 달려간다.
공항의 화장실에서 폭탄이 들어 있는 가방으로 입국 시 들고 온 가방을 바꾼 또 다른 중동계 테러리스트는 "리버"의 추격에 공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까지 뛰어가고, "리버"는 총을 들어 제지하지만 폭탄버튼이 눌린다.
이 "낙오자"들이 본부로 복귀는
못한다고 해도 가치는
인정받는 걸 보고 싶다
이 이후부터 첫 시즌의 마지막화까지 최초의 폭탄이 터지게 된 것부터 마지막 MI5의 국장과 부국장이 벌인 작전의 내막까지 모두 밝혀지는 각 화별 내용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 있어서 단 한편도 놓치지 않고 잘 봤다.
"리버"같이 하나씩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요원이 이곳으로 이른바 "좌천"당한 상황이지만 마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저마다의 약간 나사 빠진 듯한 능력이 조합되면서 음모를 밝히고 파국을 면한다.
계속해서 양파를 까듯이 밝혀지는 실제 벌어진 상황과 앞에 벌어진 일은 하나 빠짐없이 아귀를 맞추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 드라마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낙오자"에게도 강점과 출구가 있단 것이다.
배신과 군상극이 벌어지는 "존 르카레"의 스파이물의 전통이 은근히 묻어 있는 암투의 설정과 실제 외부에서 바라본 것과는 많이 다른, 정의롭지도 않고 능력이 뛰어나지만은 않은 스파이의 모습은 일상을 복제한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이라면 군데군데 벌어지는 "자신이 더 인정받고 나은 조건을 쟁취하기 위한 배신과 조작"이 우리가 평범하게 삶을 꾸리고 있는 회사라는 곳에서도 쉼 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권력과 지위, 급여 조건의 쟁투에서 낙인이 찍혀 추락한 이가 그저 낙인찍힌 대로 느릿느릿하게 달릴 수밖에 없는 능력 없는 "슬로 호시스"만은 아닌 것을 드러내 준다.
점차적으로 갖고 있는 능력이 드러나고 자신감도 쌓여가는 이 팀의 팀장인 "램" 역할을 맡은 "게리 올드만"은 여기저기에서 체통 같은 것 없이 방귀를 뀌면서도 MI5의 부국장과 동등한 두뇌게임을 하는 데 있어 하등 떨어질 것이 없는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극 중 오래전 MI5의 중역을 했던 "리버"의 "할아버지"는 "최고의 스파이"는 항상 좋은 위치에서만 일을 하지 않는다는 위로의 말을 사건을 해결한 뒤에도 본부 복귀가 이뤄지지 않은 "리버"에게 이야기하면서 "스마일리"조차 정년퇴직 후에 여러 번 다시 복귀했다는 말을 하는데, 혹, 연결된 세계관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스마일리"를 맡았던 배우 "게리"가 이 드라마에도 출연하여 발군의 "스파이역"을 해낼 것이란 복선을 이 말을 통해서 깐 것임에 분명하다. "존 르카레"의 작품에는 없는 요절복통하는 코미디와 씁쓸하지 않은 제대로 된 해피엔딩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시즌 1을 보고 나서 시즌 2,3이 이미 완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벌써 시즌 6까지 계획이 잡힌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비극이 있을까 봐 가능하면 드라마 시리즈는 보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긴 하지만, 이번엔 불가피하게 깨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 "낙오자"들이 본부로 복귀는 못해도 가치는 인정받는 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