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부터 오랜 명맥을 잇고 있는 명작이 새로운 리부트로 돌아오다
(출처: Plugged in)
잊혀갈 만하면 다시 리부트 되어서 돌아오는 "혹성탈출"은 1968년에 첫 개봉을 한 "찰튼 해스턴"이 주연으로 "조지 테일러"역을 맡은 "혹성탈출"의 당시 영화 역사상 충격적인 반전 영상을 담은 스토리와 함께 파란을 일으켰던 작품이었다.
화성을 향해 날아갔던 우주비행사가 사고로 인해서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뒤에 그곳의 지배자 생명체가 지구의 "유인원"과 같은 존재이고 "인간"이 노예 취급 당하는 것을 경험하다 도망쳐서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자유의 여신상"이 넘어진 채로 바다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장면의 충격은 당시에 개봉작으로 처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1950년생 주변의 사람들이나 "주말의 영화" 등의 외화를 매주 더빙해서 상영하던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본 1960~1970년생에겐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서 당시 냉전의 긴장감 위에 살았던 사람들은 핵전쟁으로 망한 지구가 그 행성임을 깨닫고 오열하던 "찰튼"의 절망감이 가득한 연기에 놀란 와중에도 공감했었다.
"이 미친놈들아! 너희가 다 망쳐놨어! 아, 젠장할!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You maniacs! You blew it up! Ah, damn you! God damn you all to hell!)"는 엄청난 감정을 던진 대사였다.
적어도 이 영화를 봤던 이들은 핵전쟁이 벌어지면 이 지구에 남을 것이 인류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될 것임을 영상 속에서 정확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지구의 핵억지력의 일부를 책임지는 작품이다.
"팀 버튼" 감독에 의해서 한차례 외전처럼 "혹성탈출"이란 1편의 제목으로 "리메이크"가 되었다. 나름 성공적인 작품이었지만 그 세계관에 입각한 다음 시리즈까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망쳐서 원래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시간과 환경을 가진 지구로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한 "마크 월버그"가 맡은 "레오 데이비슨"은 링컨 동상이 유인원임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결말을 맺지만 여기서 더 이어진 스토리는 오랜동안 없었다.
이후에 "루퍼트 와이엇" 감독에 의해서 성공적인 리부트를 하고 이 작품을 다시 재 리부트한 "리부트"의 귀재인 "맷 리브스" 감독이 3편을 더 연달아 만들어 흥행을 더 확장해서 성공시켰다.
"루퍼트 와이엇"은 해당 리부트 작품 이후에 경질이 되었었는데 사실 그가 제대로 진지하게 "시저"라는 유인원 지도자의 모습을 그 작품에서 제대로 형상화해내지 못했다면 "맷 리브스"의 나머지 3편의 흥행과 일관성 있는 스토리는 힘을 갖기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루퍼트" 감독의 단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너무 "의미와 정의, 인간성"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선과 악을 오가는 혼동의 시대에 맞는 작품을 만들기에는 "맷" 감독과 같은 감각을 선사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란 것을 "캡티브 스테이트"란 그의 흥행하지 못한 작품을 보면서 느꼈었다. 이 작품만큼 일제강점기를 비유적으로 잘 묘사한 작품이 없지만.
"시저"라는 유인원 지도자의 매력도를 끝 간 데 없이 높이면서 인류가 갖고 있는 인종이나 국가, 지역 등에 의해서 자행되는 차별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알게 모르게 행하는 "새로운 시대"전까지의 작품의 내용 속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다른 인간에 대한 유대감과 인간성에 입각한 지도력을 제대로 형상화해 낸 것은 바로바로 작품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는 수준 이상의 흥행을 보장해 왔었다.
이 작품들이 너무 위대한 지도자인 "시저"의 죽음으로 끝난 뒤에 이 스토리를 이은 상태로 다시 7년여 만에 돌아와서 개봉을 했기 때문에 그때보다도 더 인간성이 메마르고 인류 간의 유대감에 의한 판단보다 이기주의와 물질적 이익을 위한 합리화가 더 거세진 시대에 맞지 않으리란 우려가 있었다.
물론, 그 전작이 워낙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나 그에 어울리는 흥행이 벌어지긴 힘들었겠지만 꽤 괜찮은 성적을 남겼다. 그래서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것이다.
오랜 시간 머뭇거리던 걸음을 멈추고 들어가야 할 공간 앞에서 문을 열 때의 느낌을 경험하면서 이 작품을 열어 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죽은 "시저"를 화장하고 난 뒤에 유인원들이 그의 뜻을 살리면서 몇 세대가 흘러갔다는 내레이션과 더불어 시작되는 영화의 초반부는 솔직히 좀 김이 빠지게 했다.
"혹성탈출"이라고 하면 벗어나지 말아야 할 어떤 정형성이 생겨버렸고 그것을 최대한 무너뜨리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선이 극본에 그려져 있음이 다소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정형적인 패턴처럼 "시저"와도 같은 나중에 위대한 지도자로 각성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는 "독수리족"의 왕자와도 같은 "노아"의 부족이 "프락시무스 시저"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독재자와도 같은 여러 부족의 인력을 강탈해서 거대한 부족을 만드는 존재가 나와서 부족을 급습해서 불태우고, "노아"는 자기 부족의 생존자를 되찾기 위해서 그곳을 향해 간다.
이전의 주인공 "시저"의 서사가 갖고 있는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좀 더 안전한 인식과 더불어 고정 팬층의 관심을 확보해서 흥행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도록 만든 것 같았다.
이 작품에서의 변주는 이중적인 성격과 명암을 동시간에 같이 인상에 담고 있는 오묘한 외모의 배우인 "프레야 엘런"이 연기한 "메이"다. 오리지널 "혹성탈출"에서 육감적인 외모를 뽐내지만 말도 못 하는 머리가 빈 유인원과도 같은 인류를 연기했던 "노바"라는 이름을 "노아"와 이후 동행이 되는 "라카"가 이름 붙여 준 것은 이 시리즈물의 중요한 상징 놀이라 할 수 있다.
"멧" 감독의 작품에서도 먼 길을 가던 "시저" 일행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린 인간 여자애를 만나서 이름을 붙일 때 쉐보레 자동차의 브랜드 중에 하나인 "노바"의 마크를 보고 그 여자애의 이름을 "노바"로 짓는 것을 연장해서 수많은 인간 여자 이름을 지금 그 이유는 모르지만 "노바"라고 붙인다고 이야기하는 내용은 그 전편의 내용을 기억해야 의미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전 영화들 속에 나타났던 "노바"와는 완전히 다르게 "메이"는 말도 유창하게 잘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정도를 넘어서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의 목을 졸라서 죽일 수도 있고, "노아"와 "프락시무스 시저"와 속고 속이는 두뇌게임을 선보이며 선과 악의 구분을 떠나서 인류의 기술력 회복을 통한 주도권 회복과 복권을 위해 "노아"와 그의 일행을 이용하는 지능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노아"가 "시저"의 정통 계승자인 것처럼 나오기는 하지만 자신이 "라카"로부터 받은 "시저"의 뜻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지닌 펜던트를 "메이"에게 준 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인간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영화 속 세상이나 현실이나 같은 과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이 재리부트 된 시리즈가 이어지게 되면 다시 지구상의 주류 세력으로 복권하고자 하는 인류와 현 주류 세력인 유인원 간의 전면적인 투쟁이 벌어질 것임을 긴장감 있는 화면과 더불어 보여주면서도 이 투쟁의 과정에서 출구로 나타나는 것은 인간과 유인원이 같이 만들어가는 인간성 회복의 드라마가 될 것이란 기대를 남겼다.
그런데, 이 작품의 흥행이 전편 못지않았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 정도 규모를 제대로 유지하면서 블록버스터 급에 모자라지 않는 투자를 받으면서 후속 편이 과연 만들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바뀐 시대와 박력이 조금 떨어진 듯한 감독과 크게 변하지 않은 "말하는 유인원"을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구현하는 그래픽 기술이 크게 진보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 등 이 시리즈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는 것들이 좀 충족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시점쯤에는 "팀 버튼"처럼 이전 색상과는 다르게 툭 튀어 오르는 작품으로 변신을 시도해봤어야 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전과 같은 종류의 서사가 다시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관객은 이 시리즈에 계속 머물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나처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