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악과 마주한 정의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의 투쟁기
(출처: Prime Video)
점점 더 나이를 먹을수록 볼거리를 고를 때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게 된다. 살아온 경험이 작품을 고르기 전에 표지나 짧은 줄거리, 감독과 배우, 국적, 인기 순위 등등의 요소를 필터로 수없이 걸러서다.
OTT라는 게 무한정에 가깝게 많은 선택지를 제공해서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작품 중에 무언가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고 느끼게끔 해줄 작품을 하나 찾기 위한 작업에 많은 시간을 들이게 한다.
그러다, 최근에 건담 3D 애니와 2D 애니를 각각 다른 플랫폼에서 고른 뒤에 나름 만족했던 기억이 계속 영향을 끼쳐서인지 일본 애니를 하나 더 찾아보게끔 만들었다. 본 뒤에 알아보니 흥행은 못했다.
그게 "바빌론"이었다. 이 이름으로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는 취지에 만들었던 동명 작품이기도 하고 오래전 동명 팝송이 나와서 메가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눈길을 끈 것은 줄거리였다.
'생과 사의 정의가 바뀐다' 정도의 카피가 쓰여 있어서 이것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실 내 머릿속에 연상으로 떠오른 스토리는 일본의 한 도시에서 생과 사의 경계가 바뀌면서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영역으로 기술적으로 넘어가 버리고, 산자가 사라진 도시가 되는 판타지를 다룰 것이란 거였다.
그런 연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서 이 애니가 다룬 것은 "정치 스릴러+심리 조종 판타지+소프트 에로물"이었다. 얼핏 심령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최소한 내가 본 전체 12화 중에 4화까지는 상당한 량의 현실적인 정보를 애니메이션 화면 곳곳에 뿌려두고 치밀하게 형상화해 낸 정밀함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 묘사된 사람을 같이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자살로 유도하는 팜므파탈 "마가세 아이(曲世愛)"는 이름의 뜻에서 '세상에 순응하는 사랑, 현실적인 사랑, 애틋하고 안타까운 사랑'이란 다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극 중에 벌어지는 자살 사고의 용의자로 전혀 다른 3인을 연기하기도 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타고난 불가사의한 성적 매력을 가진 자로, 성적인 접촉 없이도 남성의 내면을 겁탈하는 이로 나온다.
주인공인 도쿄 지검 특수부의 검사 "세이자키 젠(正崎 善)"은 '어려움 속에서도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 선량하고 올바른 인품을 가진 사람,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한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다.
"나가세"는 그로부터 처음 취조를 받을 때 그의 이름의 뜻에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 둘 간의 "선"과 "악"의 대결이 벌어지는 것이 이 극화의 중심 스토리다.
이 작품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정치 정당이 새로 영입한 인물에게 막강한 힘을 실어 주었을 때, 통제 불가능한 상황 앞에 놓일 수 있는 취약함이 마침 우리나라 정치 상황과 맞물려서 벌어지는 양상과 일면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도쿄와는 다른 개념의 신도시를 만들어 실험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갖고 있는 정당의 거물이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신도시를 새로운 정책으로 진화시키기 위해서 훨씬 젊고 능력 있는 인물을 선정해서 밑바닥에서 이미 그가 새롭게 각광받으며 몰표를 받아 시장으로 선출되도록 만든다.
이 과정에서 그 새로운 인물과 정당의 거물이 연결된 네트워크에 있던 제약사의 연구자가 오랜 시간 투여해서 천천히 죽게 만드는 수면제를 흡입하는 장치를 사용해서 자살하고, 그를 찾아왔던 여자인 "나가세"가 동일 인물인지 몰랐던 상태로 뒤쫓았던 젊은 검사도 그 여자를 만난 뒤 자살한다.
"세이자키"는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영향력 있는 인물을 한 숙박 업소에서 모두 만난 또 다른 여자로 생각했던 이를 확보하여 취조하는 과정에서 성적인 행위를 할바는 없지만 즐겁게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마가세"에게 홀리게 된다. 그의 부재중 같이 있던 검사가 잠이 들어 "마가세"가 떠난다.
주인공 "세이자키" 검사는 원래 이 정치적인 흑막에 돈과 여자의 흐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수사 및 탐문을 하게 되지만, 그가 만나봤던 시장에 당선될 인물이 지나치게 완벽한 것에 의아해한다.
시장 취임식 전에 시장이 주요 인물과 갑작스럽게 행방불명이 되는데, 정치 거물은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세이자키"와 검사 조직에게 이들을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여기에서 충격적인 전개는 "마가세"와 말을 나누다가 잠들었던 검사를 포함한 64인의 고층 빌딩 자살 장면이다.
이들이 고층 옥상에서 떨어져 내릴 기색으로 모여 있을 때, 그 빌딩의 거대 화면과 곳곳의 뉴스화면에 강제적으로 등장한 젊은 시장은 '100년가량 살고자 고생하고 불안해하는 불행에서 벗어나 편안한 죽음을 누릴 수 있도록 제한 없고도 자유롭게 자살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선포를 한다.
경악스러운 이 선포는 3%가량의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하는데, 시의 법령 등의 정비를 신임 시장에게 일임했으므로 그 시장의 선동은 법령상 문제가 없는 상황임을 "세이자키"가 알게 된다.
동시에 64명의 인물이 모두 기쁜 얼굴을 하고 뛰어내려 자살할 때, "세이자키"는 "마가세"가 이를 기쁜 눈으로 지켜보는 것을 잠시잠깐 보게 되지만 순식간에 "마가세"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이 이후의 디테일이 이 작품이 가진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 기소권을 갖고 있는 "검사"가 이 신임 시장을 잡기 위한 구속영장 등을 받기 위해선 64인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 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내며, 법령상의 문구와 표현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범죄자임이 틀림없는 이를 찾더라도 절차상 문제없게끔 적법한 법 해석을 통해서 체포하기 위한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현실을 만화 원작과 애니메이션이 제대로 드러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 작품이 결말로 어떻게 가게 될지는 아직 이 단계까지만 극화를 보고서는 미리 쉽게 감잡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교묘한 법해석상의 사각지대를 노려서 저지르는 범죄를 미연에 차단하거나 발생 후에 처벌하는 것은 범죄자가 치밀하게 법을 잘 아는 만큼 더 어려워짐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핵심적인 메시지로 읽혔다. 절대악에 근접한 권력자는 자살까지 합법적으로 강요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대중이 보다 쉽고도 흥미진진한 방향으로 사법적인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어려운 여러 절차를 제대로 이해하게끔 만들어준다면, 대중은 손쉽게 현혹당하거나 잘못된 해석과 같이하며 자신을 망치는 법적으로 호도된 결론에 그나마 덜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게 이 극화의 미덕이다.
이 내용을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 얼려본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