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에어, 얼려 보기

"에어"와 내 경험이 교차한 순간

by Roman

(출처: Amazon.com)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고르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결정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최신 개봉작이 아닌 이상,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쓴다. 이건 일종의 고질병이다.


젊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실수로 잘못된 작품을 골라도 그것마저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B급 영화를 여러 편 보며 그 안에서 장르의 언어를 익히던 시절이었다.


"라스트 댄스"는 마이클 조던을 거의 신격화한 다큐멘터리였다. 드라마틱한 연출이 가미된 이 작품은 내 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농구 선수가 되게끔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마이클 조던에 대해 다룬 또 다른 영화 "에어"를 보게 되었다. 배경을 알고 있으니 연관된 영화를 선택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웠기 때문이다.


조던이 아닌, 조던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을 브랜드의 얼굴로 삼게 되는 과정을 다룬 영화다. "벤 애플렉"이 감독과 배우(나이키의 창업자인 “필 나이트”)를 겸했고, "멧 데이먼"이 실존 인물 "소니 바카로" 역을 맡았다. "조던"은 실제로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소니"다.


당시 조던은 아디다스와 컨버스의 관심을 받았고, 아디다스의 팬이기도 했다. 나이키는 가장 후순위에 불과했다. 소니는 조던의 플레이, 사회적 배경, 그리고 흑인 사회에서의 영향력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해 그를 ‘모든 걸 걸고 영입해야 할 대상’으로 판단한다. 수치나 자료가 아닌, 오랜 농구 업계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당시에 조깅화 쪽에서는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지만 새롭게 진입코자 했던 농구화 시장은 개발해도 농구하는 이밖에는 사지 않을 신발이라 확대도 더뎠고,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아디다스"와 "컨버스"의 아성은 쉽게 무너뜨리기 어려워 보였다.


물론, 군데군데 "필"의 "나이키" 창업 이념이 때로 규칙을 파괴하는 데서 성과의 확장을 이루고 기업 이념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원칙을 제대로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내서 복선처럼 작용한다.


그러나 감이 아니라 제대로 된 판단 기준을 가져오란 "필"의 닦달과 이미 우선순위 후보를 지명하는 것을 꺼리는 후발 주자로서의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동료 직원과 예산을 작게 여러 선수에게 투자해서 확률적인 성공을 기대하는 내부적인 원칙 등은 위대한 선수를 발굴해서 투자하는 것을 막았다.


최대의 투자 가능한 액수는 25만 불이고, 이를 투자해서 픽업할 "마이클"에겐 그만큼의 돈뿐만 아니라 메르세데스 벤츠 정도도 가뿐히 얹어서 사줄 "아디다스"가 있었다.


영화의 반전은 "소니"가 이 같은 상황에서 농구계의 구루로 통할 정도의 식견과 더불어 "아디다스"와 "컨버스"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후반부에서 강력하게 일어난다. 에이전트를 통해서만 선수의 부모와 대화하는 관행을 깨고 직접 접근해서 "마이클"의 부모와 대화하는데, 이것이 자신에 대한 평판을 건 모험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 붙였던 것이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압권은 나이키에 찾아온 마이클과 그의 부모와 회사의 중요 인원들 앞에서 천편일률적인 홍보 영상을 중간에 꺼버리고 전심을 담아서 이야기 한 당시에 이제 신입 프로인 "마이클"의 미래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말과 그에게 바라고 지원할 나이키의 전적인 지지를 확신하게 만드는 강력한 대사다. "멧"이기에 할 수 있는 연기였다.


중간중간 익히 알고 있는 "나이키"가 조던에게 제공한 그의 이름을 딴 "에어 조던"라인의 "시카고 불스"의 빨간색으로 대부분 뒤덮인 농구화가, 빨간색이 신발 전체 색상의 반을 넘어가면 안 되는 NBA 규정에 따라 매 경기 내야 하는 벌금을 모두 내기로 했던 이야기 등은 양념으로 쏠쏠하게 나왔다.


이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분들이 이 농구화의 성공을 잘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1990년대에 나온 이 농구화가 일상화로까지 팔리면서 안 신으면 안 되는 신발처럼 당시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다. 나중에 이 라인만을 위해 "조던"이란 브랜드가 만들어져 전용 로고까지 생긴 것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 파격적이고 전설적이고 파급효과가 높아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중국에 “리닝”이 있지만 세계화는 되지 못했다.


유사한 경험: 리젠 로빅 원사의 개발과 성공

이 영화를 보며 떠오른 장면이 있다. 과거 "오스프리"라는 글로벌 등산용 백팩 브랜드와의 거래를 추진하던 시기였다. 나는 원사 개발자도, 제품 설계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성을 읽었다.


당시 나는 아직 경력이 길지 않은, 젊은 사장과 협업하고 있었다. 그 사장은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창의적인 개발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가능성을 믿었다.


당시 우리 회사는 재생 나일론 원사 라인을 갖추고 있었고, 나는 그중 하나를 고강도 원사로 가공해 ‘리젠 로빅’이라는 이름으로 브랜딩 했다.


7년가량 미국 섬유 기업인 인비스타의 한국 법인에서 근무하며 익힌 Pull Through Marketing 기법을 활용했고,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공동 홍보까지 결합한 전략을 실행했다.


그 브랜딩의 과정에서 나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내외부에 있었다. 그들은 아시아의 섬유업체가 소재 브랜딩을 통해서 뭘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이전의 성공 이야기를 세밀하게 설명하고 내 신념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혔다.


그리고 내가 믿는 개발된 원사를 받아 원단을 만들어 브랜드가 지정한 봉제 공장에 납품하게 될 회사가 그저 작은 신생 업체고 가진 설비도 없었지만, 개발 능력과 더불은 브랜드의 요청사항을 세밀하게 이해하고 충족해 낼 능력을 믿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과 공급자의 말귀를 동시에 알아듣는 거였다.


그 결과, 오스프리는 40% 가까운 오더 증가를 기록했고, 우리 회사도 상당한 매출 상승을 경험했다. 당시의 리젠 로빅 원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팔리고 있으며, 어려운 세계 경제 상황 속에서도 브랜드의 소재로서의 입지를 지켜내고 있다. 팔고 싶어서 판 것이 안 팔릴 땐 사고 싶어해서 만든게 팔린다.


"에어"와 현실, 그 교차점

영화 속 소니는 조던을 발굴하기 위해 수많은 내부 반대를 무릅쓰고 움직인다. 자신의 직감, 업계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한 명의 선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낸다. 당시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스크가 큰 선택이었다. 미숙한 파트너, 새로운 원사, 불확실한 반응.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했고, 결과적으로 시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영화와 나의 이야기는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가능성을 인식한 사람, 그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시스템, 브랜드와 제품, 그리고 타이밍. 여기에 단 한 사람의 ‘믿음’이 더해질 때 시장은 움직이고, 실질적인 변화가 만들어진다.


결론: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의 '소니'가 될 수 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내게도 기회를 줬던 사람이 있었다. 나의 가능성을 믿고 도전의 기회를 준 사람이 있었기에, 나도 누군가에게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영화 "에어"가 말하는 건 단순한 스포츠 마케팅의 역사나 한 명의 스타 탄생기가 아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결정을 통해 한 산업이 변화하고, 개인의 인생도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에어" 같은 순간이 한 번쯤 있었거나 앞으로 찾아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 결정을 하고 밀어붙이고 설득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무엇을 지금 이 순간 준비하고 있었던가 또는 있는가다.


운이 따라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실력이다. 운만으로는 실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내용을 하나로 녹여서 그린 다음에 얼려본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