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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Dec 07. 2015

<동사서독과 무간도>_마음의 감옥과 지옥

갇힌 마음의 모습과 지옥에 빠진 마음을 그린 두 영화를 기억해내다

실연 때문에 절망에 갇힌

고수들의 마음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배우 장국영

2003년도에 본 이 영화를 근래에

다시 인터넷에서 찾아서 보게 되었다.


참으로 쓸쓸하고 막막하고 슬픈 사랑들을

다루고도 무척 아름답고 감각적이었던

이 영화는 12년 전의 기억과는 달랐다.


내 기억이 왜곡되어 있었던 것일까?

영화의 스토리가 달라져 있기에

이 영화는 새로운 영화처럼 느껴졌다.


이유를 찾아보니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 리덕스"라는 이름으로

재편집해서 다시 2013년에 상영했다.

화자의 시점이나 영상의 배열

기타 여러부분에 수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전적인 필름 편집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영화에 디지털을 통해서 리터칭이

이뤄지고 그 와중에 스토리도

바뀌었던 것이다.


국내 언론이 왕가위 감독의 인터뷰를

올려놓은 기사를 보니, 첫 개봉 당시

국내 배급자가 "중경삼림"의 성공을

후광으로 하고자 원본영화를

이리저리 손을 대어서

약간 다른 스토리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리덕스가 나온 것은 원래 이 영화가

미완성인 부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만

또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진실을 밝히는 것 같은 양상도 있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도 매번 볼 때마다

달라지지만, 또한 영화에 대한

기억도 이런저런 연유로 달라지니

이렇게라도 갱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에 보았던 영화들을

모두 다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동사서독에 대해서만큼은 전에 쓴

내 감상문을 이곳에 리터칭 해서 올려보고

다시 진실을 쫓아가 보고자 한다.


서독(장국영)은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서 살인청부업을 한다.

그의 이름은 구양봉이다.


매년 복사꽃이 필 때쯤이면

백타산으로부터 동사(양가휘)가 찾아오나

동사는 서독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애인(장만옥)의 마음을 뺐어간

서독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올 수 없는

여인에 대한 애틋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의 이름은 황약사이다.

중요한 스토리는 이렇게였고,

이 안에 있었던 내용들이 세세히

다시 보강되었다.


서독은 백타산에서 있을 때 자애인을

사랑했지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자애인은 그의

형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는데


결혼식 전날 같이 도망가자고 찾아온

서독에게 자애인은 절연을 선언한다.

사실 자애인은 서독을 무척 사랑했음에도

위악을 했던 것이고 동사를 통해서

서독에게 계속 메시지를 보내려 하지만

동사는 그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조차 전달하지 않는다.


양조위가 연기한 무사는 시력이

나빠짐에도 마적떼를 퇴치하기 위해서

서독의 청부도 없었는데 사막으로 나선다.

그의 이름은 맹무살수이다.

그가 무모한 대결에 뛰어든 것은

사랑하는 "복사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을

알게된 뒤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


계란 바구니를 들고 마적단을

죽여달라고 하는 여자가 자신의 아내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마적떼와 싸우기

전에 우격다짐으로 키스를 하고는,

마적떼와 싸우다 장렬하게 죽는다.


계란바구니와 노새로 살인을 청부하는 그녀를 서독은 박대한다.

그의 아내 "복사꽃"과 정을 통한 남자는

자애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 방황하던

동사였다.

복사꽃이 필 때쯤 자애인을 찾아갔던 동사는 복사꽃을 이름으로 가진 여자와 정을 통한다

동사는 자애인이 준 기억을 잊게 만들어

준다는 술인 취생몽사를 서독에게

마지막으로 들고 와서는

혼자 마시고 정처 없이 길을 헤매다

자신과 정을 통한 여자의 남편 맹무살수를

무심히 지나치고,  


이중 인격을 갖고 있는 모용언/모용연

남매를 연기하는 임청하에게

칼을 맞지만 죽음만은 모면한다.

임청하는 여자임에도 남장을 하고

다니는데 한 때 동료였던 동사가 그에게

"네게 여동생이 있다면 결혼하겠다"라는

말을 하자, 여자임을 밝히고 결혼을 하려다

동사에게 바람을 맞아 애증을 가진

상태였다.


그는 서독에게 동사의 살인을 청부하지만

다른 날에는 여자의 몸으로 오빠인

"자신"을 죽여달라는 말을 하는

이중인격을 오간다.


이후에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모용언이 잠들은 척하는 서독을 쓰다듬는

장면에서, 서로가 옆에 없는 다른 상대를

연상하며 손길을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모용언이 서독을 동사로 느끼고 쓰다듬고

서독이 그 손길을 자애인의 것으로 느끼는

절묘한 아바타 씬이 나온다.


나온 인물들 중에서 가장 정의롭고

단선적인 성격을 연기하는 배우는

떠돌이 무사 홍철공 역을 맡은 장학우이다.

그는 맹무살수가 죽이지 못한

마적떼들을 계란 몇 개만 받고

손가락을 잘려가면서 처단한다.

서독의 비열함을 질타하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강호를 떠돌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 서독으로 하여금

질투심에 휩싸이도록 만든다.


그들은 각각 무협지에서 유명한

고수들이 되어 강호를 휘젓는다.


모용언은 독고구패로서 물살을 가르는

신기에 가까운 검술 실력을 보여주고

홍철공은 협객으로서 거침없이 살아가고

구양봉은 악역으로서 단명하며

황약사는 괴인으로서의 모습으로......


이 영화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협 액션 자체라기보다는

바로 사랑과 관련된 신경증이다.


등장인물들 각각의 심리와 운명이

주역점과 정신분석학에 입각한 내용으로

매치되어 내레이션  처리된다.


[칼 융이 주역점과 자신의 분석 내용이

일치하는 것을 설명하는 일례는

"인간의 의식과 꿈의 표상"이라는

책에 나와 있다. 정신분석학과 주역은

그 분석력과 통계작업의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하는 바가 있다는 가정을

영화에서 하고 있음을 알려주기에

관심이 간 부분이다.]


(이렇게 위에 써놓은 내용이 근래 본

영화에서는 내레이션으로 나왔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자막으로 읽히지 않았다.

어쩌면 이 부분이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전까지의 무협영화나

그 이후의 무협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들의 각각의 모습에 대한

분석적인 설명이 나오는 영화는

볼 수 없다는 점과,


다시는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면에서도

이 영화는 희소성을 갖고 있다.


간간이 나오는 영화사에서

유일한 것이 되리라 생각되는 씬들은

빨리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뛰어난 무공을 지닌 인물들이

이른바 시답지 않은 연애로 망가져

어딘가에 틀어박혀 오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에 빠진 상황인데,


그들이 그 절망의 감옥 속에서

비틀거리는 모습들이 세세히 나온다.


영웅의 그림자, 그리고 너무도

인간적이라 불릴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대중들은 애써 눈감고

보지 않으려 들거나,

지나치게 과장하려 하곤 한다.


그 절망의 깊이는

그들의 인생의 파동이

보통 사람들과 달리 컸던 만큼

더 커다랗고 더 깊은 구멍 속으로

그들을 처넣어버리고


그들은 그곳에 빠져나갈 길을

쉽게 찾을 수 없어 내내 비틀거린다.


그러한 절망의 늪에서

튀어 올랐기 때문에 그들은 강해졌고,

결국에는 세상을 향해 한 칼을 쳐들고

나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다.


이 가정 속에서 무협지 속의 인물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을 제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의 절망에 대한

시적이고 유려한 표현으로도

관객들을 사로잡은 영화가

바로 이 '동사서독'이다.


비록, 우리나라 영화 배급업자가

오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편집본을

국내에 돌렸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학과

각기 다른 인간들의 슬픔을 다루는 모습은

영화를 보면서 되새겨 볼만한

부분들이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봐도

마치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처럼

세련되기 그지없기에 이 영화는

또한 명작임에 틀림이 없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릴 수 없는 지옥


홍콩영화의 침체기,

성공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자기 복제된 작품들로

흩어져 사라져버리고,


첨단 효과를 쓴 것들은

관객들의 눈을 피로하게 만들고,

이래저래 완전히 절멸이라도

할 것처럼 비틀거렸던,


홍콩영화가 다른 작품으로 나타났다.


꼭 필요한 만큼만의 총격씬,

꼭 필요한 만큼만의 반전,

그리고 입담.


홍콩 누아르가 다시금 보여주는

담백한 액션이 부담 없는

자극으로 다가왔다.


양조위에게 남우주연상을 줄만큼의

자격은 충분히 목격된다.


정체성의 확인이 불가한 상황,

그리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런 답답한 상황.


자기 자신을 '자기'라고 칭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옥 속에 두 남자가 갇혀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일상에 대한

하나의 변주로써 들려올 수 있다.

우리들 역시, 이 공간, 저 공간 속에

시간을 부으며 거하고 있지만,


정확히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설명을 가는 공간마다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밝힐 수 있는 처지는

되지 못한다.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어 넣은 의미부여,

그리고 우리의 짧은 제스처와 처세가

그들에게 우리가 누구인가를

설명할 수 있는 소스들이 될 뿐이다.


다시 그 공간으로부터 나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어야 할 '자기 자신'의

공간이 무너져버린 사람.


그 사람이 있는 자기 자신이

아닌 채로 있어야만 하는 공간은,

아니, 바로 그 사람 자체는

무간지옥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건진 메시지였다.

그리고 나서 오래지 않아

이 현실의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디파티드라는 헐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되고 신세계라는

우리 영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주제가 다름아닌 현대인들의

일상을 비유하는 일면을 지닌 것이

이와같은 감응을 만든게 아닐까싶었다.


그 이후의 무간도 속편들은 다시

복제 수준의 변주처럼 느껴져

볼 의욕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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