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디렉터스 컷

이 영화가 왜 시선을 사로잡았고 생각 속에 남아 있게 되었는가

by Roman

(표지 출처: 매일 경제)


영화가 무엇을 남기는가. 중요한 주제다. 오랜 시간 동안 영화 보기를 즐겼는데, '그래봐야 열심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운동이나 일, 연애, 육아를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인생살이에 아무런 긍정적인 것을 남기지 않았다, 시간 낭비이자 인생의 낭비였고, 하지 않음만 못한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평가하고 정리한다면, 그건 너무도 허무하고도 안타까운 일이 되니까.


한 줌 모래라도 쥐고 땅바닥으로 흘려버리면서 처연한 눈길로 바라보는 형상이 되더라도 이건 남았다 싶은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를 봄으로써 무엇이 남았는가? “를 탐구하는 글쓰기에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더 폴: 디렉터스 컷”은 무엇이 남을 수 있는 작품인가의 측면에서 볼만한 작품임이 분명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이 뒤에 나타나고 감동으로 남을 것만 같은 느낌이 계속 시선을 끌어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실제 벌어진 일상의 이야기가 판타지로 변하고, 그 판타지가 다시 듣는 이를 통해 또 다른 판타지로 변화하는 과정을 비유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출처: 경향 신문)


남은 것은 거대한 풍경이나 이국적인 색채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먼저 눈을 붙든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림처럼 보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들 위에 사람이 꾸어낸 이야기들이 얹히는 방식은 압도적이다. 감독은 2006년도에 만든 이 작품에 CG를 쓰기보다는 28개국 올로케이션을 택했다.


(출처: 미디어펜)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오래 남는 것은 그 장엄한 화면보다도, 병실 안에 누워 있는 한 남자와 그 이야기를 듣는 어린 소녀의 관계다.


(출처: Linnet Moss)


상상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도 보여준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서 더 이상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말한 사람의 의도와 듣는 사람의 이해는 어긋나고, 그 어긋남 속에서 전혀 다른 장면과 감정이 생겨난다. “더 폴”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붙잡고 있었다.


어른에게 이야기는 때로 계산이 된다. 시간을 끌기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하고, 상대를 붙잡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며, 자기 절망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우회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이야기는 아직 그렇게 닳아 있지 않다. 그것은 믿어버리는 것이고, 자기 식으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 순서가 뒤집히는 순간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른이 이야기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는 듣는 아이 쪽으로 기울어간다. 그리고 끝내는 그 아이가 이야기를 다시 살려낸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라기보다 이야기에 관한 영화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사람을 어디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 그런데도 왜 사람은 끝내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야기로 다른 사람을 붙잡으려 하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는 사람을 붙잡아 둔다. 이 역전이 가장 아름답고도 서늘한 부분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실의 고통이 판타지로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병실 안의 절망은 사막과 궁전, 전사와 도적, 복수와 추락의 이야기로 변형되지만, 그 화려함은 현실을 지우지 못한다.


(출처: ArchDaily)


상상력은 고통을 덮는 장식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다른 모양으로 다시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다. 그래서 이 영화의 판타지는 도피처라기보다 번역문처럼 느껴졌다. 차마 정면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언어로 옮겨 적은 결과물 말이다.


그 점에서 “더 폴”은 영화를 보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말해주는 작품처럼 보였다. 우리는 스크린 위의 이야기를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들 자기 기억과 상처와 바람을 섞어서 다시 본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각자 다른 장면을 오래 붙들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색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슬픔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결말을 기억한다.


결국 영화란 만들어진 것 한 편이 아니라, 보는 사람 수만큼 다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에서 남는 감정도 비슷했다. 뚜렷하게 정리되는 감동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살리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 같은 것.


진실이 사람을 살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누군가가 끝까지 놓지 않고 믿어주는 이야기 하나가 사람을 버티게 할 때도 있다는 것.


물론 그 이야기는 위험하다.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기대게 만들 수도 있고, 현실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인간은 결국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야기를 통해 서로에게 건너가려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래서 다 보고 난 뒤에도 단순히 “영상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말로는 남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2006년에 만들어 진 후 개봉해서 당시 3천만 달러를 제작비로 투입한 이 작품이 만든 수익은 3백만 달러, 즉, 10%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20여년 뒤에도 이 작품의 가치가 살아남아 있다.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사람이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만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 안에 들어가 전혀 다른 형태로 살아남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를 보고 무엇이 남는가를 묻는다면, “더 폴”은 적어도 이런 것은 남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이야기로 상처 입기도 하지만, 이야기로 겨우 살아남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영화란 결국, 누군가의 상상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일이라는 것.


(출처: Art of The Title)


그 사실을 이렇게까지 화려하고, 또 이렇게까지 쓸쓸하게 보여준 영화는 흔치 않다. "아모레스페로스"란 작품이 절대로 다시 만들어질 수 없는 "도시에서의 사랑의 중요성"을 담은 유일한 고유의 작품이었다고 감히 평가했었던 것처럼, 이 작품도 "이야기 조작에 대한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그려내면서도 이야기가 만드는 상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함으로써 유일무이한 고유의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예술을 표방하는 작품이다. 아마도 2006년도에 봤다면 재미가 없다고 집어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끌어가는데 손색이 없는 흥미로움과 재미를 제공하고 있다. 시대가 그리고 나란 관객이 20년 전에 느끼고 경험했던 세계와 지금의 세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요일 연재